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78화
615화
툭 튀어나온 이마에 좁은 미간, 그리고 위로 몰려 있는 눈코입이 노린재를 닮은 사무엘 백작이 찾아왔다.
이드는 어쩐지 그가 노린재와 닮았을 뿐만 아니라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물론 진짜 냄새는 아니다.
귀족답게 열심히 씻고, 좋은 향수를 뿌렸을 테니까. 하지만 인격적인 냄새는 어떨까? 틀림없이 노린재의 방구 이상으로 고약할 것이다.
거기다 무조건 피할 수도 없는 상대이니, 귀찮기는 오히려 노린재 이상이다.
“소문이 과하게 났을 뿐입니다. 미리 오신다고 연락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드는 반갑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차가운 이드의 태도에 사무엘 백작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그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크흠. 그래, 아무래도 수련생들의 수련에 방해가 되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겠지.’
사무엘 백작은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켜 웃는 얼굴을 찾았다.
“이런, 본 작이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구려. 이드 경의 명성이 드높아지니 그저 기분이 좋아서 생각이 짧아졌나 보오. 경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기쁘지 뭐요. 하하하.”
‘하! 댁이 내 마누라야? 당신이 왜 기뻐하는데?”
이드는 내심 그를 비웃다가 곧 진저리를 쳤다. 앞에 있는 저 욕심 많은 노린재가 마누라라니! 단순한 비유라도 끔찍했다.
“큼.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용무도 없이 찾아오시지는 않으셨을 테지요?”
용무가 없으면 찾지 말라는 뜻?
사무엘 백작은 이드의 말이 내심 거슬렸지만 모르는 척 웃으며 말했다.
“하. 하. 하. 과연 눈치도 빠르구려. 사실 본 작은 그저 이드 경이 언제 소식을 줄까하고 그것만 기다렸는데, 그러던 차에 이드 경이 수련생을 가르치고 만검수련이라는 수련법을 활용하더라는 소문이 나지 뭐겠소. 마인드 마스터의 수련법이라니, 본 작까지 체면을 잊고 수련에 동참하고 말았소이다.”
소드 팰러스에 수련 열풍이 불고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그도 만검수련을 시도했을 줄이야.
“호오, 그래요? 효과는 있으셨습니까?”
이드는 호기심에 물었다.
“짧은 시간 수련을 했기 때문에 아직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과연 범상치 않은 방법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소.”
핵심이 빠진 껍데기 수련을 범상치 않다고 하다니!
“역시 보시는 안목이 있으십니다. 열심히 하시면 분명 얻으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드는 내심 그의 대답에 코웃음을 치며, 아무 망설임 없이 그를 얻는 것 없는 수련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 속을 모르는 사무엘 백작은 기대감에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 경이 그렇게 말하니 내 열심히 해 보려오. 그런데 지금은 본 작보다는 여기 이그렌 경을 봐 주지 않으시겠소?”
사무엘 백작의 말에 뒤로 물러나 있던 이그렌이 앞으로 나왔다.
이드가 그와 뒤늦게 인사를 주고받자 사무엘 백작이 말을 이었다.
“소문을 듣고 이그렌 경도 만검수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본 작은 문득 만검수련이라고 그에게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가 익힌 무공처럼 그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허탈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다오.”
누가 들어도 그가 이그렌을 극진히 아낀다는 생각이 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사정을 아는 이드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대신 이그렌의 무공에 관심을 보였다. 첫 만남에서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도 정작 그 무공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이그렌의 두 번째 방문에서 기회가 있었지만, 그의 충격적인 고백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침 저도 궁금해서 알아보려던 참이었는데, 잘 오셨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려.”
“감사합니다.”
사무엘 백작을 따라 이그렌이 고개를 숙였다.
“큰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이그렌 경의 무공을 바로 보고 싶은데 여기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드는 수련생들이 만검수련 중인 수련장을 가리켜 보였다.
이그렌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익힌 무공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수련생들 앞이 아니라 전 제국민 앞에서도 무공을 펼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드는 수련생들을 잠시 뒤로 물리고 수련장을 비웠다.
그렇지 않아도 쉬는 시간이 필요했던 수련생들은 기뻐하며 후다닥 수련장을 비웠다.
하지만 수련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대는 스폴에게는 불만이었는지 그녀가 다가와 물었다.
“갑자기 수련생을 물리다니, 무슨 일이시죠?”
“혹시 은색 기사단의 기사분들이 아니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하지만 그녀들은 이드의 대답보다 먼저 나선 사무엘 백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드는 그들을 버려두고 이그렌을 수련장으로 올려 보냈다.
“할 수 있는 대로, 배운 대로 힘껏 해 봐요.”
이그렌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가짜 무공이란 비난과 비웃음을 들으며 그래이의 무공을 배운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
한쪽에서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수련생들이 부담스러웠지만, 그 이상으로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이제 드디어 가짜 무공이란 꼬리표를 뗄 때가 왔다!
이그렌은 이드라면 자신이 익힌 무공이 제 위력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공의 본래 주인인 그가 아니라면 그래이 이외에 배우지 못하는 무공에 대한 의문은 아무도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래이도 생전에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간절히 이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뜻에서 이그렌의 이름도 이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그렌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드에게 그래이의 간절했던 바람과 자신의 이름의 연원을 이야기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을 들었다.
아무리 해도 희미한 검기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검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드 님이나 나나 똑같이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에서 나온 이름을 가졌구나.’
