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73화
610화
화르륵.
황금색 수레바퀴 위로 연기처럼 피어오른 귀여운 황금빛이 타오르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23호 긴급 보고. 작전에 투입된 요원이 미복귀 중입니다. 작전 종료 시각에서 5시간을 지나고 있으며, 이전 지시대로 요원들의 수색은 중지된 상태입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 중이던 라울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려.”
“명령에 따라 다음 지시까지 대기하겠습니다.”
황금색에서 나온 대답과 함께 촛불처럼 타오르던 황금빛이 스러졌다.
라울은 서류를 보느라 굳어 있던 목을 풀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돌아라.”
라울의 초인기가 발동하고 황금색 수레바퀴가 회전하자 그 위로 어둠 속에 잠긴 숲의 영상이 떠올랐다. 주물주물 목을 주무른 라울이 뱅글뱅글 손가락을 감자 영상이 뒤로 감겼다.
빠르게 감기던 영상에 정리된 폐허에서 사라지는 이드와 에단, 그리고 죽은 두 남자와 기절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리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씨, 오랜만!”
라울은 죽은 듯 쓰러진 요원들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이드의 얼굴을 보고 반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천천히 손가락을 돌려 이드와 에단이 처음 숲에 나타나던 순간을 찾아 확인했다.
영상 속에는 이드와 에단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중간중간 시야가 막히는 부분이 있었지만, 아티팩트가 숨겨져 있던 나무를 중심으로 삼각형을 이룬 두 개의 시점을 보여 주는 영상에는 필요한 대부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라울은 정리된 폐허의 모습이나, 증거물이 담긴 상자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와 같은 영상은 앞서 에단과 클라인 백작이 녹화된 영상으로 확인이 끝난 일들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오로지 요원들의 행동과 이드였다.
“동네 산책 나왔니? 역시 바보는 치료 불능이야.”
“어머나, 빠르네.”
“아무리 버리는 카드지만 너무한다.”
라울은 마치 연극을 보듯 영상을 살피며 혼자 놀라고, 실망하며 수다를 떨었다.
경지에 이른 혼자 놀기의 고수였다.
그러나 중간중간 라울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날 때도 있었다. 에단이 간파의 눈을 사용할 때와 이드가 번개처럼 하늘을 달려 요원을 제압하는 모습에서였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이드의 속도는 예사롭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초인들 중에도 속도에 특화된 강자들이 있는데, 이드의 빠르기도 그들에 크게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라울은 이드가 허공을 달리는 장면을 슬로우로 돌려보며 감상했다.
그리고 한 사람, 라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의외로 에단이었다.
에단에 대해서는 라울도 이미 아는 바가 있었다. 그가 트와이스에 속해 있을 때에 남겨진 자료는 검토가 끝난 상태였다.
당연히 간파의 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간파의 눈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흔적을 찾을 정도로 뛰어난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특히 라울 본인도 가지고 있는 눈에 관한 능력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라울의 관심은 더욱 각별했다.
“초인기 간파의 눈. 탐나는 눈알이네.”
능력이 탐난다는 말인지, 눈알이 탐난다는 것인지.
에단을 잡아와서 ‘네 눈알을 넘겨라!’고 할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뉘앙스가 풍겼다.
그 사이 영상 속에서는 이드들이 요원들을 잡고 사라지고 있었다.
“수준 차이가 너무나는 것도 유치한 맛이 있어서 재밌네. 그런데 역시 처음부터 월척이 걸리지는 않는구나.”
라울은 다시 침묵에 싸인 숲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가장 실력과 경험이 부족한 요원들을 써서 끌어내고 싶은 목표가 있었다.
다만 그 목표가 이드는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뭐, 못 잡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천천히 해야지, 천천히, 응응!”
라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쪽에 갈무리해 두었던 정예 요원의 파견과 무기한 작전 대기에 대한 서류를 한 장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류에 멋들어진 사인을 하던 라울이 펜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컴컴한 숲을 비추는 영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차차. 그런데 고기를 잡으려면 미끼를 물기를 기다려야 하잖아!”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고기의 공복도와 스케줄을 모르는 이상 미끼를 물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라울은 그만큼 여유롭지도, 또 그만큼 지루한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뭐, 이럴 때 쓰라고 부하가 있는 거 아니겠어?”
라울은 문 너머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비서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들의 머리를 하나씩 찍어나갔다.
“누. 가. 누. 가. 가. 장. 안. 졸. 고. 오. 래. 앉. 아. 있. 을 까. 요. 알. 아. 맞춰 봅. 시. 다? 다………….”
평소 예뻐하던 비서가 찍힌 순간 라울의 눈이 허공을 헤엄치더니 곧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축. 하. 합 니 다. 당첨!”
평소 상사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드는 복귀 후 가장 먼저 에단에 대한 검사를 라미아와 비올라에게 맡겼다.
라미아는 큰일은 아니라고 말했고, 비올라는 새로운 연구거리가 생겼다고 희희낙락하며 에단을 지하로 데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록과 쉴라가 달려왔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도 초인들에게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축적한 정보와 일치하는 특징이 될 만한 흔적은 그 어떤 것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조차 작은 영지의 대장간에서 하루 이틀이면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아무런 특징 없는 것들이었다.
