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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84화


621화

인테그란 후작은 사람들이 다시 줄을 서는 것을 보며 살짝 비켜 둔 커튼을 내리다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순간 너무 거대하던 이드의 모습이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눈은 잠시 후 파르르 떨리며 다시 떠졌다. 눈을 감자 신화 속 거인 같던 이드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마차 밖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도 소리처럼 알아듣기 힘든 소음이었지만, 그중 후작의 귓가에 선명히 들리는 몇 가지 단어들이 있었다.

거인. 사검왕. 소드 팰러스의 주인. 마인드 마스터. 검후.

그리고…………… 게일.

“확실해! 차기 소드 팰러스의 주인은 저분이야…”

“게일 경이 아깝기는 하지만 역시 실력 차가 너무……………”

뿌드득!

들려오는 말소리에 인테그란 후작의 손에 쥐여 있던 고급 지팡이의 손잡이가 산산조각이 났다. 잠시 더 귀를 기울이던 그는 손잡이가 사라진 지팡이로 마부가 앉아 있는 벽을 두드려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다 후작은 마차가 출발하는 흔들림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허・・・・・・ 그 엄청난 위압감에도 말은 영향이 없었다고?”

말이란 놈은 보통 예민한 게 아닌데, 겁까지 많아 까다로운 동물이다. 얼마나 겁이 많은지 갑자기 발밑에 나타난 쥐를 보고 놀라 날뛰어 주인을 떨어트리는 이야기는 흔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로 많이 전해 온다. 그런데 그런 말이 수백의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든 이드를 보고도 얌전하다고? 거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차를 끌어?

“가능한 일인가?”

검으로 상대를 골라서 찌르는 것도 아니고, 넓은 공간에 오로지 사람만을 상대로 존재감을 뿜어내다니.

가늘게 떨리던 인테그란 후작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삼검왕도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그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저택으로 돌아온 인테그란 후작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소드 팰러스에 마련한 저택은 제법 컸지만, 반대로 그의 개인 서재는 작았다.

잠시 숨을 돌린 그는 검은 구슬이 달린 장신구를 책상 위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장신구를 응시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 후 검은 구슬을 잡아 돌렸다.

화아아악-

구슬의 중심부가 갈라지고 황금빛이 새어 나오며 황금안이 눈을 떴다. 익숙한 듯 그 모양을 지켜보던 후작은 황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네. 아버님.”

후작의 부름에 황금안에서 후작을 닮은 목소리가 답했다.

“전날 소드 팰러스에 큰일이 있었다.”

이런 통신이 드물지 않은지 후작은 바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또 그 이드에 관한 일입니까?”

후작의 아들, 게일 인테그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드의 만검수련과 황제의 대면 요구까지. 최근 후작이 큰일이라고 하면 모두 이드와 관련된 일들뿐이었다.

그에게 이드는 마음의 생채기 같은 존재였다. 이드는 지금까지 게일이 쌓아 올린 경력을 한 번에 날려 버린 존재였다.

후작도 게일의 반응이 이러한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건 정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블러디 혼이 이드에게 패배했다.”

“무….”

믿기지 않는 소식에 말문이 막힌 듯 게일이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 이 소드 팰러스에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벌써 그를 네 번째 검왕이라고 부른다. 곧 이 일이 알려지기 시작하면 온 제국이 그렇게 부르겠지.”

“…….”

게일은 답이 없었다. 그저 조용한 숨소리만이 들렸다.

하지만 인테그란 후작은 게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실, 대답이 없어도 게일의 속마음은 충분히 짐작되었다.

“아들아, 이제 더 이상 그냥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당연히 네 것이 되어야 할 자리를 두 눈 멀쩡히 뜨고 빼앗길 수는 없지 않겠느냐.”

후작은 마차 밖에서 들려오던 말들을 생각하며 말했다.

“우리 것을 지켜야겠다.”

“아버님…………….”


어제 마르텔을 만나지 못한 페시딘이 오늘 또다시 마르텔을 찾았다.

마르텔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인을 통해 만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지만, 페시딘은 무시하고 밀고 들어갔다.

