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06화
643화
그날도 이드는 평소와 같이 수련생의 수업을 위해 나가려 했다.
평소라면 그와 함께 수련장에 나갈 준비를 했을 일리나가 조용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 일이지?’
이드는 혹시 그녀가 아픈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살폈다. 몸 상태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의 신체가 건강하다는 사실은 매일 그녀와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이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기감을 통해서 매일 밤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때문에, 그녀 자신보다 이드가 더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다만 어찌해서도 들여다볼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살필 뿐이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고, 우울한 눈…………도 아니고. 뭘 보고 있는 거지?”
이드는 천천히 일리나의 눈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큰 창 너머로 저택의 정원과 그 너머의 화원, 그리고 저 멀리 산이 보였다. 딱히 어느 한 곳을 집중해서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문득 조용히 사색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긴 시간 숲에서 살아가는 엘프들에게는 이런 시간이 자주 있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 숲 밖으로 나오면서 하루하루 너무 바쁘게 보냈을 수도 있다 싶었다.
‘그렇다면 오랜만의 평화를 방해할 수는 없지.’
이드는 일리나가 신경 쓰지 않도록 최대한 소리를 지우고 저택을 나섰다. 그리고 일리나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소음이 적은 수업을 진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업의 시작은 3시간짜리 명상이다.”
“예에? 어제 못한 대련은 어쩌고요?”
“선생님, 3시간은 너무 길어요.”
“저는 무릎이……………”
일방적인 이드의 결정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아직 한창 혈기왕성한 젊은 수련생들에게 3시간의 명상은 하루 종일 대련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수업을 책임진 이드가 그렇게 진행하겠다고 나서면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개중에는 눈치 빠르게 엄살을 피우며 명상에서 빠지려던 수련생도 있었지만, 병의 진위도 가리지 않고 내밀어진 의자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다리가 아파서 명상을 하지 못한다면 투박한 의자에 앉혀서라도 명상을 시키고 말겠다는 흉악한 악의를 느낀 것이다.
수련장은 수업이 시작된 후 가장 조용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중간중간 고개를 까딱거리며 졸고 있는 수련생의 등짝에 강력한 스매시를 때리는 찰진 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났다. 명상이 끝나자 3시간에 걸친 사투의 결과로 저리다 못해 감각이 사라진 다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일리나는 수련장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신경 쓰여서 안 되겠다. 내가 들어가 봐야지.’
마음을 굳힌 이드가 수련장을 향해 외쳤다.
“고작 3시간 명상으로 힘들다고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기사의 인내심이 고작 그 정도인가. 2시간 추가!”
“그런!”
이미 마음이 떠난 이드의 대략적인 수업 대체 계획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그 정도로는 일리나를 향한 이드의 발길을 막을 수 없었다.
“스폴 경께는 수업 감독을 부탁합니다.”
이드는 스폴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 수련장을 나섰다. 등 뒤에서 한계까지 쥐가 난 다리를 강제로 굽히면서 생겨난 말 못 할 감각에 희한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깨끗하게 무시했다.
거침없이 수련장을 나선 이드였지만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발걸음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찾아간 방에는 나갈 때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일리나가 있었다. 곁의 테이블에 찻주전자만 하나 더 늘어난 상태로 일리나가 포옥하고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굉장히 아쉬워하는 듯한 모습에 이드는 더 참지 못하고 일리나의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드가 왜 사과를 해요?”
뜬금없는 이드의 사과에 일리나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일리나가 한숨을 쉬었잖아요. 본래 아내가 힘들어하면 남편이 무조건 사과부터 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한국의 유부남 커뮤니티에 떠도는 평탄한 부부 생활 백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호호호, 그게 뭐예요.”
“일리나가 웃었으니 확실히 효과는 있네요. 자, 이제 말해 봐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손을 잡으며 이드가 묻자 일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이드 곁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단지, 이맘때 숲에서 즐겼던 온천이 생각나서 그랬어요.”
“온천이요?”
“네. 보통 때는 미지근하다가 이때쯤이 되면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온천이 있어요. 뜨거운 온천물이 솟으면 숲속의 동물들과 마을의 엘프들이 온천을 이용하죠. 저도 매년 온천을 즐겼고요.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문득 창밖으로 산을 보다가 산의 눈이 녹고 초록 잎이 많아지는 지금이라면 온천이 솟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분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듯 행복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일리나의 모습에 이드는 일종의 향수병 증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숲이 그리운 거예요? 돌아갈까요?”
“아니에요, 그런 건. 마을을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아직은 괜찮아요. 당장 이드도 옆에 있는걸요. 전 단지 습기 가득한 공기와 뜨거운 온천이 생각났을 뿐이에요.”
이드는 살짝 헷갈렸다. 어차피 온천은 시온 숲 안에 있는 것이지 않은가. 온천이 생각난다는 건 숲이 생각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확인차 바라보는 자신을 향해 정말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는 일리나를 보면 진짜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같이 시온에 있는 온천에 갔다 올까요?”
“아니요. 중요한 때잖아요. 에단도 위험한 일에 나가 있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이드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죠.”
일리나의 예쁜 대답에 이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확실히 쉴라나 클라인이 급하게 이드를 찾을 경우 곤란하긴 했다. 하지만 일리나의 아쉬움을 그냥 넘기고 싶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숲을 떠나 온 그녀에게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드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 같이 수영장 만들어서 수영하는 건 어때요?”
