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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00화


637화

쉴라에게 있어서 이드의 말은 잃어버렸던 돈주머니를 찾았다는 것만큼이나 반갑고 고마운 소식이었다. 쉴라는 금세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때부터 바쁘게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금 장막을 대신해서 일리나와 라미아가 환하게 밝힌 숲을 정리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 기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예외였다. 심정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덕분에 생포된 적들의 처우가 심히 좋지 못하게 되었다.

포로들을 포함해 잡혀 온 적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네 차례로 나누어 공간 이동을 하였다. 일반 마법사라면 마나가 부족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에 대해 어중간하지만 지식을 가지고 있는 쉴라와 상급 기사들은 새삼 라미아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라미아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비올라 때문이었다.

공간 이동으로 기사들이 모두 복귀한 화원은 그들로 인해 소란스러워졌다. 어둡고 고요한 밤의 축복이 사라지고 대낮처럼 불이 밝혀졌다. 이백에 가까운 기사들이 한 번에 복귀한 데다, 적지 않은 포로를 데려왔으니 당연했다.

“적들에게 붙인 꼬리에 대해서는 내일 따로 찾아가서 듣겠습니다.”

동료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운반되는 사상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쉴라가 말했다. 이드가 얻은 수확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은색 기사단장으로서 기사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하세요.”

“맞습니다. 일단 저쪽에서도 후퇴한 후라서 바짝 날카로워진 상태일 테니 바로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드의 말에 에단이 보충 설명을 했다. 제국의 정보 조직인 트와이스에 침투해서 활동하던 그의 전직을 생각하면 새겨들을 필요가 있었다. “스폴 경과 데일리 경은 내일 수업에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드가 쉴라 옆을 지키고 있는 스폴에게 말했다.

“아니요. 평소와 같은 시간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일로 은색 기사단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요.”

긍지와 고집이 느껴지는 말에 이드는 더 권하지 않고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새벽에 켜진 화원의 불은 날이 밝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고, 그 소식은 은색 기사단을 살피던 자들에 의해서 날이 밝는 즉시 보고되었다.


그날 페시딘은 평소와 다른 불쾌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아침은 언제나 평온하고 조용했다. 맑은 정신으로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를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침 일과를 알고 있는 하인들이나 집사는 언제나 아침 식사를 차려 두고도 그에게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러 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그가 식사할 때까지 음식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요리사가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과 친구들도 페시딘의 그런 성향을 알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아침에 그를 찾아오는 일은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배려를 깨고 아침 일찍 워스가 페시딘을 찾았다.

워스는 불편한 표정의 페시딘에게 새벽에 올라온 보고서를 말없이 내밀었다.

‘으음’

페시딘은 슬쩍 보고서에 눈을 주고는 내심 깊은 한숨을 쉬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물론 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그에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내용의 보고서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불편한 표정도 아침부터 찾아온 친구 때문이 아니라 보고서와 관련된 일 때문이었다. 고작 아침에 찾아온 일로 반백 년을 알아 온 친구에게 화를 낼 정도로 그의 속은 좁지 않다.

오히려 그는 반백 년을 알아 온 친구가 아침부터 무거운 얼굴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고 있었다.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에게 워스는 마르텔보다 어려운 친구였다. 자신의 생각을 전혀 숨기지 않는 마르텔과 달리 반백 년을 함께했지만 이 워스라는 친구의 속은 그도 아직 완전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불만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오히려 그 나이 먹도록 가리지 않고 말을 막 하는 마르텔이 이상한 경우다.

워스의 확고한 성향,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모습은 믿음직스럽다. 철저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한 그의 모습에 반해서 그를 따르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 친구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일을 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일 테지. 끙, 골치 아프군.’

페시딘은 느릿하게 보고서를 들어 다시 읽었다. 그에게 올라온 보고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워스가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은색 기사단이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것 같더군.”

“……”

“최근 그들이 지키고 있는 숲에서 싸웠을 테고.”

“……..”

“상대는 분명 초인파의 초인들이겠지!”

단호하면서도 날이 서 있는 워스의 말에 페시딘은 결국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음…….”

“자네도 알고 있던 일인가?”

페시딘은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이번 일을 벌인 초인파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렇네.”

아니, 몰랐다. 그도 보고서가 올라오기 직전에 연락………… 아니, 통보를 받고서 알았다. 페시딘은 어이없는 통보에 욕설로 답해 주었다. 그리고 한참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그렇다고 초인파와의 일을 주도하고 있는 자신이 몰랐다고 하기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자존심 때문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실망이네. 은색 기사단은 검후와 달라. 기사들이야말로 앞으로 초인들과 싸워 나갈 우리들의 진짜 힘이야. 고작 초인 놈들에게 함부로 내어 줄 수 없는 인재들을 내어 주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바로 저 초인에 대한 적의.

