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2화
659화
휑한 방에 쇠사슬이 묶인 빛 덩이라니. 수상했다.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수상했다. 들어가서 살펴볼까? 말까?
마법사의 연구실에 있는 물건이라면 아는 것도 조심하고 모르는 건 손도 대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들에게 그러한 상식보다는 라미아에 대한 믿음과 호기심이 더 강했다.
케마란이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허락도 없이 들어가면…………….”
“에이, 허락은 무슨. 지하실도 허락받고 들어온 건 아니잖아. 위험한 물건이면 라미아가 들어오지 못하게 조치해 뒀겠지.”
어쩐지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말 같지만, 그럴듯하게 들렸다. 망설이던 네리베르도 방으로 들어섰다. 라미아의 이름을 앞세운 케마란의 말에 넘어간 것이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간사하다.
막상 들어온 후 살펴본 방은 문밖에서 볼 때보다 더 황량했다. 넓은 데 비해 작은 테이블 하나 놓여 있지 않았다. 더 이상한 건 건물의 벽이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지하실의 벽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돌로 이루어진 벽이었다.
이제 막 지하에 공간을 만들고 정리하지 않은 모습이랄까?
“최근에 만든 공간인가 본데. 이러다 소드 팰러스 지하가 전부 연구실이 되는 거 아냐?”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럴 일도 없겠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더 이상 연구실이 아니다. 지하 도시급의 던전이지. 하지만 자신이 아는 라미아는 그렇게 무절제하게 폭주하는 자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뭐, 그냥 그렇다고. 그런데 이 방은 역시 이 빛 덩이를 어떻게 하려고 만든 것 같지? 이 쇠사슬도 그렇고.”
쩔그럭!
케마란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쇠사슬을 건드렸다.
아아악………… 악……………
순간 그 작은 진동이 큰 고통이 된 것인지 빛 덩이에서 지금까지 들었던 것보다 훨씬 긴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이 씨! 깜짝이야!”
“그러게 함부로 만지면 어떡해요!”
화들짝 놀란 케마란을 보고 네리베르가 타박하고는 사방을 경계했다.
멀뚱히 그 모습을 본 케마란이 말했다.
“뭐해?”
“당신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함정이 발동하지 않을까 해서요.”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라미아가 저택 지하실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해 뒀겠어?”
케마란은 보란 듯이 쇠사슬을 건드렸다. 한 번 놀란 때문인지, 함정이라는 말이 신경 쓰인 탓인지 직접 만지지 않고 링스피어를 이용했다.
쇠사슬이 흔들릴 때마다 빛 덩이에서는 연이어 숨넘어가는 비명이 흘러나온다.
“뭐하는 짓이에요. 당장 멈춰요!”
예상치 못한 난폭한 행동에 네리베르가 발끈 화를 내며 케마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에 케마란이 바로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너무 화내지 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건 아냐. 잘 보면 이 방은 이 빛 덩이를 봉인해 놓은 곳 같단 말이지. 분명 저 빛 덩이. 무슨 악마나 악령 같은 걸 거야. 그게 아니라면 건들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쇠사슬로 묶어 둘 필요가 있겠어? 잘 봐봐. 여기 바닥도 그렇고, 쇠사슬이 걸려 있는 곳에도 그렇고. 자세히 보면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니까.”
그녀의 말처럼 방 안에는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법진들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죄인을 가두고 있는 쇠창살 같았다.
쇠창살에 쇠사슬이라니. 도대체 저 빛 덩이가 뭐길래? 어지간히 위험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감옥에 가둔 죄인에게 쇠사슬까지 묶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네리베르는 이 방을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그만 나가요. 라미아도 지하실에 없는 것 같고. 당신의 말처럼 악마 같은 거라면 위험하니까요.”
“잠깐만. 좀 더 둘러보고, 이런 걸 언제 다시 보겠어? 무엇보다 쇠사슬을 건들기만 해도 고통스러워하잖아. 걱정 없다고.”
“당신은 꼭 위험할 때만 긍정적이죠!”
두 사람은 연신 티격태격하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케마란은 조심성 없이 호기심이 생기는 곳은 만져 보고 두드려 보았고, 네리베르는 옆에서 질색하며 잔소리를 했다.
그녀들이 한 걸음씩 빛 덩이에 가까워질수록 케마란의 거친 손길에 방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이제 모두 살펴봤으니까 그만 나가요.”
빛 덩이를 코앞에 두고 네리베르가 말했다. 사실 쇠사슬과 빛 덩이뿐인 방이라 살펴볼 것도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손을 놀려 빛 덩이를 괴롭힌 케마란이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마치 무엇이든 입에 넣고 보는 갓난아기 같았다.
하지만 케마란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유심히 빛 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경계심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네리베르가 케마란의 뒷덜미를 잡고 말했다.
“당신, 설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걸 만져 볼 생각인 것은 아니겠죠. 경고하는데, 절대 그러지 말아요.”
“설마. 그냥 악마가 어떻게 생겼나 싶어서 들여다본 거야.”
