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196화


633화

먼저 움직인 것은 쉴라였다.

검은 폭풍을 잠재우고도 여력이 남은 방패를 어깨에 걸치고 렉터의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의 공격에 렉터가 한 발을 빼고 몸을 낮춰 어깨를 내밀었다. 순식간에 그의 어깨를 감싼 갑옷이 두 배로 부풀고, 그는 그 상태로 쉴라의 방패 공격을 받아 냈다.

뿌아앙!

무기의 날카로움도, 기술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힘의 격돌에 방패가 바람에 날리는 깃발처럼 파르르 떨며 두 사람의 격돌로 생겨난 충격을 배출했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의 여파가 아니라 제삼의 파괴력이 되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검은 폭풍의 쇳가루에 약해져 있던 나무가 충격파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에, 때는 이때라는 듯 밀어내는 렉터의 힘이 강해졌고, 쉴라는 밀리지 않기 위해 렉터의 힘에 대항하면서 방패를 통해 배출되고 있는 충격파를 조정해서 위로 쏘아 보내 머리 위로 쓰러지던 나무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후후.”

지금까지 표정 하나 없던 렉터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마상창이 쉴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찌르기 위주의 마상창을 둔기처럼 사용하고 있었지만, 통나무만 한 창의 크기로 인해 오히려 그 모습이 올바른 사용법처럼 보였다. 거기에 단순히 크고 무겁기만 한 창이 아닌 듯 창에 닿은 나무 조각들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그냥 있어도 당하고, 뒤로 물러나도 휘두르던 창의 찌르기에 당한다. 하지만 쉴라를 상대로 한 공격치고는 너무 단순하다.

‘허, 우리 은색 기사단이 어지간히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쉴라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창을 무시하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살짝 공중에 던지고는 방패를 강하게 밀어 쳤다. 바위를 쪼갤 듯한 강력한 내기를 담은 발경에 방패와 렉터의 갑옷이 쩌렁하고 울었다. 하지만 정작 공격의 대상인 렉터는 머리카락만 날릴 뿐 전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다. 

“버텼다고?!’

쉴라는 내심 신음했다. 보통 이 수법에 당하면 뒤로 튕겨나 피를 토하는데, 이 곰 같은 적은 너무 멀쩡해 보였다. 과연 정말 아무렇지 않은지 다시 공격해 보고 싶었지만, 창이 한 치 앞으로 다가온 이상 그럴 여유는 없었다.

공중에 던진 검을 낚아챈 쉴라는 창을 짧게 끊어 치며 막아내는 한편, 보법을 밟아 렉터와의 힘 대결에서 벗어났다.

“저건!”

순간, 쉴라는 회전하는 렉터의 발이 검게 변한 땅과 일체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발은 원래 모양으로 돌아갔지만, 저 발을 통해서 자신의 공격을 버티고 충격을 땅으로 흘렸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구우우웅-

생각을 마친 순간, 쉴라를 향해 검은 창이 다시 대기를 부수며 날아들었다.

‘역시 힘으로는 힘든가. 그렇다면 검후님의 검법이라면 어떨까!’

쉴라는 방패로 창을 받아넘기며 꽃잎처럼 아른거리는 검기의 파편을 날렸다. 검후가 직접 전수한 난화십이식이었다. 무거운 창을 휘두른 다음 순간이라면 쉽게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큰 피해는 줄 수 없지만 한발 물러서게 만들 거라 자신했다.

결론적으로 그 생각은 틀렸다.

렉터는 공격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무시했다. 그는 오히려 검기 속으로 뛰어들며 창을 들었다. 동시에 검기가 그를 두드렸지만 그의 갑옷 앞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오히려 폭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창을 막아서던 쉴라의 충격이 컸다.

주르륵 뒤로 미끄러지던 그녀는 폭발 속에서 검은 투구를 쓰고 나타난 렉터의 모습에 놀라 소리쳤다.

“보통 갑옷이 아니구나!”

검기를 막다니! 마법 갑옷이 아닌 줄 알고 안심했는데, 오히려 마법 갑옷보다 더욱 특별한 갑옷인 것 같았다.

“내 초인기지.”

문득 기대하지 않던 대답이 들려오며 렉터의 전신에서 안개처럼 검은 쇳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쇳가루는 렉터의 주변을 떠돌다 허공으로 추켜세워진 마상창을 따라 모여들었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흥, 그건 나도 마찬가지!”

화르르륵!

쉴라의 검기가 불길처럼 타오르다 선명하게 번뜩이는 검강이 되었다. 그런 그녀 앞으로 검은 파도를 탄 렉터의 마상창이 찔러 왔다. 마상창의 힘은 본래 달리는 말 위에서 온전히 나오는 것!

