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09화
646화
이드의 생각처럼 페시딘은 벤 자작이 삼검왕의 권위를 무시할 뿐 아니라 아무런 언질이나 허가도 없이 이드를 만났다는 사실에 노여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습적으로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막혀했다.
벤 자작을 앞에 둔 페시딘은 그런 자신의 기분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강자가 기분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공격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벤 자작은 페시딘이 자신을 절대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어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야, 무섭네. 무서워.’
벤 자작은 애써 태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떨리는 무릎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레이트 소드 이상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무기도 내공도 쓰지 않고 오로지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힘이 빠진 무릎도 문제지만 울렁거리기 시작한 속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그나마 레오날도 후작 아래서 일을 하며 단련한 철면(鐵面)이 아니었으면 벌써 육수를 뿜으며 흉한 꼴을 보였을 것이다.
‘그냥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이런데, 진짜 살기 앞에 서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이 당하고 싶지는 않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벤 자작은 새삼 검왕의 무시무시함을 체감하며 입을 열었다.
“명령받은 일을 우선하다 보니 삼검왕께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벤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결례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삼검왕에 대한 예의보다 명령이 먼저라는 뜻이다. 삼검왕을 무시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존재는 황궁뿐이다.
페시딘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대단한 명령을 받았나 보군.”
“면목 없습니다.”
“흥!”
벤 자작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실 페시딘과의 이야기는 이대로 끝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와는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 자작의 생각과 달리 페시딘은 그와 이야기를 끝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들끓던 기세를 잠재우고 입을 열었다.
“그 대단한 명령은 잘 이행했나?”
“덕분에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그것은…….”
“왜, 내게 이야기하기 힘들 만큼 대단한 일인가?”
차갑게 비웃는 페시딘의 말에 벤 자작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대놓고 무시당한 페시딘의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 묻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보다 이번 일을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검왕으로 불리는 이 대단한 인물이 자존심을 굽히고 먼저 물었단 말이지. 허! 대단하군.’
벤자작이 기억하는 검왕 페시딘은 절대 보일 리 없는 반응이었다.
벤 자작은 문득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생으로 있을 당시 페시딘에게 받았던 수업이 기억났다. 수업은 인생과 무공, 전쟁에 관한 것으로, 이야기의 핵심은 기다림의 지혜였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유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인생은 타이밍이다! 정도가 되겠다.
이후 생각해 보면 강자의 입장에 있던 페시딘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 후 소드 팰러스를 떠나 살벌한 중앙 정치에 입문한 애송이 벤 자작에게 그 조언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유리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 따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살아갈 수 있는 약자였으니까.
그런데 기다림의 지혜에 대해서 강조하던 페시딘이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드라는 인물이 주는 압박감이 크다는 뜻이겠지?’
이드와 페시딘의 관계에서 그가 압도적인 강자의 입장이라면 굳이 이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이거, 이드라는 남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어.’
벤 자작은 조금 전 헤어진 이드를 떠올렸다.
보고서를 통해 삼검왕급의 강자라는 사실은 알지만 인지하지 못했다. 강하지만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페시딘의 반응을 보고서야 이드의 대단함이 새삼 실감났다.
‘쯧쯧, 나도 아직 멀었네, 멀었어. 보고서를 보고도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다니.’
벤 자작은 자신의 모자람에 내심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게 꼭 그의 탓은 아니었다. 보고서대로만 보기에는 이드가 젊어도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미 답이 정해진 뻔한 이야기를 길게 끌기 싫은 데다, 일리나가 기다리는 수영장으로 빨리 돌아갈 마음뿐이라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이드의 모습은, 그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뭐, 그것조차 꿰뚫어 볼 혜안(慧眼)을 가지지 못한 것이 모자람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직 결과랄 만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없어 망설였을 뿐입니다.”
벤 자작이 말했다. 더 이상 페시딘의 분노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없었다. 페시딘이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증을 보인 순간, 일의 주도권이 벤 자작에게 넘어온 것이다. 최소한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수일 안에 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훗, 끝까지 나와 해보겠다는 뜻인가.”
언뜻 페시딘의 속마음이 새어 나왔지만 벤 자작은 듣지 못한 척했다. 대신 후작에게 보고하기 위해 머릿속에 꼼꼼히 담아 두었다.
“혹 대답을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알고 싶군. 가능한가.”
“이번 결례도 있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후작이 내게 전하는 것은 없나?”
“……”
“그렇군. 그만 가 봐도 좋네.”
페시딘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끝까지 벤이 가지고 온 전언이 무언지 서로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 두 사람이었다.
벤 자작은 괜히 어물거리다 페시딘의 살벌한 기세에 다시 당할까 서둘러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쉰 그는 멈추지 않고 남은 두 검왕을 찾아갔다.
삼검왕의 실질적인 수장인 페시딘을 만났으니 굳이 다른 검왕을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이드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두 검왕 모두 만날 수 없었다.
