이드 2부 – 166화
603화
이드가 삐딱하게 나오자 세상 좋던 사무엘 백작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잘 가다가 돌부리에 걸렸다는 듯 당황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무공을 전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드 경의 무공이 없으면 이그렌 경의 가문은 이대로 망할 수밖에 없소!”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그렌 경의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제가 무공을 내놓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드가 말을 하면서 이그렌을 보니,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정작 그 본인은 한 마디 의견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해 보였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사무엘 백작의 눈치를 보고는 말을 삼키는 것이,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이드가 모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 않겠소? 그의 가문이 지금 이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은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 때문이니, 마인드 마스터의 후손인 이드 경이 그 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사무엘 백작은 약자를 보호하는 인권 변호사처럼 주장했다.
그는 내심 이드가 생각처럼 반응하지 않아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가 알아본 바로 이드는 소드 팰러스에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손으로서 정식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소드 팰러스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이드를 마인드 마스터의 후손으로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무엘 백작은 그 이유를 소드 팰러스의 견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드는 그에 별다른 대처도 없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했다.
귀족 사회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금기. 사무엘 백작의 눈에는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 뒤에 숨은 만만한 이드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따로 밑 작업도 하지 않고, 첫 만남부터 이그렌을 내세워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스스로의 권리도 찾지 못하는 어수룩한 상대라면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이드의 반응이 생각과 달라 사무엘 백작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이자가 소드 팰러스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도 무공 때문인데, 무공과 관련된 일에서는 철저하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의 가치를 생각하면……………’
사무엘 백작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나섰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드는 사무엘 백작의 그런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뭔가 얻어 낼 생각으로 수작을 부린 것에 비해 사전 준비가 어설프다고는 생각했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무엘 백작님이 말씀하시는 도의적인 책임은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이 님의 무공은 오로지 그분을 위한 선의로서 마인드 마스터가 전했던 것입니다. 절대 일리나스 왕국에 전수하도록 전해 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이 님과 왕국 사이의 일은 오로지 둘 사이의 문제일 뿐입니다. 오히려 책임을 묻자면 제가 물어야겠지요. 허락도 없이 왕국에 무공을 전한 그래이 님과 무공의 진짜 주인인 마인드 마스터의 허락도 없이 그래이 님께 무공을 구매한 일리나스 왕국의 도덕성에 말입니다. 도대체 무공을 판매한 것도 아닌데, 책임은 무슨 책임이란 말입니까.”
“……”
사무엘 백작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돌았다.
“이드 경, 왕국의 도덕성을 언급하다니, 말이 심하오.”
“결코요. 사무엘 백작님도 무공의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아실 텐데요.”
“……”
사무엘 백작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물론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위해 백작인 자신이 타국까지 넘어오지 않았던가.
‘큰일이다. 설마 이자가 왕국을 걸고넘어지다니!’
사무엘 백작은 속이 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이드의 도의적 책임을 묻다가 오히려 왕국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로 불똥이 튀어 버린 때문이었다. 사실 대륙의 어떤 나라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이와 직접적으로 엮인 당사자들이 죽어 버렸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묻어 버린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인드 마스터가 돌아오더라도 이미 익혀 버린 무공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배짱에서 나온 도둑놈 심보도 있었다.
이미 대륙에 퍼진 무공을 마인드 마스터라고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어서 회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 마인드 마스터의 후손이라는 이드가 나타난 후에도 이와 관련한 문제는 표면화되지 않았고, 덕분에 은밀히 우려하던 사람들도 현재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이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배짱을 부리는 이유와 같이, 이미 대륙 전역으로 퍼진 무공을 회수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당장 저 대단한 소림과 무당도 무림에 퍼진 자파의 기본공(基本功)을 회수하지 못하는 판에 이드가 혼자 힘으로 대륙에 퍼진 무공을 회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굳이 언급해 봤자 서로 관계만 어색해질 뿐 아니라, 이미 고인 된 이드의 지인들만 욕을 볼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드와 대륙의 모든 나라가 묵시적으로 넘어간 일이 사무엘 백작에 의해서 비공식적이지만 다시 언급되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일리나스 왕국의 도덕성까지 이야기가 번져 버렸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일리나스 왕국은 정당한 주인의 허락 없이 무공을 익힌 파렴치한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다름 아니라 사무엘 백작 본인 때문에 말이다.
일리나스에서 이 사실을 아는 날에는 사무엘 백작을 절대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다 왕실과 다른 귀족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은밀히 이드를 찾아 왔으니, 그 속에 숨은 의도를 헤아려 괘씸죄까지 더해질 것이다. 예상되는 결과가 실로 끔찍했다.
