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71화
608화
일리나가 힘없이 소파에 늘어진 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는 중에도 무엇이 재미있는지 피식피식 웃음이 샌다.
“우우우…….”
이드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일리나의 소리 죽인 웃음소리에 일리나의 무릎에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설마, 데일리와 스폴의 지도는 직접 신청하라고 했다고 해서 대부분의 인원이 그쪽으로 빠질 줄이야!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수련생의 숫자가 순식간에 빠져 버렸다.
데일리와 스폴은 자신들 앞으로 모여든 수련생을 능숙하고 부드럽게 처리해서 돌려보냈다. 소드 팰러스의 아이돌 같은 은색 기사단으로 지내면서 이런 대처에 상당히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거부하자, 다시 이드 앞으로 수련생이 모여들었다.
두 사람의 직접 지도를 받지 못한다면, 짧은 시간만이라도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것은 데일리와 스폴을 향해 수련생이 빠져나갈 때 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수업을 수업이 아니라, 데일리와 스폴을 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 수업은 관심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더한 망신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애초에 수련생들을 가르칠 열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던 이드도 폭발할 뻔했다.
이런 소란을 보고 바이트 타블렛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비올라가 얼마나 비웃던지!
이드는 즉석에서 이틀간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으로 징계를 내렸다.
그 후 자기 앞에 모여든 괘씸한 수련생들에게는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의 추천서를 받아 오도록 했다.
“그리고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수련생은 추천서를 검토한 후 발표하겠습니다. 추천서 검토에 제법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쯤이라면 저도 바쁜 일을 마치고 직접 수업과 지도에 나설 수 있겠습니다.”
“우~!”
다시 말해서 추천서 확인 후에 지도를 받게 되는 수련생들은 데일리와 스폴을 볼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수련생들은 대놓고 실망한 모습을 보였다.
개중에는 불공평하다고, 데일리와 스폴의 지도 기간을 늘리라고 소리치는 놈도 있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해 주었다. 불공평이 어디 있나. 이드의 수업에, 이드가 조금이라도 빨리 수업을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평하고 공정한 일인데.
아마 대부분의 수련생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전날 이드의 지도를 요청했던 수련생들을 보란 듯이 데일리와 스폴에게 맡겼다.
인정한다. 좀 유치한 심통이었다.
그래서 방으로 돌아와 일리나의 무릎에 숨어 버렸다.
“괜찮아요. 수련생들이 이드에 대해서 알게 되면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드의 지도를 받고 싶어서 모여들 거예요.”
과연 그럴까?
오색 기사단 중 은색 기사단보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단도 있지만 인기는 은색 기사단이 단연 최고였는데.
여기에서는 시크하게.
“많이 몰려도 곤란해요. 내가 그들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지금이 이 정도 숫자가 딱이에요.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입이 많아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흥, 역효과는 이미 난 거 아닙니까? 여기사들 수업을 놓친 애들의 원성이 높던데요.”
이드를 따라 들어온 비올라가 벌칙에 대한 반감을 보태 빈정거렸다.
“삼 일?”
이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비올라는 빈정거리던 태도를 버리고 즉시 숙이고 들었다.
·추천서를 가지고 오면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좋은 자세다. 하루로 줄여 주마.”
….크흑………….
비올라는 기뻐하는 한편,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났다.
생명의 관에서 바이트 타블렛과 정신과 영혼의 관에 있는 탑주의 지식을 노리고 배신을 했지만, 이런 비굴한 입장에 처할 줄이야.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그저 이후에 찾아올 달콤한 열매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수밖에………
그때 밖에서 갑작스러운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천둥처럼 일어났다.
웬 소란인가 보니 쉴라가 저택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침 돌아가지 않고 있던 수련생들이 그녀 주변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냉정히 그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가벼운 팬 미팅을 마친 쉴라가 록의 안내를 받아 나타났다.
“휴우~ 오늘은 어제보다 더 굉장하네요.”
“쉴라 경이 데일리 경과 스폴 경을 지원해 주신 덕분이죠. 그나저나 은색 기사단은 정말 굉장한 인기군요. 이 정도면 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는 건 금방일 것 같습니다.”
“부끄럽네요.”
말과는 달리 쉴라는 이런 유명세가 기쁜 듯 얼굴이 밝았다. 검후와 함께하며 어느새 그녀에게도 당연한 일이 된 모양이다.
