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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8화


605화

아무래도 이놈, 사람을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이드는 이그렌과 그 앞에 놓여 있는 검을 번갈아 보았다. 깨끗하게 잘 관리된 고색창연한 검. 특별한 것 없는, 이제는 골동품에 가까운 평범한 검이었다.

때마침 이드의 시야 밖에서 일리나의 하얀 팔이 나타나더니, 그녀가 검을 쥐고 살폈다.

“그래이의 검이에요.”

“하지만……”

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기억에는 그래이에게 우연히 운 좋게 손에 넣은 마법검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그러자 이드의 생각을 짐작한 듯 일리나가 검을 살짝 뽑아 보였다. 한 뼘가량 뽑혀진 잘 관리된 검신에 잎이 풍성한 나무 한 그루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그래이가 이드에게 새 검을 선물받기 전까지 사용하던 검이에요. 제가 그들과 헤어질 때 혹시 찾아올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표식을 남겼는데, 그래이는 이 검에 남겨 주길 원했어요. 자신이 처음 사용하던 검이라고, 절대 버리지 않을 검이라면서요.”

당시 그래이는 마법검은 워낙 귀중한 물건이라 누가 훔쳐 갈지도 모르고 계속 사용하다 보면 부서질지도 모르지만, 이 평범한 검은 오로지 추억 속에 귀하게 소장할 검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평소 그답지 않은 감성 충만한 발언에 하엘과 일란이 제법 크게 놀랐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이그렌을 앞에 두고 해도 되나?

퍼뜩 그런 생각이 드는 찰나, 일리나가 말했다.

“이그렌 경이 이 검을 꺼낸 걸 보면, 절 알아 본 것 같아요. 그렇죠?”

“확신은 없었습니다.”

이그렌이 이드에게 하던 것보다 더 반듯한 모양으로 일리나를 향했다.

“하지만 처음 보고 이상하게 낯이 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런지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증조할머니께서 검후님께 얻어 오신 그림 속 일리나 님의 얼굴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기다 이름까지 똑같아서 어쩌면,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증조할아버님의 검을 들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검후의 방에서 봤던 그림을 복사해서 얻어 갔던 모양이다.

“이 표식의 뜻을 아는군요?”

이드는 일리나가 쓰다듬고 있는 표식을 바라보았다. 순간 푸른 나무 마을의 중앙에 서서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는 나무가 떠올랐다.

“아, 마을에 있던 정령수군요! 그런데 여기에 무슨 뜻이 있어요?”

“네. 혹시 도움이 필요할 때 주변에 엘프가 있다면 이 표식을 보이면 도와줄 거라고 했어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을 받으라구요.” 

“괘씸하네요.”

이드는 엉뚱한 행동을 보이던 모습과 달리 의뭉스러운 이그렌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그저 인연만을 내세우고 끝이 아니라, 옛날 약속이 담긴 물건까지 꺼내 올 줄이야. 어떤 의미로는 순수한 호의를 이용하는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이그렌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꼼지락거리는 손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닦았다.

괘씸한 생각에 못 본 척할까 하는 맘이 들다가도, 초초해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약해진다.

“일리나는 어쩌고 싶어요?”

“돕고 싶어요. 제 약속이니까요. 단, 할 수 있는 일이어야겠지만요.”

“일리나 생각이 그렇다면.”

이드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있는 이그렌을 소파에 앉게 하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그렌 경은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길 원하는 겁니까? 이그렌 경의 사정을 들어 보면 사무엘 백작의 부탁대로 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으로 보입니다만?”

