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85화
622화
페시딘이 문병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말이 문병이지 당사자는 이미 말짱했다. 오랜만에 소드 팰러스에 신전을 적극 유치한 덕을 톡톡히 봤다. 마르텔은 이번에 달려와 준 신전에 거액을 기부했다.
그리고 오늘부터 당장 특훈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번 패배로 승부욕에 제대로 불이 들어온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페시딘이 돌아가기 전, 마르텔이 씁쓸하게 이드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패자는 유구무언이나, 자네 의견처럼 우리가 돌아가기 힘든 강을 건넌 것도 사실이지. 생각대로 해.’
페시딘은 그의 말에 후회와 아쉬움이 담겼음을 느꼈다.
마르텔 개인이 가진 이드에 대한 반감이 사라졌다고 할까, 호감이 생겼다고 할까.
“끌끌. 하여간 기사들이란.”
고작 한 번 싸웠다고 생각이 바뀌다니……………
페시딘은 일전 꺼내려다 다시 넣어 놓은 검은 구슬을 꺼내 들며 말했다.
“그러나 말이야, 자네 말대로 우린 이미 강을 건넜지. 이미 쏘아 보낸 화살을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네.”
화아아앗-
블러디 혼 마르텔이 이드에게 패배하고 수일이 지났다.
소드 팰러스는 여전히 이드와 마르텔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술집에서는 매일매일 말다툼으로 인한 싸움이 벌어졌고, 소드 팰러스 구석구석에서 의견차로 생긴 고성이 높았다. 또 하루에도 수십 건씩 검성에 사실 확인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은 일국을 다스리는 국왕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중 한 명이 소드 팰러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힘에서 밀렸다는 사실은 삼검왕의 절대성을 훼손하는 거대한 스캔들이기 때문이다.
사검왕이라는 정신 승리의 단어가 재빠르게 탄생하지 않았다면 소드 팰러스는 내외적으로 단단히 뒤집어졌을 것이다.
며칠 동안 수십 배로 늘어난 업무에 피곤한 얼굴로 이드를 찾아온 클라인은 차라리 이 정도 소란으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오히려 아직도 저택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본래 태풍의 눈이 조용한 법인데. 하하하, 이번 일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의 말처럼 에단이 엄청난 양의 신청서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플래카드를 걸었던 날과 비교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날부터 며칠은 정말 소드 팰러스의 모든 사람이 다녀갔다고 해도 좋을 만큼 사람이 몰렸었다.
지금 찾아오는 사람들은 소드 팰러스 외부로 퍼지는 소문을 듣고 뒤늦게 신청서를 들고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거 본격적으로 제국 전역에서 신청서가 들어올까 봐 두렵습니다. 벌써 소드 팰러스에서 받은 신청서로 방 하나가 가득 찼다니까요.”
신청서를 받아 온 에단이 걱정하는 말투와는 달리 자랑하듯 방문을 열어 보였다.
방안에는 편지와 두루마리 형태로 제출된 신청서가 천장에 닿을 듯 가득히 쌓여 있었다.
요즘 매일 두툼한 서류를 처리하는 클라인이 봐도 기가 질릴 정도의 양이었다.
“소드 팰러스에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은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어제오늘 도착한 것만 이 정도라니까요.”
에단은 자랑처럼 푸념하면서 종이 탑 앞에 신청서를 던져 놓았다. 거기에는 수백 장이 넘어 보이는 신청서가 쌓여 있었다.
“설마 이걸 매일 정리하는 거야?”
“에이, 말도 안 됩니다. 바람의 정령이 작업하지요. 일리나 님과 라미아가 불러낸 바람의 정령이 수백 장의 서류를 ‘촤좌좌좍!’ 하고 순식간에 정리하더군요. 정령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정령으로 저 많은 서류의 정리가 가능하다니, 탐나는군. 그럼 나도 부담 없이… 에잇!”
