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화
439화
한참을 걸어 일리나가 살고 있는 푸른 나무 마을에 도착했다.
길도 없는 숲을 삼십 분 정도 걸었던 것 같았다. 며칠을 걸어도 통과하기 어려운 시온 숲을 생각하면 삼십 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지만, 반대로 그 시간 동안 걸어 들어간 거리에 있는 마을과 그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결계의 거대함에 일행은 살짝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보게 된 푸른 나무 마을의 모습은 동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마을의 중앙에는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수십의 나무들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집들도 그런 나무들에 기대어 지어져 있었다. 집을 지은 재료도 다양했다. 돌로 지은 집은 물론이고,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집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집에는 푸른 넝쿨이 빽빽이 휘감겨 있어 건축 재료와 상관없이 모든 집이 풀을 엮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마을 안에는 작은 길이 나 있었는데 작고 귀여운 꽃이 피어 시골의 오솔길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일리나는 일행을 마을의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 아래로 안내했다. 그러는 중간중간 각자의 일을 하고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일행을 향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일행에 대한 관심은 그 잠깐의 시선으로 끝이었다. 일리나와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경계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거대한 나무 아래 앉아 있던 중년의 엘프가 일행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일어났다.
일리나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장로님.”
“수고했다. 문지기는?”
“오는 중에 연락을 해 두었으니, 윌이 문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장로는 일리나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는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시오.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을의 장로 우디라오.”
우디라는 이름의 장로의 말에 채이나와 마오, 이드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특히 이드와 인사를 나눌 때 반응이 각별했다.
“그래, 자네가 그…………”
‘그……?’
이드는 뒤이어질 말이 신경이 쓰였지만 안타깝게도 우디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대신 이드를 바라보는 우디의 시선이 웃는 듯 화내는 듯 묘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일리나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녀의 일에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일리나의 가족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드는 등을 곧게 펴고 몸가짐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일리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지?”
하지만 그런 이드의 노력은 일행들 주변으로 모여드는 아이들 앞에서 의미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여기저기 옷자락을 슬쩍슬쩍 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숲에서만 자란 아이들은 다크엘프도 하프엘프도 인간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성인 엘프들과 다르게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모든 것이 신기하게만 보였나 보다. 그나마 깔깔대며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우디가 일행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같이 움직이자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다행히 그의 집은 멀지 않았다. 마을 중앙의 거대한 나무 근처에 위치한,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 그의 집이었다.
“자, 손님들은 그만 놓아 드리고 정령수와 함께 놀거라. 자네들은 들어오게.”
우디는 일행들 주위로 줄줄이 붙어선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장로라는 직책을 맡아 마을을 이끌고 있는 그의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그의 집임과 동시에 마을의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결정하는 곳이었다. 집에 들어서서 처음 본 것은 수십 명이 들어설 수 있는 넓은 응접실과 그 중앙에 놓여 있는 거대한 검은 탁자였다. 원형의 탁자는 어디가 상석인지 알 수 없는 그저 둥그런 자리였다. 어디에 앉아야 할까,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자리의 주인을 찾는 건 인간뿐인 모양이다. 엘프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드, 여기. 여기 앉아요.]
라미아가 의자 등받이에 올라 앉아 그 옆자리를 부리로 가리켰다.
라미아와 일리나 사이의 빈자리였다. 이드는 픽 웃으며 그녀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일리나가 조용히 의자를 가깝게 붙였다.
“호오.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분이 계시구만?”
일리나를 따라 경쟁적으로 이드에게 좀 더 다가가 앉는 라미아의 모습을 보며 우디가 물었다. 이드의 어깨에 올라앉은 그녀를 보고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대화가 가능한 존재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어 말을 하자 관심을 보였다.
우디의 관심에 이드는 아차 싶었다. 앞서도 그랬지만 또 라미아의 소개를 깜빡했다. 바로 앞서 그 때문에 한 소리를 듣고 나서도 다시 실수를 한 것이다.
[라미아라고 해요. 장로님.]
“내가 이런 작고 귀여운 손님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군.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제 모습이 특별해서 그런걸요.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소개를 했어야 하는데, 이드가 또 깜빡한 것 같아요.]
말을 하는 라미아의 눈길이 아프다.
‘미안! 한 번만 더 봐주라.’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앞서의 실수를 포함해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드는 우디와 라미아를 번갈아 보고는 목덜미가 서늘하게 식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하하. 그런가.”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인의 소개를 이렇게 게을리하는 건 문제가 있죠.]
“하하하. 그렇지. 이렇게 귀여운 연인에게 소홀한 건 큰 잘못이지. 그런데 인간과 연인이라니, 본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른 모양이지?”
[호호호. 제가 재주가 좀 있답니다. 다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죠.]
