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97화
634화
위기 뒤의 기회라고 했다. 물론 그것을 알아채고 잡아낼 능력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휀에게는 충분히 기회를 잡아낼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미련처럼 적을 향해 휘두른 검에 힘을 더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빠른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고, 보기 좋게 스피드 스타의 복부를 베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년이!”
다리에 부상을 입은 스피드 스타는 휀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제법 깊은 검상을 지고 물러났다. 부상 때문에 그가 자랑하는 속도는 일회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얕았나.”
스피드 스타가 배를 감싸고 물러나자 휀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제대로 검기를 발출했다면 허리가 동강이 났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연기하기는 했지만, 그녀 깊숙이 묻어 둔 진심은 그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죽음 앞에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 버린 탓이리라.
그래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리에 이어 복부에도 부상이 생긴 만큼, 스피드 스타가 다시 공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살아남는다면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담금질해야겠다.’
스스로 다짐을 남긴 휀이 바짝 긴장한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전 기사 15번 방어 태세로 변경 후 12번 방어 태세! 우리는 살아 있다.”
“후, 하!”
기사들이 기뻐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100번 방어 태세는 지휘관의 죽음을 뜻했다. 그래서 휀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분노하는 중에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런 중에 훤의 목소리와 명령이 다시 들려오자 흔들리던 기사들이 빠르게 안정을 찾은 것이다.
‘역시 날 구해 주신 건 단장님인가.
검은 뱀의 대가리를 자르고 땅에 박힌 쉴라의 은빛 방패를 확인한 휀은 감격하는 한편 걱정이 되었다. 쉴라에게 방패는 검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혹시 그녀가 방패를 잃고 강적에게 밀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꽈꽝-
때마침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폭발음이 숲속에서 터졌다. 휀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달랬다. 적과 싸우는 것은 쉴라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쉴라가 없는 지금, 그녀의 가장 큰 임무는 한 명의 기사라도 더 무사히 살리는 것이다. 휀은 쉴라의 무사 복귀를 빌며 크게 소리쳤다.
“방패 회전! 43. 찔러라!”
“끄악!”
“다행이군. 늦지 않았어.”
휀을 덮치던 적이 물러나는 모습을 확인한 쉴라는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때마침 기사들이 싸우는 전장이 보이는 곳까지 나오지 않았다면 아끼는 기사를 잃을 뻔했다.
뿐만 아니다. 휀이 죽었다면 그녀를 믿고 적과 맞서는 기사들이 급격히 흔들릴 테고,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쉴라는 휀을 살림으로써 열아홉 명의 평기사들을 살린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을 살린 대가는 컸다. 어느새 그녀를 포위하듯 검은 쇳가루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군. 나와의 싸움을 잊은 건가? 네가 잡히면 어차피 남은 기사들도 당연히 죽을 텐데.”
“그건 날 잡을 능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이 어떤가. 네 목숨은 이미 내 손에 있는 것과 같다.”
렉터의 말처럼 그녀를 포위한 쇳가루가 전후좌우는 물론, 머리 위에서까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멍청하군. 너와 나의 실력 차를 아직 모르는가?”
“내 초인기에 묶인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두고 보지.”
실력을 논하는 쉴라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렉터가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로 쇳가루를 조종하자,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떠돌던 쇳가루가 자석에 들러붙듯 쉴라를 향해 모여들었다.
솨아아아-
쉴라는 방패를 던지고 비어 있던 손에 망토를 들고 내력을 투입했다. 그리고 한순간 빳빳해진 망토가 늘어지자 망토를 크게 휘돌려 전방으로 털어 냈다.
뻥!
공기가 터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쇳가루가 돌풍에 휩쓸린 모래처럼 터져 버렸다. 쉴라는 휑하니 뚫린 전방으로 뛰쳐나가며 길게 늘어진 망토를 팔에 감았다.
‘설마 재미로 배워 두었던 수건 털기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돌아가면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겠군.’
이드의 저택을 찾은 어느 날, 열심히 젖은 수건을 털고 있는 에단의 모습이 재미있어 배웠던 방법을 지금 같은 위급 상황에 써먹게 될 줄은 쉴라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번뜩이는 영감에 무의식중에 사용한 수건 털기가 이렇게 뛰어난 수법인지도 지금에서야 알았다.