마상창이 닿기 전 사막의 모래 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검은 쇳가루를 쉴라의 검이 갈랐다. ‘서걱’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게 물들었던 시야가 환해지며 그 사이로 들이밀어지는 창끝이 눈에 들어오자, 쉴라는 검극으로 창끝을 찔러 방향을 흐트러트린 후 자루를 타고 올라가며 붉은 불꽃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렉터 앞에 다다른 쉴라가 차갑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검후님을 따르며 창 기사들은 많이 상대해 보았지. 당신도 다르지 않다.”

“틀렸다. 난 초인이지 기사가 아니다.”

렉터의 말과 함께 그의 갑옷에서 솟아난 가시들이 쉴라의 검강을 막아 내며 쉴라를 찔렀다.

펑!

찰나의 순간 방패로 공격을 막아 낸 쉴라가 튕겨나가고, 그 모습을 보던 렉터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 가시가 솟아나지 않은 갑옷을 따라 구불구불 베어진 갑옷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 사이 뒤로 튕겨 나갔던 쉴라가 다시 허공을 가르며 검강을 뿌려 왔다. 그녀는 갈라진 갑옷을 보며, 시간은 걸리겠지만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기사도, 초인도 피를 흘리는 건 똑같다!”

하지만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이다! 그녀가 오래 렉터에게 붙잡혀 있을수록 기사들의 희생은 늘어난다.

그 마음이 반영되어 강렬하게 번뜩이는 검강이 검게 불타는 모양의 쇳가루에 둘러싸인 창과 부딪히며 폭발했다.

꽈르르릉!

움찔.

상대의 공격에 따라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휀은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폭발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폭발음이 왜 생겼는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쳇, 저쪽은 제대로 불이 붙어서 한창 신나는 모양이군. 어때? 너희들도 이제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방패는 던져 버리고 신나게 피를 흘려보는 것이!”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지!

휀은 멀찍이 서서 소리치는 스피드 스타의 도발에 이를 갈았다.

지금 은색 기사단에 가장 위협적인 적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서 창을 찌르거나 초인기를 날릴 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스피드 스타가 나타나기 전, 방패에 붙어서 공격하던 적들이 방패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찔려 십수 명이 죽고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두 번 더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도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귀신같이 빈틈을 잡아내는 휀의 지휘에 번번이 당해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적들은 다가오지 않고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덕분에 압도적인 열세에도 기사들이 버틸 수 있었다.

스피드 스타가 나타난 것이 그때였다. 그는 검에 찔려 신음하는 부하들에게 욕을 한바탕 쏟아 내고는 바람의 칼날을 쏟아 냈다.

바닥을 기는 듯한 공격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검은 뱀처럼 징그럽기도 했다. 더구나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는 공격 탓에 힘을 모아 방어할 타이밍을 잡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리를 다쳐 연속해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가장 먼저 그를 공격해서 부상을 입힌 쉴라의 판단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 또다시 숲 속에서 폭음과 함께 새로운 공터가 만들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숲 속에서의 전투가 점점 격렬해지고 있는 듯했다.

반면, 스피드 스타는 참을 수 없는 짜증에 폭발할 것 같았다.

근육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쉴라의 내공이 침투해 버렸다. 차라리 베였다면 포션으로 치료해 버리면 간단할 텐데, 근골에 침투한 내공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마음껏 달릴 수 없어 짜증이 났고, 방패 뒤에 꼭꼭 숨은 적들을 유린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싫었다.

무엇보다 가장 맛있는 사냥감을 렉터에게 온전히 넘겨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년들이라도 빨리 죽여 버리면 내 보물 같은 다리에 칼질한 년의 사지에 구멍을 만들어 줄 기회가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에는 기사들의 방어가 너무 단단했다. 또 그들을 공격하는 부하들이 너무 약했다.

“등신 같은 새끼들!”

스피드 스타의 눈이 번들거리며 부하들을 향했다.

애초에 그들이 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순수한 초인기만으로는 충분한 위력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몇 번 칼에 찔린 게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등신같이 초인기만 날리는 꼴이라니!

발을 까딱거리며 참고 있던 스피드 스타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런 젠장!”

그는 초인기 투사도 불가능해서 가장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부하 둘의 목을 과감히 잘라 버리고 소리쳤다.

“겁쟁이 새끼들, 똑바로 못하지! 지금 우리가 놀러온 거 같아? 그 등신 같은 초인기로 언제 잡을 건데! 지금부터 바짝 붙어서 제대로 칼질하란 말이야. 맡은 일도 제대로 못 하고 뒤에 얼쩡거리는 놈은 기사년이 아니라 내가 목을 날려 준다.”

“뭐해, 이 새끼들아! 지금 당장 잘라 줘?”

순간 질린 얼굴로 목이 잘린 동료를 바라보던 부하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제엔장!”