“그게, 사실과 좀 다릅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드는 일리나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일리나를 통해서 확인을 받았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몇 가지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이그렌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가문이 오명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래이보다 더 큰 공을 얻고 손해를 본 가문이 있었다. 바로 사무엘 백작의

가문이었다. 원래 그래이가 살고 있는 마을이 그가 다스리는 영지 안에 있었고, 마을로 돌아온 그래이를 왕궁에 데리고 갔던 것도 당시 백작이었다. 그런데 무공에 문제가 생기고 백작가도 그 영향을 받게 되자 사무엘 백작가에서는 가장 앞서서 그래이의 가문을 핍박하고, 그 뒤로는 그래이가 혹시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무공의 핵심을 갖기 위해서 그래이의 작은 아들을 이용했다.

그렇게 백작 가문에 휘둘린 작은 아들로 인해서 형제간의 다툼과 거대한 빚이 생겼고, 영지까지 잃었다. 백작가는 그 빚을 넘겨받아 꾸준히 그래이의 가문을 압박하고 감시했다.

하지만 그래이의 아들은 물론, 손자와 증손자조차 그래이의 올바른 무공을 전수받지 못하자 관심을 끊고 오히려 빚을 정산하려 했는데, 그러는 차에 이드의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한 백작은 갚을 수 없는 빚을 대신해서 이그렌이 그의 명령대로 따르기를 원했고, 이그렌은 피할 수 없는 빚의 변제를 위해 그를 따라 왔다는 것이다.

이드는 혀를 찼다.

결국 이그렌과 사무엘 백작의 이야기는 앙꼬 빠진 찐빵 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사무엘 백작이 음흉한 속셈을 가진 것 같다고 록이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설마 그래이가 귀족이 되고 영지를 얻었다가 다시 망하는 모든 곳에 백작가가 관여되어 있을 줄이야.

‘그래이, 이 멍청한 놈아. 어떻게 백작 가문에 90년이나 끌려다니며 당하냐.’

이드는 빚만 가득한 가문을 이어받을 증손자를 두고 떠났을 그래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동시에 사무엘 백작의 이마에 척살이라는 도장을 박아 넣었다.

그에 대한 대응 방안도 정해졌다.

사형!

무조건 사형이다!

한 집안을 뼛속까지 빨아먹고, 그 인연을 미끼로 감히 자신까지 낚으려고 해!

이왕 돕기로 결정된 것, 이드는 화끈하게 질렀다.

“어떻게 도와주길 원합니까? 백작의 목이라면 당장이라도 따줄 수 있습니다.”

“헉! 아, 안 됩니다!”

이드의 과격한 발언에 이그렌이 기겁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뿐 아니라 뒤에서 장승처럼 서 있던 에단도 슬그머니 나섰다.

“마스터, 귀족의 목을 직접 치시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차라리 명령만 하시면 제가 아무도 모르게……”

스윽-

에단이 목 아래로 손을 그어 보였다.

같이한 기간이 길지도 않은 주종 간에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딱딱 맞는지.

“결국 둘 다 같은 이야기지 않습니까!”

“으하하. 이그렌 경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가 부담스러운가 봅니다. 하지만 이그렌 경, 백작 같은 귀족들은 뒤끝이 아주 지저분합니다. 살려 두면 두고두고 골치 아프지요. 이런 자들은 깨끗하게 목을 베어 버리는 것이 베스틉니다.”

에단이 척하고 엄지를 내보이자 이그렌이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혹시 자신이 말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 아닌가 후회하던 그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았다.

“만약 백작이 죽으면 저희들은 더 이상 일리나스에 살지 못합니다. 백작가에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문제라면 백작가를 멸족시키는 것도 방법입니다. 방법은 많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머리카락 한 톨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그게 싫으시다면 일의 핵심인 백작만 처리한 후에 이그렌 경의 가족분들이 제국민이 되는 것도 방법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뭘 하던 인간이야!”

잘도 저런 태연한 낯짝으로 살벌한 말을 읊어 댄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요리 메뉴에 대해 설명하는 줄 알겠다.

이그렌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백작가에는 그의 아버지가 잡혀 있었다. 부친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그와 함께 백작가로 잡혀 갔다. 이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그대로 노예로 팔려 갔을 것이다.