먼저 그들을 살핀 이드로서는 짐작했던 일이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쉴라가 기절한 초인의 숨을 확인하고 말했다.
“이자는 은색 기사단에서 심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심문에 관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이드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하고 있는 꼴을 보면 쓸 만한 정보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해야죠.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아기 때 먹었던 이유식의 색깔까지 토해 내도록 할 수 있어요. 은색 기사단에 이 기회를 기다리는 기사들이 많으니까요.”
쉴라의 말에서 얼음 가루가 풀풀 날렸다.
이드는 철황권에 사지가 부러져 널브러진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기절해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이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아니지, 은색 기사단에 가면 확실히 죽을 거야. 반드시 죽을 거야!’
이자들이 검후의 숲에 나타나고 아티팩트를 찾았다는 것은, 그 배후에 검후를 납치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납치법의 일당!
검후에 대한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제국을 달리는 은색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적이며, 원수였다.
그녀들은 그에게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쉴라의 말처럼 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식의 색깔까지 기억해 내는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심문은 어려울 텐데요. 제가 손을 좀 독하게 써서.”
거침없이 때려 놓기는 했다. 따로 혼혈을 제압한 것도 아닌데, 철황권에 기절한 후로 아직까지 미동조차 없다.
“걱정 마세요. 심문할 때 포션이나 치유 마법사는 필수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다시 부서질 테니…………….”
이드는 속삭이는 듯한 쉴라의 뒷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진 만큼 검후님의 숲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당장 실종된 초인들을 찾기 위해서 다른 자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또 아티팩트를 다시 설치하기 위해서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아티팩트를 설치해서 이자들이 무엇을 살피고 있었는지도 궁금한 일이었다.
“그 임무, 저희 은색 기사단이 주도해도 되겠습니까?”
당장 자신들의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숲으로 이동할 방법을 이드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언제 올지 모를 자들을 경계해야 했다. 그러자면 그 숲에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데, 클라인 백작도 없는 지금, 에단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은색 기사단이 맡아 준다면 든든하겠습니다.”
“그럼 곧 파견 기사들을 뽑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쉴라의 머릿속에는 숲으로 파견될 기사들의 얼굴이 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지금은 사로잡은 초인의 심문이 먼저였다.
곧 쉴라의 명령을 받은 은색 기사단이 몰려와 초인 남자를 고이고이 모셔 갔다.
마치 어느 나라 왕자님이나 쉽게 깨지는 보물처럼.
“…..저 남자, 다시 볼 일은 없을 거 같죠?”
이드가 멀어져 가는 은색 기사단의 무리를 보다 문득 말했다.
“절대로 없습니다. 휴~ 여기 소름 돋은 거 보십시오. 이렇게 은색 기사단이 무서워 보인 건 처음입니다. 가시가 아니라, 치명적인 독을 품었습니다.”
“검후를 찾아 제국을 뒤지고 있는데 오죽하겠어요. 그보다, 이그렌과 사무엘 백작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이드가 록을 보며 말했다.
이그렌의 고백을 듣고 록에게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을 부탁해 둔 참이었다.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아직 의미 있는 내용은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일리나스 왕궁은요?”
“그쪽에서는 모르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그렌 말대로 중간에서 제대로 해 먹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네요.”
“정황을 보면 확실해 보입니다.”
말을 마친 록이 이드의 얼굴을 살피고는 말했다.
“그런데 사무엘 백작에 대한 내용까지 확인한 후에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그렌 경의 부친이 인질이 되어 있는 상황이니 구출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허락하신다면 제 선에서 기사들을 모아 보겠습니다.”
록은 수련생뿐 아니라 일반 기사는 물론, 소드 팰러스 출신의 기사들도 이드 아래로 모을 기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눈앞에 마인드 마스터를 따르는 용감하고 용맹한 대륙 제일 기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록의 꿈에 찬물을 부었다.
“정보 확인만 확실히 해 주세요. 구출해야 한다면 시온의 엘프들이 도와주기로 했으니까요.”
“일리나 님의 마을분들이시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더 빠르고 확실하게 사무엘 백작가에 대해서 조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록은 내심 실망한 얼굴을 감추고 그의 일터로 돌아갔다.
“록은 이드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기를 바라나 봐요.”
일리나가 밤바람과 함께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죠. 혼돈의 파편도 나타난 마당이잖아요. 그리고 록이 이야기한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록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갑자기 제가 그들 앞에 나서면 사람에 따라서는 반감을 가질 수도 있어요.”
이드는 일리나의 어깨를 안고 말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들어갈까요?”
“아니요. 좀 있으면 은색 기사단의 분들이 달려 올 테니 그때까지 이렇게 같이 서 있어요.”
“내 님이 원하신다면야. 하하하.”
이드는 사랑스러운 연인을 등 뒤에서 감싸 안고서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맹수처럼 달려올 때까지 밤하늘을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