이그렌은 멀게 느껴졌던 이드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은 대륙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그렌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모두 조용히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수련장에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가득했다. 이그렌의 검은 바람처럼 표홀하고, 구름처럼 자유로웠다.
검후의 난화십이식을 기초로 만들어진 제국의 무공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낮선 차이에 수련생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드 앞에 보이는 무공이 어떤 대단한 모습을 보일지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곧 실망으로 흐려졌다.
이그렌의 손에 들린 검은 그저 표홀하고 자유로운 뿐 결정적인 힘이 없었던 것이다.
희미한 검기를 품은 바람은 하늘거리기만 할 뿐 결정적인 순간 폭풍이 되지 못했고, 변화무쌍한 구름은 필요할 때 비를 뿌리지 못했다.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답게 스스로의 실력은 모자랄지 몰라도 보는 눈이 확실한 수련생들에게 이그렌의 무공은 그저 그런 칼춤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까득!’
이그렌도 수련생들의 그런 반응을 읽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수련생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이그렌은 이를 악물고 이드를 바라보며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이드의 눈에 이그렌의 무공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 그때 분명히…….”
이드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옛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풍운십팔봉법.”
그래이의 성격에 가장 알맞은 무공이라는 생각에 봉법을 검술로 바꿔서 가르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중 도저히 그래이가 감당하기 힘든 두 가지 초식을 빼고 전수했다.
그래서 이름까지 바꿔서 풍운십육검법이라고 했다.
“그때 상당히 힘들었지…………”
이드는 아득한 눈으로 당시를 기억했다.
시키는 대로 잘 움직이는 몸과 달리, 아무리 설명해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이의 머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이드는 한심함에 혀를 찼다.
당시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이를 위해 이드는 과감하게 초식에 손을 댔다. 그가 이해하는 한계치까지 초식을 덜어내고, 변형시켜 오로지 그래이를 위한 무공으로 최적화시켰다.
그래이를 가르치는 시간보다 무공을 고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투자된, 그래이가 아니면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일리나스의 기사들뿐 아니라 이그렌조차 익히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그래이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그렌이 아무리 그래이의 증손이라지만 그래이와는 키와 힘, 체형은 물론 성격도 달랐다.
당연히 그래이와 같은 위력이 나올 수가 없다.
사실 사람이 거기까지 똑같으면 그것도 문제다.
그건 증손이 아니라 분신, 클론이다.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모습을 훔치는 도플갱어다.
“헉헉…… 어떻게…… 헉………… 보셨습니까?”
검을 납검한 이그렌이 물었다. 마음이 급한지 숨도 갈무리하지 못한 모습이다. 땀이 비 오듯 하는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부정적인 대답은 생각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이드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유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왜, 도대체 왜 다른 기사들과 저는 할아버님의 무공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까?”
이그렌은 가슴에 눌러 담아 두었던 한을 풀듯 외쳤다.
하지만 이드는 그 말에 답해 줄 수 없었다.
그래이를 존경하는 그에게 도저히 그래이의 머리가 나빠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그렌은 답을 듣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이드는 그래이의 사정을 제외하고 무공이 그를 위해서 조정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로지 그래이만을 위한 무공!
이그렌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던 수련생들 사이에서 감탄과 부러움이 흘러나왔다.
“아…… 그랬군요. 역시 무공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마인드 마스터께서 그분의 생명을 구하셨던 증조할아버님만을 위한 특별한 무공을 전해 주셨던 것이었어요.”
그래이 때부터 시작된 한과 분노가 훌훌 벗겨진 이그렌의 얼굴에 가짜 무공이라고 조롱당한 무공에 대한 자랑이 생생히 떠올랐다.
‘아, 진짜! 그건 그래이의 뻥이라니깐!’
이드는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해석한 이그렌의 말에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이그렌에게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두었다가는 저 근본 없는 이야기가 진실로 둔갑해서 세상을 떠돌 것 같았다. 그래이에 대한 존경에 금이야 가겠지만 어쩌겠는가. 손자를 두고 제대로 뻥을 친 그래이의 업보지!
‘가짜 무공이 아니라 우정의 증표라니…………. 곤란하구나.’
한편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무엘 백작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일리나스는 세상으로부터 보는 눈이 없다는 비웃음을 당할지도 몰랐다.
“크험. 허면, 이드 경. 이그렌 경은 초대 시온 자작의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것이오?”
“그 무공은 그래이 님을 제외한 누구도 익히지 못합니다. 대신 그래이 님을 위해 변형되기 전의 무공은 배울 수 있지요.”
“오오. 시온 자작의 무공 원류를 말하는 것이구려. 과연!”
사무엘 백작의 눈이 번뜩였다.
“허면 그 원류되는 무공을 이그렌 경에게…………”
“그건 일전에 말씀드렸듯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지 못한 이그렌 경이 너무 안타깝지 않겠소.” 사무엘 백작이 안타깝다는 듯 말꼬리를 잡자 이그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전………… 전 정말 증조할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다른 무공이 없더라도, 저는 아무런 발전이 없더라도 증조할아버님의 자랑인 이 무공을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익힐 것입니다.”
“……아, 그 무공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러네!’
이드는 듣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에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이그렌 경의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다. 그래이 님을 위한 무공이지만 이그렌 경이 배워서 발전이 없지는 않습니다. 타인의 것이라도 천천히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되지요. 이번에 만검수련을 해 보셨다고 했지요?”
“예.”
“그럼 더 열심히 하십시오.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러다 보면 그래이 님의 무공이 이그렌 경의 무공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드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감동하는 순간.
“헛소리!”
지독히도 오만한 목소리가 비웃으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