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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99화


636화

빛이 사라진 숲에 기묘한 침묵이 내렸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가 끝나고, 무대의 막이 내린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멀리서 쉴라와 렉터가 싸우는 소리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초인들의 신음 소리가 빈자리를 채웠다.

“살벌할 정도로 깔끔하네.”

황금 장막에 깎여 나간 자리를 살핀 이드는 흙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무의 뿌리와 일부 작은 돌도 매끈한 단면을 보이며 잘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일종의 공간 절단인가? 만약 그대로 황금 장막 아래 있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드는 황금 장막의 영역을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이의 몸 절반이 사라지는 상상을 하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편으로는 황금 장막 아래 있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었을 수도 있지만, 황금 장막을 통해 도망가던 모습을 생각하면 황금 장막을 통해 안전하게 도망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드 님?”

“스폴 경.”

황금 장막이 사라지고, 사건은 끝났지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있던 스폴이 다가왔다.

“혹시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땅을 보고 계십니다만?”

“아니에요. 그냥 황금 장막이 사라진 자리를 살핀 것뿐입니다. 이상한 건 없어요.”

“그럼 더 이상의 특이 사항은 없겠군요.”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그럼 현장을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쉴라 단장님과 스폴 경이 결정할 일이지만 제 생각에는 그래도 될 것 같습니다. 대신 이 일대는 부상자들만 따로 옮기고, 그대로 보존해 주세요. 에단이 좀 살펴봐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활약은 감명 깊었습니다.”

“은색 기사단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스폴이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말하자 이드가 그 모습을 따라하며 말했다. 스폴은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보이고는 바로 돌아서서 크게 소리쳤다. 

“더 이상 적의 증원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도망치지 못한 초인들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여 지금부터 임무를 다시 부여한다!”

이드는 스폴이 지시하는 모습을 보며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라미아를 불렀다.

“라미아. 여기 상황은 끝났어.”

[알아요. 여기서도 황금 장막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어요. 바로 그쪽으로 갈게요.]

이드는 머릿속에 점점 선명해지는 라미아의 모습에 공간을 넘어 날아오려는 그녀를 말리고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중간에 숨어 있는 에단과 비올라를 찾아서 같이 와.”

[알았어요.]

“부탁해~”

이야기를 마친 이드는 황금 장막이 먹어 버린 주변을 천천히 따라 걸으며 살폈다. 그중 특이한 것은 황금 장막을 이고 있던 세 그루 나무였다. 키가 큰 만큼 덩치도 컸던 나무는, 꼭대기부터 밑동까지 몸체의 삼분의 일 정도가 황금 장막의 꼭짓점에 먹혀 나무의 테두리 중앙부까지 손실되어 있었다. 이렇게 상처가 크면 아무리 생명력 강한 나무라도 견딜 수 없다.

“좋은 나무 같은데. 아깝다.”

그 사이 기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스폴의 지시에 따라 각각 부상자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초인들을 모았고, 다른 쪽에서는 혹시 있을지 모를 도망자를 찾아 숲을 수색했다.

그리고 나머지 상급 기사들은 모두 쉴라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녀가 도움을 받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때쯤 이드가 기다리던 이들이 나타났다.

라미아는 대번에 이드의 어깨에 내려앉아 부리를 비볐다. 이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가까이 다가온 일리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고생했어요. 어디 다친 데 없죠?”

“네. 같이 가신 기사분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었어요.”

[아니에요. 실제로 제압한 건 일라나고, 기사들은 그 애송이들을 끌고 오고 있어요.]

라미아가 나서서 일리나의 공을 자랑했다.

“애송이?”

[딱 봐도 도망간 놈들 시중이나 들던 애송이들이에요. 실력도 실력이지만, 잡히고 나서 무서워서 덜덜 떨던 애송이던데요? 눈물도 찔끔거리고.]

그렇다면 그녀의 말대로 실로 훌륭한 애송이가 맞다.

[그런데 여기 땅은 왜 이래요?]

“황금 장막이 떨어진 자리거든. 특히 저 세 그루의 나무가 황금 장막이 걸려 있던 나무고. 에단을 데려오라고 한 것도 혹시 뭔가 있을까 해서

살펴보게 하려고 그런 거야.”

“맡겨 주십시오, 마스터.”

“라미아도 같이 좀 부탁할게.”

[알았어요.]

이드의 말에 라미아와 에단이 즉시 움직였다. 라미아는 황금 장막이 펼쳐졌던 현장 일대를 살폈고, 에단은 이드가 지목했던 세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살폈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가장 뒤에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비올라에게 다가갔다.

“부탁한 건 어때?”

“문제없습니다. 지금………….”

이드는 손을 들어 말을 이으려는 비올라를 막았다.

“그럼 됐다. 자세한 내용은 조금 이따 듣자.”

“……그럼 이 후드라도 좀.”

“그것도 조금 이따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한 이드의 대답에 비올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후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괜히 답답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풍길 뿐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수많은 여기사들 앞에 선 오늘, 그들로부터 거부감 어린 시선을 받아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마법에 미쳐 있는 그라도 백 명이 넘는 여성들로부터 그런 시선을 받은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외모에 신경을 좀 써야 하나?’

비올라는 반들반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도 마법사 이전에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황금 장막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강대한 힘의 움직임에 따라 잔존해 있는 초인력의 찌꺼기는 남아 있었지만 그뿐, 유의미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황금 장막에 대해서도 확실히 봐 뒀기에 압니다. 이 근처에서 그것과 유사한 힘의 종류는 보이지 않습니다.”

