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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7화


604화

록마틴 후작 입장에서야 좋은 자리를 비켜 줬으니 당연히 망설이지 않고 날름 채 갔을 것이다. 실패만 하지 않으면 뒤에 문제가 될 여지가 없는 이런 일은 힘도 힘이지만, 무조건 행동이 빨라야 했다.

“그런데 쉴라 경으로부터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만, 제가 찾아올 줄 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소드 팰러스에 생명의 관에 돈을 댄 자가 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당장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 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쉴라 경도 그렇게 말했지요.”

클라인은 소름이 돋은 팔을 매만졌다. 쉴라의 이야기 속 생명의 관은 흑마법사의 소굴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기사의 성지에서 돈을 대고 연구 결과를 보고받았다고?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소드 팰러스의 명예는 똥통에 빠지고, 전 대륙적인 스캔들로 번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사랑했던 만큼 분노한 기사들의 불신임과 공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클라인이 이드를 찾아오는 것은 쉴라와 헤어지기 전 이야기가 된 일이었다.

보는 사람도 많은 상황에 복잡하고 긴 이야기보다 저 한마디를 던지면 알아서 찾아올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엇보다 쉴라가 전한 짧은 말이 사건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드는 초조한 표정으로 설명을 기다리는 클라인에게 쉴라가 소드 팰러스에 설명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카린을 도왔던 마법 기사, 비올라의 증언, 부관주의 발언, 바이트 타블렛의 존재 등.

클라인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비올라를 보았다.

“그럼 저 마법사가…………..?”

“비올랍니다. 다시 당부드리지만 그에 대해서는 비밀입니다. 그게 그가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니까요.”

“하…… 하…… 잠깐, 잠깐만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클라인은 영혼이 빠진 듯한 웃음과 함께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단단히 닫힌 문을 비집고 저주와 욕설이 섞인 클라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어어어어어~!’

“쯧쯧. 기사라는 인간의 멘탈 수준이 겨우 저거야? 소드 팰러스도 별거 없구만!”

비올라가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듣고 히죽거렸다.

비올라는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에 클라인을 우습게 봤다.

[그렇지는 않아. 당장은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그렇지, 원래 소드 팰러스에서 여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다가는 혼난다? 그리고 혼자 끙끙거리는 것보다 한 번씩 저렇게 김을 빼는 게 좋지 않아? 난 혼자 꾹꾹 누르고 있다가 자폭하는 것보다는 좋다고 생각하는데.]

“흥!”

항상 라미아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는 비올라였지만,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 버렸다.

덕분에 이후의 고생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클라인 백작의 얼굴은 한층 맑아 보였다.

“크흠. 실례했습니다.”

“아뇨. 너무 마음이 괴로울 때는 그때그때 풀어 줘야 화병이 안 생기죠.”

클라인이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었다.

이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이쿠, 이게 무슨 망신이냐.’

아무래도 최근 검후 에너지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클라인은 당장 에단과 록의 입단속을 다짐하고는 급히 화제를 바꿨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사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마법을 통한 간단한 보고라도 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지요. 결국 쉴라 경이 의도한 부분이군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쉴라 경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었으니까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클라인은 쉴라의 생각이 그다지 좋은 계획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소드 팰러스에 있다는 스폰서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효과를 볼 수는 있어도, 그들의 활동을 완전히 멈추는 역할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인해서 스폰서는 뒤에서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활동할 것이다. 그들과 생명의 관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조심성 높아진 그들의 존재를 탐지하는 일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경계하고 찾으면 뭔가 나오겠지요. 설마 소드 팰러스에서 백작의 눈을 벗어나 흔적 없이 움직이진 못하지 않겠습니까.” 이드가 클라인을 추켜세우자 그가 짐짓 자신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말입니다.”

클라인 백작을 살피는 눈은 소드 팰러스에 많았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 끝도 없지요.”

“맞습니다. 그걸 풀어내는 일이 제 일이지요.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지금 들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그 정도 규모의 스폰서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한 줌밖에 되지 않지요. 당장 내일 수뇌부를 모은 자리에서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클라인 백작은 벌써 내일 할 일들을 계획하듯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스폰서 용의자들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라인 백작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돌아갔다.


이튿날 이른 시간부터 소드 팰러스에 회의가 열렸다.

소드 팰러스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전날 쉴라의 긴급 복귀와 회의 소집에 이어 다시 소집된 회의에 무언가 있다고 짐작들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혹시 검후에 관련한 일이 아닐까 불안해했다.

그러나 곧 검후에 대해 신앙 레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의 부정에 그 가능성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래서 평소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도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클라인은 회의 중간, 록과 에단을 통해서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대강의 흐름을 전해 왔다.