“그 사정이 빨리 해결되길 바라네.”
누구 들으라는 듯 우디가 크게 웃으며 라미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일리나를 향했다. 이드에 대한 일리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장로이기에 그에게 다른 짝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일로 혹시 상처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라미아 양과 제대로 인사는 나누었니?”
함께 마을로 돌아온 걸 보면 이야기가 잘된 것 같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디가 물었다.
“네. 이드가 소개를 시켜 주지 않아서 직접 인사를 나누었어요.”
[일리나와는 이드와 처음 만날 때부터 알던 사이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디의 걱정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일리나와 라미아가 나서서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우디와는 달리 안심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드였다. 가벼운 핀잔 섞인 일리나의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과연 일리나의 가족으로 생각되는 우디는 라미아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엘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 생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드래곤처럼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 죽어 나가든지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엘프들 역시 성인으로 성장한 이후에는 연애를 포함한 사생활에 대해서 크게 간섭하지 않는 이들이다. 다만 부족 단위,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를 보호하려는 유대감은 강하다. 다시 말해서 일리나의 짝에 대한 부분에서 간섭할 엘프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짝은 오로지 그녀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또 엘프의 가정은 어머니가 중심이다. 육아를 포함해서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어머니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실제로 이드가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은 우디가 아니라 일리나의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현명하고 나이 든 엘프답게 이드의 생각을 충분히 짐작한 우디였지만 모른 척했다. 굳이 이드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드가 일리나가 택한 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 인간일 뿐이었다. 그는 장로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럼 그 이야기는 네 어머니와 함께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역시. 일리나의 아버님이시구나!’
이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일리나의 부모님이라면 좀 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만나고 싶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타인처럼 소개를 받으면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아닌 마을의 어른으로 그를 소개한 일리나가 조금 미워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어지는 우디의 말에 긴장하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지금은 네가 전해 주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먼저이겠지. 베일.”
누군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그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검은색의 인영이었다. 하지만 눈도 코도 귀도 없이 그저 외형적인 형태만을 가진, 말 그대로 그림자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 외형적인 형태가 꼭 집사를 닮았다.
“베일, 차를 준비해 주겠니? 라미아 양은 차가 괜찮은지?”
[아니요. 아쉽게도 아직 먹을 수는 없답니다. 말씀만으로 감사드려요.]
“그럼 라미아 양을 제외하고………… 차 이외에 다른 걸 원하시는 분이 있으신지?”
“아, 그럼 저는 가벼운 술로.”
채이나의 말을 들은 우디가 베일을 돌아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베일이라는 그림자가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미끄러지듯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그림자의 정령이군요. 그들과의 계약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 최근에 계약자가 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대단하세요. 거기다 상당히 재미있게 정령을 다루시는군요.”
베일의 등장부터 신기하게 바라보던 채이나가 말했다. 특히 그녀의 말대로 집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정령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눈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디는 채이나의 말에 오히려 고민 가득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나에게는 그림자의 정령을 소환할 만한 능력은 없다오.”
계약도 하지 않은 정령이 우디의 말을 듣고 있다는 말이다.
“그럴 수가 있나요?”
채이나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계약자도 아닌 우디의 말에 소환되어 부탁을 따르는 정령이라니. 그녀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마침 베일이 차와 술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 모습이 귀족가의 제대로 교육받은 집사와 같아 보였다. 차를 모두 내려놓은 베일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보통은 그럴 수 없지만 그를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네. 그것을 포함해서 이야기를 해야겠지.”
우디는 그렇게 말을 하고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를 일리나에게 넘겼다.
“나머지 이야기는 네가 하려무나.”
“네. 이드, 당신이 사라지고 난 후의 이야기. 모르시겠죠?”
묻고 있지만 확인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끄덕. 이드의 고개가 움직였다.
“채이나에게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건 듣지 못했어요.”
“나도 깊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알려줬지.”
이드는 대답하면서 일리나를 향해 살짝 돌아앉았다. 그러자 두 사람의 무릎이 살짝 닿았다.
일리나의 말대로 궁금한 일이었다. 그레센으로 돌아와 일리나의 행방과 함께 가장 먼저 확인했던 일이다. 당연히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 들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라지던 그 순간으로 돌아왔다면 모른다. 혹은 돌아온 세상에서 혼돈의 파편이 분탕질을 치고 있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세상은 평안해 보였다. 거기에 더해서 당시에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다고 들었으니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런 무거운 이야기는 이후에 들어도 좋을 듯했다.
지금은 일리나와의 재회를 좀 더 이어 가고 싶었다.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다. 전해 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는 이드가 돌아오면 바로 세레니아에게 연락하기로 약속했어요.”
일리나는 그 말을 시작으로 이드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