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98화
635화
단호하게 손을 쓸 생각을 굳힌 이드는 일라이져에 수라강기를 끌어 올려 수라섬광단의 초식을 펼쳤다. 물기가 마른 붓이 종이에 그어지듯, 검이 지나간 허공을 가득 메울 것처럼 붉은 강사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 강사들은 아름답게 빛나더니 곧 온 하늘을 뒤덮으며 퍼져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이드의 실력에 놀라 경계하던 초인들은 입을 딱 벌린 채 강기의 그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미, 미친! 저, 저게 뭐야!”
“검강! 검왕급 언터처블이다! 물러나!”
조직 내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덕분에, 쉴라를 잡는 작전에 투입된 자들은 삼류 초인들처럼 검강이 뭔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쓸 만하다고 인정받으며 교육받은 덕분에 지금같이 강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보내 준다고!”
그러나 그들을 그냥 놓아 줄 생각이 없는 이드의 뜻에 따라 그물처럼 꼬인 강사가 가장 먼저 도망치는 자들을 베었다.
“끄아악!”
“날카로운 성벽! 도, 도대체 우리 작전에 저런 괴물이 왜………… 커억!”
개중에는 검강을 막아 보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제 고작 평기사급 실력을 넘어선 초인기로 이드의 검강을 막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법 한 초식에 쉴라를 공격하던 초인 절반이 죽어 버렸다. 그 모습에 남은 초인들이 더욱 살기 위해 발악을 했지만, 그들을 반긴 것은 검은 꼬리를 남기며 날아드는 철황유성탄의 권강이었다.
“마, 막아!”
‘막으란다고 막을 능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도망가지도 않았겠지!’
‘꽝’ 하고 권강에 땅이 뒤집어지고 상처 입은 초인들이 바닥을 굴렀다. 한두 번만 더 힘을 쓰면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이드는 기사단이 달려간 공터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기사단 쪽은 무사하려나?’
쉴라가 숲에서의 잠복을 결단했을 때 클라인은 라미아의 도움을 받아 몇 가지 안전장치를 구상했다. 그 첫째가 제삼의 위치에 은신한 기사였고, 둘째가 긴급 신호를 알리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둘 다 철저히 막히면서 실패했다.
하지만 두 번째 준비까지 막힐 경우에 대비해서 클라인과 라미아들도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었다. 긴급 신호를 보내는 것을 역으로 사용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신호를 보내는 아티팩트를 공터에 묻어 둔 것이다. 긴급 신호가 막히는 경우, 묻어 둔 아티팩트의 신호도 끊어질 테고, 그것은 곧 숲에 이상이 있음을 반증하는 묵언(默言)의 신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쉴라가 직접 숲으로 행차한 당일, 그 묵언의 신호가 떠 버렸다. 정작 기사단을 이끌고 작전을 지휘해야 할 기사단장이 위험에 처한 것이다.
기사들은 놀라긴 했지만 동요하지는 않았다. 쉴라가 없더라도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가 없는 만큼 더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할 마음을 다졌다. 상급 기사 중에서도 수석인 스폴과 나머지 상급 기사들이 평기사들을 이끌었다.
이들의 준비가 끝날 때쯤 이드가 일행들과 함께 나타났다. 대규모의 인원이 한 번에 이동하려면 마법진으로는 불가능했다. 라미아가 직접 마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숲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 둔 대응 마법진을 통해 이동한 기사들은 즉시 둘로 나뉘었다. 아티팩트의 신호를 차단하는 요소가 숲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일리나와 라미아가 스무 명의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숲 속에 발을 들인 후, 다시 이드가 기사들과 갈라졌다. 쉴라의 기감만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감지한 이드가 쉴라의 지원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평기사 백육십 명과 수석 기사와 상급 기사가 전투가 한창인 전장에 난입했다. 광장에 오기 전, 피 흘리고 죽어 있는 동료 기사들의 주검을 목격한 은색 기사단은 노여움과 전투 의지로 머리가 가득 찬 상태였다.
“…!”
검에 찔려 뒤로 물러나 있던 초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경고성보다 한 발 빠르게 스폴의 고함 소리가 전장을 가로질렀다.
“전 기사단 돌격 대형! 최대한 잔인하게 적을 처단하고 동료를 구하라! 전원 돌격!”
“아아아!”
돌격 진형을 다섯 개의 쐐기 형태로 나눈 기사들이 함성과 함께 뛰쳐나갔다.