그 말에 따르면 결국 황궁과 록마틴 후작을 상대로 한 시답지 않은 주도권 싸움이었다.

이드로서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이드는 에단에게 더 이상 보고할 필요 없다고 전하고 라미아와 함께 저택의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바이트 타블렛을 분석할 생각이었다. 이 물건이 생명의 관의 핵심이며, 비올라의 의견대로 혼돈의 파편의 목적일지 모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빠른 분석이 필요했다.

이드는 무공을 기반으로, 라미아는 마법을 기반으로 바이트 타블렛을 조사했다. 그 사이 비올라도 억지와 애원과 간청을 해서 꼽사리 끼어 바이트 타블렛에 손을 댔다.

처음엔 그와 바이트 타블렛의 접촉을 막을 생각이었지만, 바이트 타블렛이라는 물건이 하루 이틀 분석해서 알아낼 수 있는 가벼운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드가 허락한 것이다.

중간에 네리베르와 케마란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두 사람도 한창 바쁜 이드를 보고는 얌전히 돌아갔다.


회의는 이튿날도 이어졌다.

소드 팰러스의 생각이 정해진 만큼 황궁과 록마틴 후작과의 의견 조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클라인 백작과 존 워스를 제외한 두 검왕이 황궁으로 갔다.

“존 워스만 남았다고?”

“예. 모두 소드 팰러스에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고 하면서 남았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이유보다 마스터를 따로 만나기 위해서 남은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드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에단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가 그 양반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징글징글합니다. 도망쳐 다니느라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니까요, 아주.”

“그럼 좀 더 고생할래? 아무래도 그런 인간은 클라인 백작과 같이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드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말하자 에단이 검게 죽은 얼굴로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마스터, 얼마 전부터 그 양반 눈에 살기가 실렸다니까요. 이제 도망치면 진짜 죽일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농담이야. 찾아오면 모셔와. 그렇게 만나고 싶다면 만나 줘야지.”


그러나 에단은 존 워스가 아닌 이그렌의 방문을 알려왔다.

“정문 앞에서 한참 서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 집 앞의 초딩도 아니고……….]

“어차피 한번 불러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잘됐네. 어디 있어?”

“일리나 님이 차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이드는 라미아와 비올라에게 바이트 타블렛의 분석을 맡기고 지하실을 나섰다.

“사무엘 백작은?”

“이그렌 경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알아본 바로는 사무엘 백작이 일리나스와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다고 합니다.”

“이번 일은 혼자 주도한 것 같았는데, 아닌가? 누구와 연락했는지는 알아?”

“거기까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흠. 이그렌 경이 알려나?”

이드가 방에 들어서자 이그렌이 벌떡 일어났다.

“이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따로 청할 생각이었는데, 잘 오셨습니다.”

“혹시 사무엘 백작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증조할아버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으실까 봐 기다리지 못하고 제 쪽에서 먼저 찾아 왔습니다.”

자리에 앉은 이그렌이 땀이 난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걱정은 마세요. 어차피 그때 이야기는 모두 사무엘 백작님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러니 오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전 이그렌 경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사무엘 백작님이 잘못 이야기하셔서 제가 오해하고 있을 만한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듣고 나머지 이야기를 하지요.”

“알겠습니다.”

이그렌이 해 주는 그래이의 이야기는 사무엘 백작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이야기보다 좀 더 디테일했고, 당시 그래이의 심정에 대해서 자세하다는 차이점이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도 여전히 나라를 속인 오명을 뒤집어쓴 부분이 있었고, 그 아들이 무리해서 귀족 사회에 들어가려다 망하는 등 사실 관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듯이 이그렌과 사무엘 백작의 이야기는 온도 차가 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보군요. 그래이 님을 따라 조용히 영지에서 지냈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결론이 그랬다. 무리해서 귀족 사회에 끼어들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오명은 그대로였을지언정 집안이 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하는 어조로 보아 그래이의 손에서 자랐다는 이그렌도 동의하는 듯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묵묵히 고개만 숙였다. 이드가 그 모양을 보다가 눈빛을 바꿔 물었다.

“그럼 이제 제가 어떻게 해 주길 원합니까?”

“예?”

“그래이 님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그렌 경의 말대로 오해도 없을 것입니다. 원래 그래이 님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오해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오늘 단순히 그것만을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그걸 말해 보세요.”

이드의 말을 들은 이그렌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그렌은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한참을 망설이더니, 일리나를 돌아본 후 등에 메고 있던 검을 탁자에 올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그렌 경?”

“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엉?”

예상하지 못한 이그렌의 행동에 이드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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