“밀어붙여! 밀어붙이라고!”

“이래서 저 미친놈하고 같이 작전 나가기 싫었다고!”

이를 지켜보던 휀이 고개를 저었다.

“미쳤군.”

너무도 가볍게 부하의 목을 자르는 잔학성에 솜털이 곤두섰다. 지휘관이 죄의 경중에 따라 부하의 목을 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 큰 죄가 아닌 이상 직접 나서는 일은 적다.

여차하면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지휘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라면 절대 저런 짓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매 같은 부하 기사들을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벤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의 가치관이 어떠하든 당장의 효과는 확실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불신도 사기도 모두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당장 죽음의 공포에 쫓긴 자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기사들의 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기세에 휀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소리쳤다.

“전 기사 2보 후퇴 후 12번 방어 태세! 모두 검을 들어라!”

“후, 하!”

기사들은 방어 진형을 줄이고 방패를 2층으로 쌓았다.

진형을 바꾼 직후, 방패 위로 적들의 무기가 죽기 살기로 떨어져 내렸다. 죽지 않기 위해서 휘두르는 무기에는 전과 다른 힘이 실려 있었다. 방패가 휘청이는 순간 휀의 목소리가 일갈했다.

“방패 교차! 2─3번. 찔러라!”

2-3번. 방패의 오른쪽 아래를 뜻하는 암호다.

다음 순간, 모든 방패 뒤에서 튀어나온 검이 적을 찔렀다.

“케헥!”

“끄아악! 다리! 다리가악!”

순간 비명과 함께 십수 명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개중에는 운이 없어 즉사한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관통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한 때문이다.

“거봐! 다 죽는 건 아니잖아! 다시 밀어붙여!”

‘망할 놈! 죽은 사람 앞에서 그게 할 소리야?”

부하들은 속으로 오만 욕을 하면서도 다시 달려들었다. 확실히 모두 죽는 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인지, 아니면 최대한 빨리 끝내자는 생각인지 부하들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졌다.

개중에는 오히려 적당히 검에 찔려 뒤로 빠지기 위해서 방금 검이 나왔던 곳에서 알짱거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결말은 좋지 않았다. 

“방패 교차! 14번. 찔러라!”

“끄억・・ 왜 좀 전과… 다른 곳을….”

앞서와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오는 검에 심장을 찔리고 만 것이다. 다시 뒤로 밀려 나오는 시신들과 부상자들을 보며 스피드 스타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잘난 계집일수록 가시가 많고 독하다니까!”

아무리 독해도 부하를 직접 죽인 그보다 독할까.

하나둘, 쓰러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피 냄새가 진해질 때쯤 가만히 서 있던 스피드 스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적이 밀어 대는 공격을 막아 내며 기사들의 힘이 빠진 자리를 휀이 급하게 메꾸다 보니 자연 틈이 생겼고, 그것이 그에게 보인 것이다.

바로 그가 노리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스피드 스타는 좀 더 확실히 휀을 노리기 위해서 부하들 사이로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바닥을 기는 검은 뱀에 부하들의 발목이 잘리는 경우도 생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차례의 시도 끝에 드디어 중앙에서 기사들을 움직이던 휀이 원하던 방향으로 움직이자 스피드 스타가 입술을 핥았다.

휀은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적이 전력으로 공격하는 지금, 진형을 유지하고 기사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많이 움직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적의 공격에 밀려 진형이 일그러지는 곳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향하며 밖의 적들을 몰아내기 위해 검을 들었다. 중앙에서 자유로운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앞에선 기사의 어깨를 밟고 서서 방패를 치는 세 명의 목을 자른 순간!

후우웅!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과 함께 그녀의 앞으로 눈 아래 기묘한 날개 같은 검은 문신을 한 스피드 스타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흡!”

스피드 스타는 놀라 숨을 멈추는 휀의 모습에 가슴에 쌓인 짜증이 가시는지 한쪽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간 웃는 얼굴로 허공에 키스하고는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손을 내밀었다.

“쪽! 가시 많은 기사님, 잘 가!”

휀은 적을 베며 밖으로 향한 검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적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뱀과 같은 검은 기운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부릅뜬 두 눈을 돌리지 않고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전 기사 100번 방어 태세. 쉴라 님이 오실 때까지 무조건 버텨라!”

동시에 마지막까지 놓지 않은 검을 적에게 돌렸다.

그 사이 휀의 코앞에 다다른 검은 기운이 대가리를 들고 그녀의 이마로 파고들 때였다.

휘이이잉-

수백 마리 벌 떼의 날갯짓 소리를 내며 나타난 희뿌연 그림자가 검은 기운의 머리를 자르고 지나가 버렸다.

“하아!”

그 순간 휀의 입에서 수많은 의미를 담은 숨이 터져 나왔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