간파의 눈으로 한참을 돌아본 에단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두 사람이 가져온 같은 결과에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올라에게 말했다.

“됐다. 이제 이야기해 봐. 아, 후드도 벗어도 돼.”

“어후~ 시원하다. 뭘 그렇게 조심합니까?”

후드 속에서 튀어나온 비올라의 머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만약이 있으니까. 아까 확인했지만 놈들의 목표는 쉴라 경의 생포였어. 그런데 그녀가 숲에 나타났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고 습격해 왔단 말이야. 누가 누굴 잡기 위해서 잠복하고 있었는지 헷갈릴 지경이라니까.”

“지켜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일리나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높아요. 특히 저 세 그루의 나무가 의심스러웠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황금 장막과 함께 흔적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사라진 모양이에요. 나무만 아깝게 됐죠.”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중앙부까지 속살을 드러낸 나무를 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이드, 그럼 이 나무에서 더 이상 살펴야 할 건 없죠?”

“없어요. 왜요?”

이드의 대답에 일리나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땅의 정령을 불러냈다. 그리고 땅속에 있는 가장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퍼 올려 나무의 드러난 속살을 메웠다. 비록 흙으로 채우긴 했지만 나무가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우와, 일리나 님, 이러면 나무가 다시 살아나는 겁니까?”

생전 처음 나무를 치료하는 모습을 본 에단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만 취한 거예요.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죽을 가능성이 더 커요. 그래도 이 작은 도움으로 다시 살아날 수도 있으니까요. 숲의 나무들은 씩씩하거든요.”

“오오, 역시!”

에단이 그 말에 감동한 듯 감탄했다.

이드는 일리나가 다른 나무를 찾아 가는 것을 보고 비올라가 하지 못했던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

“잘된 것 같습니다. 일단….. 좌표가 좀 이상하지만 제게 전송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입니다. 거리가 멀어서 사계의 눈이 말라 죽었습니다.”

“그럼 성공한 거야?”

“그건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일단 이 숲이 아닌 다른 곳의 좌표가 나온 건 확실합니다.”

“들킨 건 아니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소환체보다 사계의 눈이 은밀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 들키기도 전에 말라 죽었을 겁니다. 저와 너무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럼 성공이라고 봐야겠네!”

고개를 끄덕인 이드의 눈이 뜨겁게 번뜩였다.

이번 잠복에 관해서 클라인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계획을 잘 짜기는 했지만 이드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공격을 잘 막아 내고 사로잡은 적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또 허송세월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 숲에서 처음 포획한 포로들에게서도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이드는 비올라의 사계의 눈을 도망가는 자에게 붙여 그들을 추적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잡을 수 있는 스피드 스타를 일부러 놓아주었다. 그리고 도박성이 있었던 이 시도는 의외로 성공한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놈들의 꼬리를 제대로 한번 잡아 보자고!”


“음…….”

라울은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벽면을 보며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긁었다. 그를 시중들던 비서들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기분을 살폈다. 그때, 방의 중앙에 있던 바퀴가 ‘찰칵’ 하고 돌아가더니 한줄기 황금빛이 피어오르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보고 드립니다. 작전조가 복귀했고, 즉시 2차 안전지대로 대피시켰습니다.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으며 작전 대장렉터를 포함 백사십칠 명은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2차 안전지대를 알고 있는 건 렉터뿐이지?”

“그렇습니다. 그는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그럼 거긴 비우고 너도 안전지대로 복귀해.”

“명령 확인했습니다.”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울은 비서가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러면 일이 힘들어지는데, 그런데 우리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씨가 엉뚱한 곳에 튀어나와서 방해를 해 주네.”

라울은 옆에 있던 비서들을 내보내며 말했다.

“발터에게 연락하고 전해.”

“네, 주인님.”

문이 닫히자 라울은 책상 위에 올린 다리를 내리며 작게 혀를 찼다.

“꽤 발전 가능성이 높은 초인기였는데, 아깝네.”

건조한 그의 목소리엔 오로지 아까운 초인기에 대한 아쉬움만이 진하게 느껴졌다.

“흐흐, 좋은 전투였다. 컥! 커헉!”

크고 작은 부상은 있지만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치명상은 없어 바닥에 쓰러져만 있던 렉터가 갑자기 울컥 피를 토했다.

그를 끝까지 혼자서 제압하고 숨을 고르던 쉴라가 그 모습에 급히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그보다 한발 빠르게 상급 기사들이 그녀를 말리고 앞에 섰다.

“위험할지 모릅니다, 단장님.”

“저희가 살피겠습니다.”

그리고 쉴라를 대신해 렉터를 살피던 산드라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죽었습니다. 자살인 듯합니다.”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

“지독한!”

기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그들의 목숨은 충성을 바친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후, 허탈하군.”

렉터를 생포할 생각으로 한참을 그와 드잡이를 했던 쉴라는 급격히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에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고 그들에게 다가온 이드가 물으며 상황을 살폈다.

“비밀을 지킬 생각이었는지 자살했습니다.”

“이번에도 또 아무것도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쉴라가 실망한 듯 말했다.

이드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말했다.

“실망이 크겠네요. 그럼 제가 힘 나는 이야기 해 줄까요?”

은근한 이드의 말에 쉴라의 고개가 급하게 돌아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혹시?”

“네,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좌표는 나왔어요.”

이드는 씨익 웃어 보이며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그 손 모양은 뭔가요?”

“잘됐다는 표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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