“이렇게 좋은 수법인지 알았다면 좀 더 연습을 해 뒀을 텐데.’
쉴라는 내심 수건 털기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의 안목을 탓하면서 렉터를 향해 수건 털기의 수법으로 망토 끝자락을 던졌다. 과연 기사가 사용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공격 방법에 렉터는 무방비로 당하고 말았다.
떠엉!
망토 끝에 실린 무거운 경력이 갑옷을 타고 렉터의 내부를 두드렸다. 수건 털기에 숨겨진 침투경의 원리 때문이었다. 수건 털기가 간단해 보이면서도 쉽게 되지 않는 이유였다.
쉴라는 답답한 기침 소리와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렉터를 보고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얻은 얼굴로 망토를 다시 팔에 감았다.
“어떤가. 이제 너와 나의 실력 차이가 확실하게 보이나?”
철컥!
렉터는 시계태엽처럼 기괴하게 꼬이기 시작하는 창을 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콰과과곽-
쉴라는 찔러 오는 창을 검으로 막아내며 말없이 망토를 쏘아 냈다. 방패를 버리고 뜻밖의 무기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망토 다루는 솜씨는 짧은 시간 동안 비약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렉터는 어느 시점부터 망토가 아니라 용 한 마리가 쉴라의 손에 잡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부하들과 그녀의 목숨이 걸린 위기가 그녀의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듯했다.
수개월째 수건을 털고 있는 에단을 한순간에 쉴라가 추월하는 순간이었다.
쇳가루와 거창을 사용하는 렉터에게 망토는 아주 좋은 무기였다. 쇳가루는 망토로 털어 버리고, 거창은 망토로 감아서 짧은 순간 봉인시킬 수가 있었다.
힘과 방어력에서 밀려 두 걸음 전진하고 한 걸음 후퇴하던 쉴라가 연신 렉터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선전을 보고 있었다는 듯 하늘의 황금 장막이 빛나더니 또다시 수십 명의 적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떨어져 내린 자들은 미리 명령을 받은 듯 일제히 평기사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자들까지 합류하면 기사들이 버티지 못한다.’
한참 렉터를 몰아붙이던 쉴라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는 기사단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곧이어 눈앞을 가로막는 불길과 온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에 주춤하고 말았다.
“나를 잡는 건 본인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막 명령이 바뀌었다.”
돌아선 쉴라의 눈에 렉터와 떨어진 양옆으로 새롭게 나타난 인물들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기사단을 향해 달려간 자들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과연 그들이 렉터와 힘을 합친다면 쉴라가 기사단을 걱정할 겨를은 없을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은 틀리지 않듯이 새롭게 나타난 자들은 각자가 가진 초인기로 쉴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또 초인의 서포트를 받은 렉터의 쇳가루도 달아올라 붉게 변하면서 확연히 다른 파괴력을 보였다. 앞서와 같이 쇳가루를 털어 낼 때마다 망토가 조금씩 타들어 갔다.
거기다 조력자들도 여럿이 더해져 버렸다. 렉터와 쉴라의 실력 차가 분명하긴 하지만, 이 정도 힘이 더해지면 쉴라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당장 기사들과 합류하는 길도 막혀 버린 쉴라는 쉴 틈 없이 뒤로 밀렸다. 공격은 포기하고 방어에 전념했다. 그런데도 부상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 속에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심정으로 일격필살을 노리다 당한 부상도 있었지만, 부상에 비해 생각만큼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녀의 검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죽고 싶지 않으면 섣불리 다가가지 마!”
“근접전은 렉터에게 맡기고 철저하게 팔다리만 노려!”
오히려 그녀에게 반격의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저들의 경계심을 키워 공격만 거세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쉴라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애초 렉터가 공언했던 것처럼 적들이 쉴라를 생포하겠다는 목표로 치명적인 공격을 피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오색 기사단 중에서도 뛰어난 자들이 속한 은색 기사단의 단장인 그녀에게, 적이 손속에 사정을 두고 있는 형편에 기대야 하는 상황은 그 자체가 모욕이고 수치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런 수치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자신 이상으로 지독한 상황에 빠져 있을 기사들이었다.