초인들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성난 파도처럼 기사들이 그들을 덮쳤다. 은색 기사단보다 유일하게 우위를 점한 요소인 숫자에서 밀리며 초인들은 그야말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적진 한가운데서 분전하던 휀과 기사들은 동료들의 등장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힘을 냈다.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그들은 아군의 등장에도 꿈적하지 않고 진형을 지켰다.
섣불리 합류하려고 하다가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힘이 다해서 쓰러지기 직전인 그들은 이 전장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빌어먹을!”
포션으로 응급조치를 마치고 초인들을 닦달하고 있던 스피드 스타는 기사들에게 썰려 나가는 초인들을 보며 이번 일이 완벽하게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사냥이지, 목숨을 건 전투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길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전투 따위!
“등신 같은 놈. 몸이 무거우면 머리라도 잘 굴리든가, 둘 다 무거우니까 결국 이 꼴이 나는 거라고!”
자신을 향해서 초인기를 날리던 렉터의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리며 욕설을 띄워 보낸 스피드 스타는 전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등을 돌렸다. 쿠르릉!
“크어억!”
그와 동시에 들려온 폭음에 놀라 돌아본 그의 눈에,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초인들이 돌멩이처럼 떼굴떼굴 굴러 나오고 있었다. 그중 한두 명은 비틀거리며 일어났지만, 대부분의 초인들은 바닥에서 꿈틀대기만 했다.
은색 기사단에 밀려 물러나던 초인들이 그들을 알아봤지만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진형을 짜고 있는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그들을 도울 수 없기도 했지만, 자신들보다 더 실력이 좋은 그들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 새로운 상대가 자신들이 상대하는 기사들 이상으로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대신 초인들은 힘들 때 부모를 찾는 아이들처럼 이번 임무를 책임진 최고 실력자를 찾았다.
“렉터 님, 렉터 님은 어디 계신 거야!”
마침 초인들을 공터로 날려 보냈던 이드가 그 말을 듣고 친절하게 답했다.
“아, 그 덩치? 알고 봤더니 쉴라 경이 미리 예약한 놈이더라고. 실례했지 뭐야. 허락도 없이 절반쯤 죽여놔서 미안했는데, 오히려 고맙다고 받아 주시더라고. 참 좋으신 분이야.”
‘저게 무슨 개소리야!”
뜬금없는 말에 바짝 긴장해 있던 초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때마침 이드의 등 뒤로 폭음과 기합이 터져 나왔다.
“죽어!”
떠렁!
“뭐, 좀 과격할 때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야.”
가볍게 웃는 이드의 미소에 초인들은 부르르 떨었다. 이드의 말과 날카로운 기합에서 그들이 매달리려던 렉터에게도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기세는 완전히 밀렸고, 지휘관은 위기다.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요소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한 가지!
“도망쳐!”
“말의 주력!”
말없이 몸을 돌린 초인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황금 장막 아래로 도망쳤다. 당장 은색 기사와 검을 마주하고 있어서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후퇴했다.
“전원 산개! 도망자들을 쫓아라!”
상대의 변화에 스폴이 즉각 반응했다.
“동료들의 원수다. 하나도 놓치지 마라!”
그녀는 자매같이 아끼는 기사들을 죽인 자들을 결코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슬쩍 쓰러진 척하다가 도망자들 틈에 끼어들려는 초인들을 붙잡았다. 몸이 성하지 못한데도 생각지 못한 초인기로 몸을 빼려고 하는 통에 온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초인의 초인기는 파괴력보다는 생각도 못한 기기묘묘한 수법들이 더 위험한 것 같단 말이야.’
“크악! 이 개자식아, 차라리 죽여!”
겨우 일어났다가 다시 바닥에 구른 초인 하나가 피를 뿜으며 소리쳤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마 한가운데 좁쌀만 한 구멍이 생기자 눈을 까뒤집고
죽어 버렸다. 그도 죽이라며 악을 쓰긴 했지만 정말 죽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 같았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굳은 얼굴을 보면 확실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네 초인기가 가장 잡아 두기 애매하거든.”
물처럼 땅속으로 스며드는 통에 그가 스며든 땅을 뒤집는 일이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또! 죽고 싶은 놈? 친절히 죽여 주지.”
남은 자들은 고개를 숙여 이드의 눈을 피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럼 잠시 눈 감고 있어라.”