“……”

마르텔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이를 본 페시딘은 문 밖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하인들을 조용히 물리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마르텔은 잠든 듯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페시딘은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 페시딘도 심사가 편치는 않았다.

흥분한 마르텔을 충동질할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마르텔이 이드와 만났을 때 예상되는 몇 가지 결과에 대해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마르텔이 이드에게 패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는 어떤가!

이드의 기를 죽여 놓기는커녕, 사검왕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개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완벽히 다른 결과에 솔직히 마르텔의 멱살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워스도 올 거네.”

순간 그 때까지 정신을 잃은 척 환자 노릇을 하던 마르텔이 눈을 번쩍 뜨고는 그르릉거렸다.

“그 자식은 왜 불러?”

마르텔은 지금 상황에서 페시딘은 몰라도 존 워스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기절한 그를 안아서 데려온 게 워스라고 하지 않았던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은 라이벌이자 친구에게 못난 모습을 보인 것이 지독히도 수치스러웠다.

“자네의 패배가 그만큼 큰일이기 때문이지.”

“아픈 곳을 무자비하게 찌르는군. 인정머리 없기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워스가 들어왔다. 마르텔은 그를 보고 등을 돌려 누웠다.

“멀쩡하군.”

워스가 의자를 가져와 페시딘과 마주 앉으며 말했다. 그는 마르텔을 그의 저택에 데려다준 후 신관의 도착과 동시에 돌아가 버렸다. 

“흥!”

마르텔이 돌아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페시딘은 반백년을 훌쩍 넘게 살고도 아이 같은 그의 모습이 한심한 한편 부럽기도 했다.

‘새파랗게 젊은 이드에게 지고도 참으로 맘 편한 인사로다. 하기사,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우리 삼검왕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겠지.’ 

마르텔은 삼검왕의 갈등을 부드럽게 하는 윤활제 같은 자였다.

그 때 워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서, 난 왜 부른 건가?”

“당연히 이번 일 때문이지. 이드라는 이름에 사검왕이 더해진 이야기가 끝없이 돌고 있네. 지금 이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페시딘의 말에 워스가 무심히 마르텔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을 수습하고 싶다는 건가 본데. 이미 끝난 일이 아닌가? 마르텔과 이드가 싸웠고, 마르텔이 졌네. 부정할 수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워스의 말에 돌아누웠던 마르텔이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놈. 다 아는 이야기를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워스의 말을 받아치고 싶지만, 그의 말대로 온전한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쯧, 그래. 사실이지.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대로 그냥 두다가는 소드 팰러스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날지도 모르네.”

이름이 높아지면 자연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모여든다. ‘반대의 뜻으로 빠가 까를 만든다’는 말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어지간한 일이면 수습할 수 있지만, 이건 수습 불가야. 무려 사검왕이네. 기존의 삼검왕을 꺾은 새로운 초인의 등장이야. 거기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특전을 가졌고, 무엇보다 젊지. 그런 일을 덮겠다는 것은………… 글쎄, 솔직히 말해서 시간 낭비네.” 

“으음.”

페시딘은 남의 일인 듯 말하는 워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봐 온 것이 아닌 그의 태도를 지금에 와서 고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구석이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 적당한 지명도의 어중간한 기사라면 몰라도 무려 삼검왕이다. 더구나 이번 일로 대중들이 이드를 사검왕이라고 말하는 실정이다.

그런 사건을 없던 것으로 한다?

차라리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이름을 잊게 만드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페시딘의 생각이었다. 이 문제를 그냥 두면 황제의 요청 전에 이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그의 계획에도 중차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수습하는 것은 차라리 대결을 없던 것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페시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마르텔에게 은근히 물었다.

“혹시 자네, 그와 싸우기 전에 몸 상태에 이상은 없었나?”

벌떡!

순간 누워 있던 마르텔의 상체가 스프링처럼 튕겨 오르고,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시딘을 노려보았다. 평소 마르텔이 성격 더럽기로 유명하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언제나 철저했다. 그런데 지금 페시딘의 말은 그런 그를 부정하고 의심하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대결 전에 자신의 몸 상태도 깨닫지 못하는 얼뜨기로 봤다는 뜻이었다.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아…. 진정하게. 내가 말실수를 했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혹시나 하고 말을 꺼냈던 페시딘은 예상대로의 반응에 내심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면 뭔가?”