클라인은 정말 탐난다는 듯 서류의 탑을 보고는 품에서 수십 장의 봉투를 꺼내 던졌다.
에단이 팔랑거리는 봉투 중 하나를 잡아 뜯었다.
“신청서네요?”
“저번에 말했지? 내가 이드 님 쪽에 섰다는 정보가 알려질 거라고.”
•알려져서 신청서를 부탁받은 겁니까?”
에단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때는 뭔가 은밀한 스파이 일을 하다가 발각된 느낌이었는데, 이건 발각이라기보다는 유명인과의 친분이 알려졌다는 느낌?
“하하하,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너무 갔어.”
“쯧, 그런 거 같습니다.”
방을 나온 클라인이 이드를 보며 말했다.
“그런 관계로 이제 삼검왕 측의 최신 정보를 실시간으로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죠. 제 인지도가 쌓인 만큼 그쪽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 인지도 관련해서 오늘 새로 올라온 문의가 있습니다.”
과연, 최근 바쁘다고 하더니 갑자기 직접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신청서 부탁은 아니었네요.”
“아니, 그것도 좀 부탁드립니다. 저 중에서 한 명이라도 뽑아 주시면 제가 좀 편할 것 같아서요. 하하하.”
“어차피 인맥을 통해 뽑을 생각이었습니다. 저 많은 걸 어떻게 읽어요? 걱정 마시고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이드가 상쾌한 미소로 엄지를 세워 보였다.
“오늘도 사실 확인을 위한 문의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사실 확인이면 저에 대한?
“네. 소드 팰러스에 사실 확인할 게 뭐 있겠습니까. 마스터뿐이지요. 문제는 그 내용이 악질이란 겁니다. 이드 님의 출신에 대한 의심부터, 수업 내용에 대한 트집과 반대, 최후에는 이드 님이 마르텔 님을 이긴 사실이 거짓이라거나 비겁한 수단이 사용되었다는 내용까지. 이건 악질적인 소문이라기보다는 음해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만들었다는 말씀이군요?”
클라인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둘도 아니고, 이렇게 한 번에 터질 수가 없습니다.”
“혹 삼검왕 쪽 아닐까요?
에단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클라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마르텔, 그 양반 성격이 좀…………… 많이 지랄 같기는 해도 승패에 관해서는 깨끗해. 이런 쪽으로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에는 오히려 게일 쪽이 움직인 게 아닌가 하는데………….”
“게일이라면, 록이 지지하던 기사 말입니까?”
이드는 저 구석에 의미 없이 처박혀 있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록의 지지자보다는 검후님의 제자로 유명한 건데.’
게일에 대한 이드의 인식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렇습니다. 차기 소드 팰러스의 주인으로 젊은 기사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검후님의 유일한 제자로 여겨졌던 점이 컸습니다. 주변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고요.”
“결국 그 지지가 저 때문에 흔들린 모양이군요.”
이드가 짐작이 간다는 듯 말하자 에단이 재빨리 한마디 보탰다.
“록도 이쪽으로 옮겼죠. 이번에 이드 님에 대한 이야기도 주변에 퍼트리고.”
“지지도가 넘어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경쟁자가 생겼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드 님의 나타나기 전에는 그가 유일한 소드 팰러스 차기 주인이었으니까요. 초반에야 이드 님의 이름이 소문으로 돌다가 흐지부지되었지만, 지금은 저 방에 쌓인 신청서만큼 이름이 높아지셨으니까요.
그쪽에서도 화들짝 놀랐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검왕이라 불리는 것은 게일이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거든요.”
게일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괜히 검후의 눈에 들어 직접 수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실력에 한계는 분명 있었다.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감히 삼검왕의 이름에 견줄 만큼은 되지 못했다.