이드는 지력을 뻗어 그들의 혼혈과 마혈을 동시에 제압했다. 굳이 살려 줄 생각도 없지만, 반항하지 못하는 적을 굳이 죽일 생각도 없었다. 이드는 기사들 몇 명을 따로 불러 기절한 자들을 맡기고 초인들이 도망치는 곳에 있는 황금 장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터로 나오면서 눈이 마주친 초인을 떠올렸다. 쭉 찢어진 눈을 한 남자에게서 지금 기절시킨 초인들과 비슷한 크기의 힘을 느꼈다. 쉴라를 공격한 자들 중에서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였다.
또 모종의 계획에 따라서 일부러 살려 준 생존자이기도 했다.
“저 정도 실력자라면 적당하겠지.”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영향력 있는 자로 보이는 쉴라의 상대를 쓰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쉴라가 내어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드!]
이드는 머리를 치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
[숲에 결계를 만든 초인이 공간이동 능력을 가진 초인과 같이 있어서 놓쳤어요.]
아무래도 자신들을 정확히 찾아내고 공격해 온 시점에서 깔끔하게 철수를 결정한 모양이다.
“쫓아갈 수 있겠어?”
[그거 때문에 불렀어요. 미약한 공간의 잔류가 이드가 있는 쪽으로 흘렀어요.]
이드는 문득 스치는 예감에 초인들이 달려들고 있는 황금 장막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황금 장막에 파문이 일더니 그 아래로 두 남녀가 나타났다.
“어, 지금 막 나타난 것 같은데, 남녀 한 명씩.”
[맞아요!]
“그런데 잡기는 힘들 것 같아. 지금 막 황금 장막 안으로 사라졌거든.”
이드는 이야기 도중 그들이 다시 황금 장막 안으로 사라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아쉽네요. 결계나 공간 이동 종류의 초인기는 드문데요. 이번 일에 나선 자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일 수도 있어요.]
바이트 타블렛을 조사하며 비올라에게 들었던 정보였다.
“별수 없지, 뭐. 대신 피라미라도 좀 더 잡아야지.”
이드는 메뚜기처럼 황금 장막을 향해 뛰어오르는 초인들을 보며 뛰쳐나갔다. 단숨에 기사들을 따라잡은 이드가 스치는 나뭇가지의 나뭇잎을 훔쳐 허공으로 뿌렸고, 내공을 머금는 순간 식물에서 암기로 직업을 바꾼 나뭇잎들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초인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피를 봤다. 단번에 수십 명의 초인이 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연히 그들을 신경 써서 받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슈슈슉!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여섯 곳에서 검기와 검강이 솟아오르고, 드물게 화살을 들고 있는 기사들은 화살을 날려 황금 장막으로 사라지는 초인들을 떨어트렸다.
흥분한 기사들 중에는 초인들을 따라 나무를 오르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스폴에 의해서 곧 제지되었다.
황금 장막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진입할 수는 없었다. 아니,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조건이 있어야 이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이 있는 만큼, 허락받지 않은 자가 진입할 경우 해를 끼치는 마법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초인들이 황금 장막 안으로 도망갔다고 생각될 때였다.
부웅-
이드는 기묘한 대기의 떨림과 함께 황금 장막의 세 꼭짓점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동시에 그 아래서 몇 남지 않은 초인을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황금 장막을 통해 무슨 수를 쓴다면?’
아마 그 아래 있는 기사들은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황금 장막을 깰 생각으로 내력을 운용하려던 이드는 곧 생각을 바꾸고 소리쳤다.
“황금 장막이 이상합니다. 은색 기사단은 모두 황금 장막 밖으로 후퇴하시오!”
내공을 담은 목소리가 구석구석 펴졌다. 이드에 대한 은색 기사단의 신뢰도가 높은 만큼 기사들은 즉시 황금 장막 밖으로 몸을 피했다. 그 순간 높디높은 산꼭대기에나 불 것 같은 바람 소리가 들리며 황금 장막이 떨어져 내렸다.
황금 장막의 범위 안에 있던 나무들이 내려앉는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장막이 바닥에 닿는 순간 퍽 하는 느낌과 함께 검은 숲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빛이 사라지며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다.
잠시 후, 어둠이 사라진 곳에 다시 은은한 달빛이 제 힘을 찾자, 황금 장막이 내려앉은 땅이 한 뼘 가량 파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숲 속에 또 하나의 거대한 공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