“수련장 위에서 싸웠다지? 그런데 평소 자네 실력을 생각하면 수련장이 아니라 저택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허! 누굴 파괴마로 보나?”

저택이 부서지지 않아 이상하다는 페시딘의 말에 마르텔은 억울하다는 얼굴이 됐다.

그러자 옆에서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워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자네가 싸웠다 하면 뭐 하나는 부서지니까. 큰 걸로.”

“이익!”

“그리고 이상한 것도 있었지. 자네의 진짜 검을 꺼내지 않았지? 거기다 검력도 일정 수준으로 조절했고.”

“흥. 봤다면서 무슨 딴소리야. 내가 바로 소드 팰러스의 블러디 혼이야. 옆에 수련생 꼬맹이들이 말똥거리는데 지랄을 떨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전력을 기울였든 말았든 진 건 진 거니까 다른 말 하지 마. 봐서 알겠지만………….”

마르텔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과 대치하던 이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놈은 강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야.”

마르텔은 그 말과 함께 워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네를 닮은 듯도 해. 철벽처럼 벽을 치고 기분 나쁘게 내 검을 관찰하는 것이 말이야. 재수 없어.”

“그런가? 그건 못 본 것 같은데. 좋군. 페시딘, 난 그가 마음에 드네.”

농담 같은 말에 대답하던 워스의 갑작스런 고백에 늙은 친구들의 재롱에 웃고 있던 페시딘이 정색을 했다.

“이보게!”

“물론, 삼검왕의 의견을 그리하라는 것은 아니야. 그저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가 검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하는 말인가?”

“그게 어떤가? 오히려 좋지 않나? 그가 그 뜻을 지킨다면 자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지 않겠나?”

틀리지 않은 말에 페시딘은 침묵했다.

그가 은색 기사단처럼 검후의 수색에 전념한다면 소드 팰러스의 전체 전력은 올라가고, 삼검왕의 자리가 흔들릴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소드 팰러스가 유지될 때의 경우다. 그는 소드 팰러스의 독립을 원했다.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어쩌면 검후를 부정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과연 그때에도 그가 외부에서 검후를 찾고만 있을까?

무엇보다 자신들은 검후를 배신했다. 가장 큰 원죄였다. 기사도와 명예를 버린 행위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확실히 자신의 것이 된 기사를 제외한 소드 팰러스와 이드는 적이 된다.

페시딘은 결코 그런 위험한 가능성을 품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실패로 인한 피해가 성공했을 때 얻을 이익의 두 배를 넘으면 무조건 포기하는 쪽을 택해 왔다.

그런 페시딘의 속을 안다는 듯 워스가 말을 더했다.

“잘 생각하시게. 우리와 초인파가 검후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내면 우린 다시 대립하고 싸울 것이야. 기사와 초인은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초인파와의 싸움을 위해서 이드의 무공을 얻어 내자는 말인가?”

“따로 재촉할 필요도 없지. 이미 풀고 있으니까.”

만검수련을 뜻하는 워스의 말에 마르텔이 얼굴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밴딩 훈련법.’

패자 무언이라고, 이제 밴딩 훈련과 다른 만검수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흥분해서 달려가게 만든 밴딩 훈련법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의견이네. 다만 이드는 우리와 싸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초인들과는 무조건 싸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그들과 우리는 공존할 수 없어. 그럼 나는 나머지 수련을 하러 가네.”

워스는 할 말 다했다고 말하고는 곧장 방을 나가 버렸다.

남은 두 사람은 따로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성격이란 점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듣고자 하던 이야기는 모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워스가 지지한다는 말이지.”

지금까지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밝히는 일이 적은 워스였지만, 한번 정하면 어지간해서는 바꾸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확실히 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페시딘은 그를 꺼리는 마음이 강했다. 이드가 쓸모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으로 신경을 써야 할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문득 환자복을 걸친 마르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나……?”

갑작스런 질문에 마르텔은 우물거리며 단번에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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