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204화


641화

“쉴라 단장이 카일란 단장을 찾았다고?”

보고를 받던 중에도 바쁘던 손을 멈추고 페시딘이 얼굴을 들었다.

“예.”

“쉴라 단장이라면 오늘 데이트 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데이트 중에 흑색 대장간에 들르셨습니다.”

“요즘은 데이트 장소로 대장간을 택하는 게 유행인가 보지?”

페시딘이 손에 든 펜을 놓고 물었다. 하지만 그 앞에 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페시딘을 앞에 두고 데이트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기에 민망했기 때문이다.

페시딘도 그의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흑색 대장간이라…….”

흑색 대장간은 흑색 기사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무구를 손질하는 취미를 가진 카일란의 작은 공방으로 시작된 곳이었다. 그러다 단장의 취미를 추종하는 기사들이 모여서 인원이 많아지고, 물건을 다루는 깊이가 깊어지다 보니, 기사단에서 사용하는 무구를 직접 만드는 대장간이 되어 버렸다.

저 유명한 오색 기사단 중 흑색 기사단이 직접 운영하는 대장간이다 보니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기에 까다로운 기사들이 운영하는 만큼 흑색 대장간의 무기는 질이 좋기로도 유명했다. 힘 좋고 섬세한 기사들이 전력으로 철을 두드리고 있으니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대신, 품질에 워낙 까다롭다 보니 생산되는 무기의 수가 적었다.

거기다 생산되는 모든 무기는 우선적으로 기사단 내부에서 사용되고, 남는 무기만을 대장간에서 팔고 있었다. 특색도 있고, 실력도 있어서 유명하지만 막상 구매하려면 물건이 없어서 구매하기 힘든 것이 바로 흑색 대장간의 무구였다. 거기다 흑색 기사단의 단장과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구매할 용기 있는 자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대장간은 항상 한산했다.

그렇다고 대장간이 적자 운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기본적으로 기사단의 유지 비용 중 무구에 들어가는 돈을 가지고 운영되기 때문에 적자랄 게 없었다. 거기다 자신들이 피땀 흘려 만든 무기를 헐값에 내어놓을 기사들도 아니었다. 대장간의 무기는 기사들의 또 다른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무기를 사 가는 것이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다 보니 헐값에 팔릴 일도 없었다. 그들은 흑색 기사단장과 기사들이 만들었다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검을 가지기를 원했고, 비싼 값에 구매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자는 고사하고 흑색 기사단은 대장간을 운영함으로써 오히려 돈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취미를 멋지게 수익으로 연계시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하겠다.

이런 뒷이야기를 알고 본다면 흑색 대장간도 데이트 장소로 나쁘지 않은 곳이기는 했다. 일반 대장간처럼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이 아니라, 보석 상점과 같이 대단한 곳이니까. 무엇보다 같은 오색 기사단의 단장인 쉴라에게는 오히려 친밀한 곳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사자들이 생긴 다음 날 굳이 데이트를 해야 했느냐는 점과, 그 데이트에서 꼭 흑색 대장간의 카일란을 만나야 했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이드의 저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대머리 마법사와 함께? 이상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지.”

초인파의 연락을 받은 페시딘으로서는 쉴라의 행동이 의심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 듣지 못했습니다!”

“혼잣말이다. 그보다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

“죄송합니다.”

남자가 당당히 고개를 숙였다. 답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모르는 게 당연했다. 감히 무슨 수로 흑색 기사단의 단장과 기사들이 운영하는 대장간을 완벽히 감시할 수 있을까?

그 코딱지만 한 대장간은 어지간한 영지의 영주 성보다 위험한 곳이었다.

“쉴라 단장은 아직 대장간에 있나?”

“아닙니다. 삼십 분가량 머문 후에 거리를 걷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으음.”

페시딘은 턱을 매만지더니 손을 흔들어 남자를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며 펜대를 굴렸다.

“카일란 단장과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분명 이유 없이 들르지는 않았을 텐데. 데이트가 위장이었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꼬리에 달고? 아니지. 아니야. 음, 모르겠군.”

쉴라의 행동은 페시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당장 이번 데이트만도 그랬다. 부하 기사들이 전사한 다음 날 데이트라니?

물론 이것은 은색 기사단의 특성을 페시딘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 때문에 이후 쉴라의 행동도 머릿속에서 꼬여 버렸다. 무엇보다 어떤 예측도 모두 가정일 뿐 진실은 아니었다.

“카일란 단장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곧 알 수 있겠지.”

페시딘은 답이 나올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을 접고 펜을 다시 들었다.

그렇게 위로는 삼검왕부터 아래로는 소드 팰러스의 하인까지, 소드 팰러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진 쉴라의 데이트가 저녁 식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오늘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비올라와 함께 이드의 저택 앞에 도착한 쉴라가 말했다.

“난 별로였다.”

“그건 그대 감상이겠지. 하지만 분명 빚은 갚았다.”

“그런 걸로 해 두자.”

비올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저택 밖을 노려보았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데이트였다. 데이트의 시작도 쉴라가 그를 마중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도 쉴라가 그를 배웅하는 것이라니.

데이트가 만족스럽고 말고를 떠나서 남녀의 입장이 바뀐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루 종일 두 사람을 쫓아다니는 스토커들의 살기등등한 눈빛이 너무 거칠었다. 이대로 쉴라를 먼저 보내고 비올라 혼자 저택으로 돌아갔다가는 그 길이 바로 전쟁터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올라의 비명횡사가 될 가능성이 컸다.

‘명색이 기사의 성지라는 소드 팰러스에 무슨 스토커들이 이렇게 많은 거냐고!’