식은땀에 사무엘 백작의 속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그러나 이드 경, 그렇게 따질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니겠소.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일이고, 무엇보다 그런 문제라면 본국뿐 아니라 대륙의 모든 나라에 걸친 문제가 되오. 본 작이 이야기하는 것은 오로지 이그렌 경 가문의 문제일 뿐이라오.”
“말씀대로, 일은 큽니다. 하지만 일리나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무공을 전수받은 마인드 마스터의 지인들과 어떤 관계를 통해 무공을 전해 받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일은 시간도 오래 지난 일이기 때문에 저도 굳이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리나스 왕국의 경우는 사무엘 백작님께서 직접 언급하셨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제게 물으시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무엘 백작은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서 다시 문제를 이그렌의 가문의 문제로 한정시키고자 했지만, 이드는 오히려 그의 발언에서 말꼬리를 잡아 그 책임을 더 키웠다.
‘본래 당신 같은 인간이 권리에 욕심은 많아도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지. 과연 나라가 시끄러워질 문제가 당신 책임으로 돌려지면 어쩌는지 보자고.”
“……허, 허허허.”
굳은 얼굴로 귀밑으로 떨어지는 식은땀을 닦던 사무엘 백작이 딱딱하게 굳은 웃음을 보였다.
“이거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원래 뜻은 그것이 아닌데, 말솜씨가 부족해서 오해를 만들어 낸 모양입니다. 이드 경, 부디 오해가 있다면 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사무엘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유불리를 알자 바로 잽싸게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드는 그 약삭빠른 변화가 오히려 눈에 거슬렸다. 더구나 이쪽 턴이 돌아온 만큼 지금의 포지션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그래이 님 가문의 미래가 달린 일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오해가 없도록 제가 아니라 이그렌 경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다. 그러는 것이 서로 간에 생기는 오해도 없을 듯합니다.”
이드는 그의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곧 쉴라와 기사들이 소드 팰러스에 도착할 시간인 듯 보였다.
“그러도록 하죠. 하지만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군요. 제가 이그렌 경을 따로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드는 간단하게 이그렌과의 이야기에서 사무엘 백작을 빼 버렸다.
그를 옆에 두고 이그렌과 이야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무엘 백작의 눈치를 보면서 그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듣고 싶었다.
일방적인 결정이지만, 커다란 실수가 있었던 사무엘 백작은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일어났다.
이그렌이 가장 뒤에서 문을 나서다가 망설이던 입을 열었다.
“증조할아버님께서는 이드 경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왕국에 무공을 전할 때도 깊은 고민 후에, 검후님과 상의한 후에 전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왕국의 오해가 있었을 때도 절대 마인드 마스터님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빠르게 말을 마친 이그렌이 사무엘 백작의 뒤를 쫓았다.
이드는 의외의 이름의 등장에 놀랐다.
“검후면 시르피 말이지? 그래이와 연락하고 있었던 말이야?”
과연 오랜 시간 활동한 만큼 발이 넓은 것 같았다.
[그래이가 먼저 찾아갔는지도 모르죠. 나라에서 압박하니까 어떻게 고민이 되지 않았겠어요? 도움을 구했겠죠. 아무래도 시르피 뒤에는 제국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래이를 제국민으로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서로 이드에게 무공을 배웠다는 공통점도 있고, 안면도 있는 만큼 왕국의 압박을 피해서 시르피의 보호 아래 제국민이 되는 쪽이 더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래이가 원래 살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일리나가 문득 말했다.
“고향이라…….”
이드는 일리나의 말을 생각했다.
이성적인 득실이 아닌 감성적인 판단에 따랐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 바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네요. 이그렌 경에게 그래이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재밌는 일이 많겠어요.”
이드는 내일이라도 당장 이그렌을 불러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이와 사무엘 백작에 대해서 물어볼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의 무공에 대해서도……………
“쓰읍. 그때 내가 그레이에게 특별한 무공을 가르친 게 없는데. 왜 그런 문제가 생긴 거지?”
미스터리였다.
쉴라가 밤을 달려 소드 팰러스에 복귀했다.
늦은 시간까지 수련하는 사람이 많은 소드 팰러스에 은색 기사단의 복귀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특히 은색 기사단장 쉴라가 늦은 시간에도 관계없이 소드 팰러스의 수뇌들을 모두 불러 모은 일은 순식간에 이슈가 되어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무사히 다녀오셔서 다행입니다.”
클라인 백작이 회의를 마치자마자 달려왔다.
이미 그가 올 줄 알았던 이드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쉴라 경의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이미 황궁으로부터 연락을 받아서 알고 있던 일이지만, 본인에게 직접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더군요.”
클라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황궁으로부터 연락이 있었습니까?”
“록마틴 후작의 이름으로 보고된 내용을 전달받았습니다. 아무래도 후작 측에 용기사가 있기 때문에 보고 속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쉴라 경이 의도했던 대로 일이 돌아가는 모양이네.’
이드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