“그런데 어제도 오시고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십니까?”
“두 사람이 잘하고 있는지 확인차 들렀습니다.”
떠넘긴 게 아니었어? 이드는 순수하게 돕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는 쉴라의 눈빛에 달리 말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수련생들의 실력을 확인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복잡할 것도 없지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케마란과 네리베르, 그리고 에단을 붙여 드렸습니다.”
“현명한 결정입니다.”
진짜, 진짜 진심이다. 도대체 두 사람에 대한 쉴라의 신뢰란 어떤 것일까! 하지만 이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함께했던 전우에의 배려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세요?”
“정말 두 사람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두 사람을 이유로 이드 님과 좀 친하게 지내려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으니까요.”
공식적으로 쉴라와 이드는 어제가 첫 만남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데일리와 스폴을 지원했다. 특히 스폴은 수석기사다. 첫 만남에서 내주기는 불가능한 특급 전력이다. 하지만 두 사람을 이유로 쉴라가이드와 관계를 튼튼히 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유로서는 충분하다.
“그리고 들른 김에 영혼의 관과 정신의 관에 대한 정보도 얻고 싶었습니다.”
쉴라의 시선이 소파에 슬쩍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비올라를 향했다. 무언의 요구를 비치는 그녀에게 비올라가 답했다.
“내가 계약한 건 이쪽이야. 그쪽한테 그걸 줄 이유는 없다고. 거기다 그쪽은 아직 카린 기사의 정보에 대한 대가도 정산 안 했잖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언제 줄 거야? 낄낄낄.”
이드에게 당한 반동인지, 낄낄거리는 비올라의 태도는 금세 거만해졌다.
“데이트였던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해 주지.”
이게 정말 데이트를 대하는 여자의 자세인가? 아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해도 문제다. 데이트라는 단어에 포함된 두근거리는 핑크색이 후줄근한 회색으로 물드는 것 같다.
담담을 넘어 삭막한 쉴라의 대답에 도발한 비올라가 오히려 위축되어 버렸다.
저래서야 데이트는 고사하고 눈이라도 제대로 마주칠는지.
이드는 내심 비올라를 향해 혀를 차고는 손을 까딱거렸다.
“자료 정리한 거!”
“그게 아직………….?”
비올라는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사실 정리할 시간이 없긴 없었다. 정보야 머릿속에 들었지만, 첫날은 피곤해서 쉬기 바빴고, 둘째 날부터 오늘 아침까지는 바이트 타블렛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법사의 연구는 신선의 바둑보다 더한 중독성을 가졌다. 라미아가 쫓아내지 않았으면 잠도 자지 않았을 것이다.
‘자고로 밤샘은 마법사의 미덕인데……………’
지하실의 임시 바이트 타블렛 연구실에서 쫓겨날 때 얼마나 서럽던지. 처음으로 라미아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곧바로 마법의 정수에서 태어난 라미아를 원망한 사실을 회개했지만.
“마침 잘됐네. 오늘 정리하면 되겠다.”
이드가 쓰윽 눈짓하며 말하자 비올라가 힘없이 일어났다.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이드 님, 제가 제출할 자료 역시 필요합니다.”
“그렇죠. 비올라, 똑같은 내용으로 두 부………… 아니다, 네 부 준비해.”
“으흐…….”
최하위 마법사나 해야 할 일을 명령받은 비올라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그 뒤로 쉴라의 목소리가 따라와 등을 두드렸다.
“데이트는 언제든 가능하다. 원하는 날짜를 정해서 통보하도록.”
데이트 날짜를 잡으라는 말인데, 결투 날짜를 잡으라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문득 돌아본 비올라의 눈에 쉴라의 등 뒤로 보이는 창밖에서 우글거리는 수련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결투 허락 같은 데이트 허락은 둘째 치고, 소드 팰러스에서 그녀와 데이트를 했다가 저 수많은 추종자들의 손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부르르.
비올라가 문득 저 여자가 고도로 교묘하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우웅.
일찍 해가 진 숲 속 폐허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작동한 후 이드와 에단이 나타났다.