만약 그의 실력이 삼검왕에 근접해 있었다면 차기 소드 팰러스의 주인으로 확정을 받았을 것이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게일을 차기 소드 팰러스의 주인으로 밀고 있던 사람들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드로서는 뜬금없기가 마른하늘 날벼락 급인 일이었다. 난데없는 경쟁자 취급에 조직적 반대파의 등장이었으니 말이다.
소드 팰러스의 차기 주인 자리 따위 전혀 관심이 없는데 말이다.
‘이런 정치 쪽의 반대파는 하염없이 귀찮기만 한데. 그렇다고 차기 주인 자리에 관심이 없다고 말해 봤자 듣지 않겠지?’
믿어 주는 것은 둘째 문제고, 그렇게 말했다가는 도리어 차기 주인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는 말이 생겨날 것이다. 폴폴 연기를 피울 시점에 제대로 휘발유를 붓는 격이라고 할까?
솔직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드가 눈치를 보고 있던 클라인에게 말했다.
“무시해도 될까요?”
“영혼의 관과 정신의 관의 토벌만 없다면 그래도 되시겠지만…….”
“맞다, 그게 있었죠.”
이드가 혀를 찼다. 그 토벌에 편하게 참가하기 위해서 수련생을 받고 이름을 알렸는데, 이 추문을 그냥 두면 제국 차원의 토벌에서 제외될 수도 있었다. 제국으로서는 자신들의 체면을 손상시킬 사람을 같이 데려가기는 힘들 테니까.
“그럼 대응 방법은요? 해명을 해야 할까요?”
“그것도 방법이지만, 해명보다는 스캔들이 더 빨리 퍼질 겁니다. 사방에서 생겨나는 소문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스캔들은 빨리 퍼지지만 그 후 당사자의 해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은 법이다. 무엇보다 스캔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스캔들의 당사자를 대변할 입이 많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조직적으로 대응해야겠군요.”
이드의 말에 클라인은 눈을 번뜩이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이드 님의 지지 세력도 형체를 가지고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클라인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축였다.
“제 생각에는 게일을 지지하는 측과 전통적으로 삼검왕을 지지해 온 측, 그리고 새롭게 이드 님을 지지하는 측으로 해서 크게 셋으로 나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검후님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넷이 아닙니까?”
클라인은 에단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없지는 않을 테지만 적을 거야. 검후님이 곧 소드 팰러스고, 소드 팰러스의 영원한 주인은 검후님이네. 하지만 그분이 소드 팰러스를 직접 돌보시진 않아. 사람들은 이번 일을 검후님을 대신해서 소드 팰러스를 운영할 사람에 대한 선택으로 생각할 거야.”
“누구를 지지하건 검후님이 진정한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군요.”
“맞네. 검후님은 소드 팰러스의 주인 같은 어설픈 존재가 아니네. 그분은 전설이야. 그분이 곧 신화지. 소드 팰러스는 검후님을 위해 만들어진 화원일 뿐이야.”
검후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클라인은 오랜만에 검후에 대한 사랑의 피가 끓는지 그 후로도 한참동안 검후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았다.
잠시 후 클라인의 만물검후탄생론―세상의 모든 것은 검후를 위해 만들어졌다.ᅳ에 대한 강론이 끝나자 이드가 말했다.
“소드 팰러스가 나누어져도 괜찮습니까?”
“검후님만 돌아오시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색깔을 확실히 할 때지요.”
“그럼 이 일에 관해서는 클라인 백작님과…………….”
“록과 같이 하겠습니다. 게일을 지지하던 그라면 사람들을 모으는 데 경험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더해서 게일을 지지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을 빼올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록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맡겨 주십시오. 한눈에 구분되도록 확실하게 갈라놓겠습니다.”
“우와! 흉악한 흑막 같은 발언이네요.”
에단이 징그럽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하하, 그런가?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이 소드 팰러스 운영보다 재미있을 거 같아서 좋다네.”
재밌다고 공언한 만큼 클라인의 움직임은 빠른 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