워스는 자리를 비워서 만날 수 없었고, 마르텔은 수련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르텔의 경우, 이드와 있었던 대련에 대해 듣고 싶다고 전달했음에도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르텔이 그 대련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드의 실력이 최소 삼검왕과 동급이라는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소드 팰러스에 떠도는 소문은 대부분이 이드에 관한 것이었다.
조금 이상한 것은 가장 중요한 이드에 대한 소문보다 은색 기사단장의 데이트에 대한 소문이 더 많다는 점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 은색 기사단장의 취향이 대머리 마법사라니. 충격이군!”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놀란 벤 자작의 입이 놀라움에 크게 벌어졌다.
“헛소문입니다.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호위를 위해 붙은 기사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젊은 기사인 그에게 쉴라는 우상이었을 테니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하지만 삼검왕에 대한 정보보다 흥미로워 개인적으로 탐구해 보고 싶은 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쉴라 단장의 데이트 상대가 이드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마법사라는 말이지.’
소드 팰러스에서 보기 힘든 가십 수준의 가벼운 소문에 무시하기 힘든 정보들이 숨어 있었다.
‘삼검왕만이 아니라 오색 기사단까지 흔들고 있다는 말인데, 내 생각보다 수완이 대단한 걸까? 무슨 수를 쓴 거지?”
벤 자작은 외부에서 듣는 것보다 소드 팰러스 안에서 이드가 한 일이 많다는 사실을 느꼈다. 동시에 그와 친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저 후작의 말을 전하는 전달자가 아니라 친절한 안내자로 말이다.
삼검왕에게 이만큼 인정받고 견제받을 실력을 지닌 데다, 빈손으로 소드 팰러스에 들어와 집 나갔던 은색 기사단장을 불러들여 옆에 둘 정도로 수완이 좋은 자다. 그런 이라면 수도에 올라온 후에도 큰 힘을 손에 쥘 것이 거의 확실할 테니, 이런 새로운 권력자와는 미리 안면을 익혀 두는 것이 분명 큰 이득이다.
“이거, 오늘 보고할 일들이 한가득하군. 그래도 쉴라 단장의 소문을 같이 곁들이면 좀 편하게 들어 주시겠지?”
벤 자작은 밤에 있을 후작과의 통신을 염두에 두고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쉴라 단장의 데이트에 대한 건부터 보고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모시는 레오날도 후작은 이런 부류의 소문을 은근히 좋아하니까 말이다.
“수일. 수일이란 말이지.”
벤자작을 내보낸 페시딘은 그가 남긴 이드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장이 결코 좋지 않음을 자각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벤 자작을 통해서 말이 전해지도록 했다는 것은 손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뜻일 테지.”
아니다. 바로 따라가면 없어 보일까 봐 즉답을 피했을 뿐이다. 겸사겸사 쉴라와 오색 기사단장들의 회합을 보고 갈 생각이기도 했고,
“좋다, 이놈. 이번엔 내가 져 주도록 하지.”
잠시 이드가 황궁에 붙었을 때 잃어야 할 것들과 자신이 자존심을 굽혔을 때 잃어야 할 것들을 저울질하던 페시딘이 결심한 듯 문 밖의 기사를 불렀다.
“너는 즉시 이드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불러와라.”
“옙!”
“이 초대장을 전하고, 내가 정중히 초대한다고 전해라.”
“예…… 옙!”
페시딘이 대충 휘갈긴 초대장을 받아 든 기사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페시딘 곁에 있으면서 그가 얼마나 이드의 기를 꺾기 위해서 견제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딱히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냉대하고 무시함으로서 상대를 깔아뭉갰다. 당장 지금도 수련생을 제외하고는 이드 옆에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없었다.
기사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페시딘의 명령대로 이드의 저택으로 달렸다.
알려지는 순간 소드 팰러스가 뒤집어질 초대장이 자신의 품에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하지만 그 두근거림도 잠시.
“이드 님께서 중요한 일로 이 초대에는 응할 수 없으니 미안한 마음을 정중히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비실비실 웃으며 초대장을 들고 들어갔던 록이라는 자가 들고 나온 말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잠시만. 지금 아무래도 뭔가 착각한 것 같습니다. 이 초대장을 보낸 분은 페시딘 님이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경에게 그렇게 전해 들었고, 초대장에도 분명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그분의 초대를 거절한다고요?”
“그보다 먼저 하고 있는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시니 어쩌겠습니까.”
“이런 미친.
페시딘의 기사는 분노 이전에 어이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물어 주시오. 이는 페시딘 님의 초대라고 다시 전해 주시오.”
“거참, 거절한다고 해도 그러시는구려.”
록은 못 이긴 척 저택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서는 기사가 주었던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이드 님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기사는 떨리는 손으로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이제 분노도 어이없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페시딘에게 이 초대장을 반환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