이드는 희미한 별빛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둠을 꿰뚫는 이드의 눈에 이전보다 많이 바뀌어 있는 폐허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전에는 부서지고 불탄, 말 그대로 폐허였다면 지금은 돌과 나무, 철과 천 조각 등 종류별로 철저하게 분류되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불타버린 오두막이 있던 자리는 나뭇조각 하나 남지 않았고, 검게 탄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땅이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마스터, 제가 저거 정리하느라 눈이 빠져서 죽을 뻔했습니다. 클라인 백작님은 진짜 미치신 것 같다니까요. 아주 그냥 악마예요, 악마!”
에단이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나뭇조각 하나하나까지 에단의 초인기로 확인하고 분류한 클라인 백작의 꼼꼼함에 학을 뗐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그렇게 고생한 덕분에 수확이 있었잖아. 고생했어!”
이드도 말과 다른 그의 기색을 읽고는 에단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히죽-
순간 에단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짜릿한 기분이었다.
지금 대륙에 마인드 마스터 본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 에단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검후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지 않았는가 말이다.
에단이 이드를 오두막이 있던 터의 중앙으로 데려가 땅을 걷어내자, 돌로 뚜껑을 덮어 둔 상자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부서진 돌조각과 타다만 나뭇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동네 외톨이 꼬맹이가 보물을 모아 둔 것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다.
이드가 기감을 올려 살펴보아도 아무런 흔적을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
“간파의 눈으로 보면 이 물건들에 흔적이 남았다는 말이지?”
“네, 마스터. 하지만 누구의 흔적이고, 어떤 식의 힘인지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여기에 남은 미세한 힘의 흔적이 검후님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흔적이 기사와 마법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초인의 것에 가깝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하다. 이쑤시개 같은 나뭇조각 하나로 범인의 힘의 특성과 종류, 기술까지 단정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사기다. 거기다 하루 이틀 지난 흔적도 아니고!
하지만 검후의 실종에 초인이 관련된 사실을 확인해 줄 증거를 찾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의미가 있었다. 아직 그 증거를 알아볼 사람이
에단뿐이라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새로 찾은 것은?”
“이쪽에 있습니다.”
에단은 이드를 숲 속으로 안내했다.
오두막을 중심으로 한 수색을 마친 클라인과 에단은 오두막을 뒤져 나온 흔적을 동력 삼아 수색 범위를 숲까지 넓히고 있었다.
그러다 수일 전 클라인이 황궁으로 가고 에단만 홀로 고생하고 있던 중에 의심될 만한 흔적을 발견했고,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이드가 이 날 밤 에단과 함께 달려온 것이었다.
구불구불한 숲 속을 지난 에단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땅 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깁니다. 저쪽에서부터 드문드문 이어지는 흔적이고, 방향을 봤을 때 진행 방향은 이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라는 말이지………….”
이드가 에단이 가리킨 부분을 살폈지만, 앞서의 잡동사니와 마찬가지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약은 약사에게, 사냥은 사냥개에게, 수색은 에단에게!
“따라가 보자!”
이드는 즉시 고(GO) 사인을 냈다.
에단의 간파의 눈이 보여 주는 흔적은 땅과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며 상당한 간격을 두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이드는 흔적을 남긴 자의 가볍고 날렵한 움직임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에단은 오두막을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리고 그 끝에 한 나무 아래 멈춰 서서 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이드와 에단은 무언으로 눈짓을 주고받고 올라간 나무 꼭대기의 가지 속에서 검은 상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감시용 아티팩트입니다. 주변에서 있었던 일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용도입니다.”
간파의 눈으로 알아낸 게 아니라, 직업상 익숙한 물건의 출연에 에단이 확신했다.
“CCTV인가?”
“네?”
“아, CCTV라는 비슷한 기능을 가진 감시 장치가 있어. 당연히 이놈이 찍고 있는 건 저기겠지?”
고개를 돌린 이드 앞에 깔끔하게 정리된 오두막 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당연합니다. 아니라면, 제가 록의 자식입니다.”
“내 생각도 같아. 네가 록의 자식이 돼서 패륜 사건이 일어날 일은 없겠다.”
“흐흐흐. 이건 돌아가서 라미아나 비올라 마법사에게 보이면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걸 여기 설치한 놈들이 검후님의 실종과 관련된 것이 확실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오늘 진짜 날을 잘 잡은 거 같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은 이런 날 쓰는 거겠지?”
“예……예?”
이드는 숲의 경계 부근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