지금은 노예로 팔려 가지 않았지만, 이그렌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오늘의 방문과 고백은 아버지의 목숨을 건 큰 도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태를 가볍게 보고 서로 목을 자르겠다고 나서는 이드와 에단의 모습은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쯧쯧, 백작씩이나 돼서 그런 지저분한 수나 쓰고 잘도 백작까지 올라갔네요.”

에단이 질색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증조부님을 왕실에 모시고 간 공으로………….”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노예로 팔겠다고?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지!

이드는 아찔한 느낌에 뒷목을 부여잡았다.

그때 일리나가 말했다.

“그럼 이그렌 경의 아버님을 구출하면 되나요? 원한다면 시온의 제 가족들이 나서 줄 수 있어요.”

수호수의 아홉 가지라면 백작가에서 사람 하나 빼 오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백 년 가까이 외유가 없어서 길눈이 어두워서 문제지. “감사한 말씀이지만, 살던 마을도 문젭니다.”

이그렌의 고향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핏줄과 친분으로 엮인 일종의 집성촌 형태였다.

이그렌의 집안이 힘들 때 그 빚을 나누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 이그렌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마을에는 증조할아버님과 어머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그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게 이 때문인 듯했다.

도와달라고 한 사람이 조건도 많았다.

“면목 없습니다. 하지만 도와주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이드가 묵묵한 이그렌의 눈을 보며 말했다.

“상당히 거액인데, 고향을 떠나긴 싫다면서요?”

“당장 돌아갈 수 없어도, 언제든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고향이라.’

이드는 이그렌의 말에 이제는 아득한 중원의 산천이 떠올랐다.

이그렌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이드는 이그렌을 일단 돌려보냈다.

사무엘 백작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어수룩해 보이던 모습과 달리, 그런 건 잘할 수 있다고 걱정 말란다. 일리나의 모습을 보고 그래이의 검을 들고 온 것을 보면,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이그렌은 그래이의 검을 남겨 두고 갔다.

사무엘 백작도 그것이 그래이의 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이드가 그래이에게 줬던 마법검도 빚을 대신해 백작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현재는 일리나스 왕국에 있는 어느 돈 많은 자작가의 벽면 장식으로 걸려 있을 거라나?


그렇게 이그렌을 배웅하고 막 저택으로 들어서려는 이드의 눈에 멀리서 투닥거리며 다가오는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보였다.

두 사람은 무엇이 문제인지 저택으로 조금 다가오다 멈춰서 투닥거리고, 다시 조금 움직인 후 투닥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왈가닥기가 있는 케마란은 몰라도, 평소 그렇게 얌전을 떠는 네리베르가 길가에서 저러고 있다니.

“……너희들 거기서 뭐하니?”

“앗! 마스…………… 아니, 이듭………… 읍읍.”

이드가 부르자 케마란이 반가운 얼굴로 대답하다가 네리베르에 의해 입이 막혀 버렸다.

반사적으로 반항하는 케마란의 귓가로 네리베르의 경고가 흘러들었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이드 님의 이름을 부를 생각이에요! 우리가 왜 다투고 있는지 잊은 건 아니겠죠!”

“읍읍!”

“좋아요.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안 되는 거예요.”

“읍! 읍읍읍읍, 읍읍!”

“그래도 안 돼요!”

똑같이 읍만 반복하는데도 잘도 알아듣는 네리베르였다.

이드는 그 재밌는 광경에 피식 웃고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자. 주변에 보는 사람들도 많잖아.”

어느새 이드가 불렀다는 사실도 까먹고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던 두 사람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그 모습을 보던 에단이 낄낄거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이여~ 후배님들! 재밌게 노는구나.”

그가 놀리자 네리베르가 부끄러움에 손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뒤따라 들어온 이드가 물었다.

그러자 머뭇거리는 네리베르를 밀어내고 케마란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드 님. 이드 님에 대해서 들키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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