“수영장이요?”
“소드 팰러스에 온천수가 없으니 온천은 힘들지만 수영장 정도는 언제든지 만들 수 있죠. 내가 만들게요. 물 온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물에 몸을 담그는 건 비슷하지 않겠어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맞다. 분명히 다르다! 다른 건 고작 물 온도 정도가 아니었다. 온천과 수영장은 엄연히 개념 자체가 달랐다. 같은 점이라고는 똑같이 물이 사용된다는 정도인데 이 물조차도 온도에서부터 구성 성분까지 모두 다르다.
참으로 철없는 억지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온천을 찾았는데 수영장이라니. 일리나가 그 언밸런스함에 크게 웃고 이드의 손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하지만 수영장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말만이 아니라고요. 지구에서 가져온 수영복도 있는데, 아마 일리나에게도 잘 어울릴 거예요.”
이드는 문득 지구에서 가져온 색색의 예쁜 수영복을 걸친 일리나의 모습을 생각하고는 훅훅 콧김을 뿜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달려왔다가 엉뚱하게 이야기가 흘러 이상한 곳에 꽂혀 버린, 황당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만들어야겠어요.”
눈앞에 청초한 원피스 수영복과 섹시한 비키니 차림의 일리나의 모습이 아른거리자 이드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진짜 당장 달려갈 듯한 모습에 당황한 일리나가 말렸지만 이번엔 그녀의 브레이크가 듣지 않았다.
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리나도 냉기에 침범을 받지 않기 때문에 수영할 계절이 아니라는 것은 넘어가더라도, 두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수영장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사실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소드 팰러스와 가까운 호수나 강을 찾으면 되니까.
그러나 이드는 이에 반대했다.
“일리나의 수영복 차림을 다른 사내놈들에게 보여 줄 수는 없죠. 나만 봐야지.”
“쿡쿡, 저도 지구의 수영복은 이드가 아니면 조금 부끄러워요.”
지구에서 가져온 수영복은 그레센에서 너무 파격적인 형태였다. 그레센에서는 수영복이랄 것은 따로 없지만 대체로 래쉬가드와 같은 반팔 반바지 형태의 옷을 주로 입었다. 그것도 복부를 완전히 가리는 형태로.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로 알몸을 선호했다. 특히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시골 출신이거나 밤에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랬다. 여기서 수영복보다 알몸이 더 부끄럽지 않으냐는 말이 나올 수 있지만, 아니다. 알몸 수영은 어차피 사람이 없을 때 하니까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
살짝 난감해하는 일리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온 이드는 수영장을 만들 공간에 대해서 구상하기 시작했다. 저택을 중심으로 수련장과 반대쪽에 위치한 곳으로, 잔디와 나무가 잘 가꿔진 정원의 한가운데 선 이드가 말했다.
“이쯤이면 좋겠죠? 크기는 이 정도로 하고요.”
쉬리리릭-
수영장이 들어설 대략적인 크기를 그려 보는 이드의 손끝을 따라 땅이 파이고 선이 그어졌다. 그 모습에 괜히 온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던 일리나가 살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커요!”
“아니요. 이 정도가 딱 적당해요. 우리들이 쓰지 않을 때 수련생들이 쓸 거거든요.”
“여름에?”
“수련에요. 저택 안에 공들여 만들었는데, 가끔씩 쓰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명상이라는 핑계로 수련생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어두고 일리나를 위해 수영장을 만들고 있는 이드로서는 퍽 기특한 생각이었다.
수영장의 자리를 잡은 이드는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복잡할 건 없었다. 이미 그어 놓은 선을 중심으로 턱을 좀 높이고, 땅을 파면 될 일이다.
“그 전에 나무들을 옮겨야겠죠. 수영장과 너무 가까우면 이 아이들도 좋지 않을 테니까.”
“제가 도울게요.”
“그럼 노움만 불러 줘요.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이드는 일리나에게 정령을 불러 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설명하고, 수영장 안에 있는 나무와 너무 가까운 나무의 기둥을 밀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쿠루루루룩~
이드의 힘이 나무를 미는 순간, 노움의 힘에 의해서 땅이 진흙탕처럼 변하더니 나무가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진흙 속을 나무젓가락으로 휘젓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옆에서 보면 기가 막힌 모습으로 이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옮겨 세웠다.
나무들이 휘청대며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택 너머 수련장에서 연속된 명상에 쏟아지는 잠을 깨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던 한 수련생이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히이익~ 나, 나무가 걸어 다닌다!”
“대단하다. 그새 꿈까지 꿨니? 일단 등부터 대.”
“아니, 잠깐만. 케마란! 저기, 저기 나무가 움직인다고!”
너무 절절한 표정에 스폴의 수업을 돕고 있던 케마란뿐 아니라 모두의 눈이 저택 너머를 향했지만………………
움직이는 나무는 없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나무는 스폴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너 정말 푹~ 잤구나? 넌 특별히 내가 잠에서 깨워 주겠어.”
쫘아악!
정말이지 때리는 손바닥과 맞는 등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의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드의 수영장 대공사에 괜한 수련생 하나가 스폴에게 찍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