워스가 가진 초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검후에 대한 일을 도모하면서 초인과 연계할 때도 그를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가. 검후를 버리고 배신하도록 설득하는 것보다 잠깐이라도 초인과 손을 잡게 만드는 것이 더 힘들었을 정도였다.

기사들이 최후에 싸워야 할 것은 결국 초인들이라는 것이 평소 워스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표정은 마치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와 손을 잡는 것처럼 썩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초인들이 마음대로 은색 기사단을 노리고 공격했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워스와 초인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지.’

적어도 아직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페시딘은 최대한 이번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자네들에게 논의하지 못해 미안하네. 하지만 워낙 다급하게 일이 벌어진 상태라서 내가 대국적으로 보고 결정을 내렸네.”

“아무리 그래도 내어 줄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은가. 설마 자네, 내가 검후를 버린 이유를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검후가 초인과의 화합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

“걱정 말게. 이번 일은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결정한 일이니까. 그리고 자네 염려도 내 잘 알고 있네. 이후 다시는 이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네. 아니, 없도록 하지.”

페시딘은 이후 제법 긴 시간을 워스의 화를 가라앉히는 데 써야 했다.

그러나 이 속 깊은 친구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믿어 주는 척을 하며 눈감고 넘어가 주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끝내 고개를 끄덕인 워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분명히 이야기하네만, 이후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자네의 계획에서 나는 완전히 빠지겠네.”

“명심하지. 이번 일은 정말이지 내가 성급했네.”

워스가 돌아가자 페시딘이 의자에 앉으며 책상을 내리쳤다.

“이 개 같은 초인 놈들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꾹꾹 눌러 놓은 화가 다시 치솟아 올랐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아주 단단히 못을 박아야 해! 감히 날 상대로 이딴 개수작을 부려!”

아무리 생각해도 새벽에 쏟아부은 욕설로는 부족하다 느낀 페시딘은 다시 상대에게 따지고자 통신을 위한 황금 눈동자를 열었다. 

“무슨 일이오. 전할 이야기는 아까 다 전했소만.”

“개소리! 나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통보를 받았을 뿐이지! 이따위 빌어먹을 짓을 꾸민 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금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퉁명한 목소리에 페시딘은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주군, 마르텔 님께서 오셨습니다.”

막 설교를 시작하려던 페시딘은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를 놀리듯 황금 눈동자 안의 목소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쪽에 다른 일이 생긴 모양인데,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대신, 오늘은 바쁘니 내일 연락하시오.”

뚝.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황금 눈동자가 닫혔다. 그 모습을 보고 화를 풀 유일한 통로가 막힌 듯 느껴진 것은 착각일까.

“주군?”

페시딘은 기사가 다시 부르는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일단 지금 내가 두통이 있다고 말하고………… 그래도 보겠다고 하면… 모셔 와라.”

“옙.”

페시딘은 다시 이어질 이야기에 물을 들이켰다. 상대는 두통 따위에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과연 그의 짐작대로 잠시 후 마르텔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이봐, 이건 뭐야!”

그런 마르텔의 손에는 이미 책상 위에 놓인 두 장의 보고서와 똑같은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끙, 일단 들어오게.”


“중간에서 꽤나 고역인 모양이군.”

황금 눈동자를 닫아 버린 발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나도 크게 다를 건 없기는 하지만.”

삼검왕에 관한 일차적인 대응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바로 발터였다. 쉴라의 납치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전격적으로 진행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시에 이번 일은 조용히 지나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복잡한 일은 라울이 알아서 하겠지.”

굳이 라울이 진행한 일로 피곤하고 싶지 않은 발터는 무뚝뚝한 손길로 황금 눈동자의 기능을 완전히 꺼 버렸다.

“하루 정도면 뜨겁던 머리도 조금은 차가워지겠지.”


이드와 그 일행이 저택으로 돌아오자 클라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쉴라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사이 연락을 받은 클라인이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핵심만 간추린 에단의 이야기를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대로 일이 풀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희생자가 나왔다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쉴라 경의 상심이 큰 것 같았습니다.”

이드가 헤어지기 전 쉴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은색 기사단장님이라면 곧 잘 수습하시겠지요.”

“그렇기는 하겠지만,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니까요. 특히나 부하들을 아끼는 분이 아닙니까.”

전사자들의 이야기에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보다 이제 그들을 추적할 단서를 얻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운이 좋다면 확실한 꼬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제 에단이 실력 발휘를 해야 할 때지요.”

클라인이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클라인의 지목을 받은 에단의 표정이 묘했다. 그는 잠시 주춤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이번 일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하지만, 그보다 한 가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일이야?”

살짝 망설이는 에단의 모습에 이드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것이…………… 이번에 숲에 숨어 있다가 또 초인력을 흡수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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