무엇보다 스토커들이 소드 팰러스 출신이어서 그런지, 스토킹을 하는 것뿐인데 쓸데없이 실력들이 좋았다. 딱 봐도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실력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스스로의 실력과 천재성에 도취되어 있는 비올라였지만 쪽수 앞에 장사 없다는 진리는 잊지 않았다.

다만 아쉽기는 했다. 바이트 타블렛을 완벽히 해석하고,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했다면 저 날파리 같은 놈들을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비올라가 여러 가지고 꽁해 있을 때 저택의 식구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비슷한 시간에 데이트를 나갔던 이드도 이미 돌아와 있었다.

“데이트는 즐기셨어요?”

“네. 좋은 파트너 덕분에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드는 진심으로 미소 지어 보이는 쉴라의 모습에 살짝 놀라며 말했다.

“그럼 다음 데이트도?”

“그건 받지 못했네요. 이후에 서로 시간이 있다면 생각해 보지요. 앞으로 그에게 질 빚은 데이트로 해결이 안 된다고 하니까요.”

[어! 그럼 두 번째 데이트 허락은 정말 비올라가 쉴라 경에게 다가가도 좋다는 허락인 거에요?]

대담한 해석에 꿍해 있던 비올라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그는 하루 종일 쉴라에게 휘둘리고, 중간에 흑색 대장간에 들르면서 이 데이트라는 가면을 쓴 행위에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쉴라 정도의 유명한 미녀와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는 것이 불만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것은 사실. 그런데 두 번째는 아니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첫 데이트가 재미있었으니까 두 번째도 기대되는데, 아무렴, 한 번 데이트했던 사람이 쉽지 않겠어?”

이게 데이트를 이용해서 놀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진짜 마음이 있다는 말인지.

‘도대체 무슨 소리야!’

괜히 꽁해 있던 비올라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여러 사람 흔들어 놓은 쉴라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순간 그녀가 은밀히 말을 전하려는 뜻을 파악한 이드가 기막을 만들어 목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게 만들었다.

쉴라가 살짝 눈인사를 보내며 말했다.

“오늘 데이트 중에 카일란 단장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행히도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절 대신해서 다른 오색 기사단의 단장들을 모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곧 오색 기사단장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겠군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대대적인 초인들의 기습이 있은 후 쉴라와 클라인은 좀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장 우선적으로 오색 기사단을 꼽았다. 다만 이드는 그 말에 회의적이었다.

검후가 사라진 후 은색 기사단처럼 적극적인 수색의 의지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 과연 검후를 위해 충성하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오히려 가만히 무거운 엉덩이를 깔고 앉은 모습은 삼검왕을 지지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클라인과 쉴라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삼검왕을 지지하는 기사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검후가 사라진 지금 소드 팰러스의 안정을 위해 오색 기사단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더해서 검후의 실종을 사고가 아니라, 검후 스스로의 은둔이라는 쪽으로 강력히 몰아갔다.

그들은 당장 이 대륙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검후에게 해코지할 수 있는 자는 있을 수 없는데, 화원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은 검후가 스스로 모습을 감추었다는 주장이었다.

이 가설은 검후를 존경하는 마음이 큰 자일수록 깰 수 없는 주장이었다. 검후와 같은 경지의 초인이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사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우상이 타인에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다.

이것은 타인의 주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이 스스로를 묶어 두는, 일종의 무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무조건 검후의 은둔이라고 주장하기에는 화원과 이어진 검후의 숲에 남은 전투의 흔적이 너무 분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검후의 생각을 담은 일기까지.

각자가 가진 진짜 속내야 어떠하든 이 앞에서 침묵할 수 있는 오색 기사단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라인은 이 중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이용할 방법도 모색 중이라고 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쉴라가 저택을 떠났다.

그녀가 화원으로 돌아가자 하루 종일 스토커 짓을 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흩어졌지만, 특이한 몇몇은 저택 앞을 지키고 있었다.

“네가 무슨 수로 쉴라 님과 데이트를 할 수 있었는지 고문을 해서라도 알아내겠다던데?”

한발 늦게 복귀한 에단의 말이었다.

비올라로서는 정말 이 갈리는 데이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그런 비올라의 등 뒤로 에단이 은밀히 다가갔다.

“근데 너 내 말을 잊었지? 내가 쉴라 님과 가까워진 만큼 칼로 찔러 줄 거라고. “우악!”

비올라의 등 뒤로 다가선 에단이 그의 등을 쿡 찌르며 야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가 진짜 칼로 찌른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손가락 두 개일 뿐이었다.

감히 자신의 우상과 데이트를 즐긴 비올라에 대한 응징 차원의 장난이었다. 아무렴 질투에 식구를 죽일까! 에단이 그 정도로 눈이 뒤집히진 않았다.

·저택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은 진심인 듯했지만!

그러나 에단의 문제는 그가 장난을 친 비올라가 장난을 받아 줄 생각이 일절 없었다는 점이다.

에단은 말을 하던 중 갑자기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을 느끼며 허둥댔다.

이 순간이 오기를 벼르고 벼르며 준비한 비올라의 중력 역전 마법이 에단을 허공중에 매달아 버린 것이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왜 그 이야기를 안 하나 했다. 감히 날 협박해?”

비올라가 벗어 두었던 로브를 다시 뒤집어쓰며 음침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짧은 순간 에단은 후드에 숨은 비올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자식 눈이 돌아갔어!’

에단의 생존 본능이 현재 비올라의 위험도를 최고조로 알려 왔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에단이 비어 있는 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야! 자, 장난이야. 봐라. 손에 아무것도 없다고. 장난이었다고!”

“잘됐네. 난 진심인데.”

비올라는 정말 즐겁다는 듯 말하고는 에단을 끌고 그대로 지하로 향했다.

“어………… 어………… 사………… 삽!”

“조용! 뒤로 미뤘던 해부를 오늘 해 주마!”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