‘아직 아직인가!”
쉴라는 내심 시간을 헤아렸다. 원래 준비했던 대로라면 지금쯤에는 구원자가 왔어야 했다. 혹시 텔레포트 키가 막힌 것처럼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불리한 상황이 계속되자 예리하던 쉴라의 정신도 한순간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그것도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흔들림이 만들어 낸 찰나의 틈은 의외로 컸다.
교차하는 공격의 시차에 숨은 공격이 쉴라의 팔을 못 쓰게 만들었다.
“크으윽!”
기사의 자존심으로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검을 쓰는 것은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 정도의 기사라면 검이 없어도 충분히 강하다. 적들은 그녀를 향해 공격을 멈추지 않고, 압박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뛰어든 렉터가 검은 안개를 뭉친 모양으로 변한 창을 내밀자, 쇳가루가 그물처럼 펼쳐지며 그녀를 덮쳤다.
쉴라는 덜덜 떨리는 팔로 검을 들어 올리며 렉터를 노려보았다.
“아직, 아직 오지 않았는가!”
“지금 도착했어요.”
기사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가득한 쉴라의 노성에 그녀가 그렇게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넘어 나타난 하얀 손이 신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쿠르르릉!
다음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쇳가루가 한순간에 흩어지고, 그 뒤에 있던 렉터의 갑옷에 커다란 손자국이 나며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이어 손의 주인인 이드가 그녀 앞을 막아서며 나타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쉴라 경. 밖에서 숲에 수작을 부리는 자들이 있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적기에 도착하셨습니다. 단번에 반해 버릴 정도로.”
“일단 이걸로 응급조치를 하세요. 저들은 제가 맡을 테니까요.”
만신창이 상태에서도 농담으로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드는 내심 감탄하며 포션을 건네주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사들에게도!”
“그쪽은 지금 가장 마음을 졸이고 있는 기사들이 갔으니까 걱정 말아요.”
대답과 동시에 다시 날아간 이드의 손에 렉터가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역시 공격 방법이 틀렸던 건가.”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흉하게 바닥을 뒹구는 렉터의 모습에, 쉴라는 좁아졌던 시야가 트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태연하게 검기를 막아 내는 갑옷의 존재가 그녀의 판단력을 흐트러뜨린 듯했다. 지금 보니 렉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보다는 면. 베고 찌르는 검이 아닌, 때리고 부수는 방패에 의한 면의 공격이 더 적합해 보였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방패를 사용하거나 좀 더 일찍 망토를 활용했다면 쉽게 렉터를 정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쉴라는 이드가 빠르게 적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포션의 뚜껑을 따고 절반을 마신 뒤, 남은 절반을 상처에 부었다. 그리고 흉하게 벌어진 상처가 잘 붙을 수 있도록 갈라진 살을 움켜쥐었다. 잠시 머리털이 삐쭉 설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곧 효과를 발휘한 포션에 의해 통증은 차츰 가시고 저릿저릿하던 근육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도 그냥 구경만 하면 은색 기사단장의 이름이 울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 쉴라가 검을 힘차게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우선 첫 목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새로 나타난 적들 중 하나!
“네놈이 날 불로 공격했지? 과연 일대일로 붙어도 날 상대할 수 있을지 보자!”
쩌렁!
“크억! 기사단장이 부활했다!”
“헛, 쌓인게 많으셨나 보네.”
이드는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쉴라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번쩍이는 은빛 갑옷에서 그 빛을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이놈, 감히 한눈을 팔다니!”
그 순간, 쉴라와 마찬가지로 전투에서 시선을 돌린 이드를 노리고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지만, 이드는 태연히 그 공격을 가르고 들어가 가장 가까운 자의 심장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커억!”
“조심해. 난 지친 쉴라 경과 달라서 네놈들 정도는 눈을 감고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진짜 눈을 감지는 않을 거야. 네놈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거든.”
스르릉.
이드의 말과 함께 그의 허리에서 일라이져가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