어디에 근거를 둔 자신감인지 그녀는 어느새 빛 덩이를 악마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신기해. 빛 안이 비었어. 반대쪽 쇠사슬과 그 너머 벽이 그냥 보여.”
“퍽이나 신기하네요.”
“그렇잖아. 분명 건드리면 비명을 지르는 걸로 보아 살아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뿔도 없고, 꼬리도 안 보여.”
케마란이 말과 함께 빛 덩이를 감싼 쇠사슬을 툭 건드렸고, 가까이서 들리는 비명에 네리베르가 귀를 막더니 고개를 돌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때는 이때다! 살살 네리베르의 눈치를 살피던 케마란이 분홍색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악동 같은 표정으로 빛 덩이를 쿡! 찔렀다.
쇠사슬만 흔들려도 찢어지는 비명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그보다 격렬한 반응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빛 덩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케마란이 김이 빠진 듯 말했다.
“에이, 별거 없네.”
“앗, 케마란! 내가 그것만큼은 손대지 말라고 했는데!”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네리베르가 불같이 소리를 질렀다.
“너무 소리치지 마. 봐, 아무렇지도 않다고. 비명도 없어. 아무래도 빛 덩이를 묶어 둔 쇠사슬이 특별한 건가 봐.”
“알았으니까 링스피어나 빨리 떼요. 정말. 자신의 무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하하. 그래도 손으로 만져 볼 수는 없잖아………… 어?”
혀를 쏙 빼물고 너스레를 떨던 케마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어색한 미소로 말했다.
“이거………… 안 떨어지는데?”
“농담?”
“진담.”
케마란이 장난이 아니라는 듯 링스피어를 움직이기 위해 힘을 썼지만 팔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네리베르가 번개처럼 링스피어를 붙잡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했죠. 당겨욧!”
“후랴아~!”
잔소리가 따라붙은 신호에 따라 두 아가씨가 힘을 썼다. 생각지 못한 사태에 처음부터 내공까지 동원해서 당겼다. 매일의 열성적인 수련으로 기본적인 근력이 일반 남성보다 좋은 데다 내공까지 더한 두 사람의 힘은 미노타우로스와 줄다리기라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링스피어는 전설 속 바위에 박힌 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
두 사람의 얼굴에 서서히 당혹감이 떠오를 때였다.
“저기! 빛이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네리베르의 말처럼 링스피어가 닿아 있는 빛이 확연히 눈에 들어올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냥 작아지는 게 아니야. 링스피어 안으로 스며들고 있는 거라고! 내 링스피어에서 당장 떨어져, 이 악마야!”
케마란이 조급한 마음에 애원하듯 소리쳤다. 링스피어는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무기였기 때문이다.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이후의 관리까지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링스피어는 그녀의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분신에 악마인지 악령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빛 덩어리가 비집고 들어가고 있으니 애가 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케마란의 마음과 상관없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낸 두 사람의 힘에도 링스피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빛 덩이가 한 조각도 남지 않고 링스피어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빛 덩이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철썩하고 늘어지더니 과자처럼 부서지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흩어졌다.
찌르르릉!
“꺅!”
그와 동시에 여전히 허공에 못 박혀 있던 링스피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더니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튕겨 냈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뱅글뱅글 회전하더니 방의 문을 향해 슉 하고 날아올랐다. 방을 나가서 지하실을 탈출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케마란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대로 두면 빛 덩이를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반신(半身) 같은 링스피어도 도둑맞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도둑놈, 멈춰!”
케마란은 놈인지 년인지 성별 불명의 빛 덩이에 납치되고 있는 링스피어의 날과 연결된 목 부분을 낚아챘다. 그러자 링스피어가 빙글 회전하며 케마란의 손에서 도망가려 했고, 케마란은 그 반동을 이용해서 자루 부분을 다리로 낚아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내공을 더한 힘을 버틴 링스피어의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케마란이 전혀 부담되지 않는 듯 강력한 회전과 급격한 방향 전환을 통해 그녀를 떨쳐 냄과 동시에 공격을 가했다.
급히 몸을 피한 덕분에 옆구리에 긴 자상을 남기는 것으로 끝나긴 했지만 자신의 무기에 부상을 입은 케마란의 마음은 좋지 못했다.
“크윽, 바보 같이 내 무기에 내가 당하다니.”
하지만 그녀에 대한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링스피어에 숨어든 빛 덩이, 코어는 곧장 문으로 향하지 않고 다시 케마란을 공격했다. 그녀가 쇠사슬을 흔들어 자신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미미한 에고를 가지고 주인을 알아보던 코어는 정보를 캐내려는 라미아의 노력에 의해서 자아를 각성한 후 케마란의 손에 의해 분노라는 감정을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케마란은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본래라면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 않겠지만,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공격 방법만을 익힌 그녀는 무기 홀로 공격하는 지금의 사태를 막아 낼 적당한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없이 뒤로 밀려가던 케마란이 급격한 회피 동작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링스피어는 그 모습이 보이는지 허공중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창대를 뒤틀어 케마란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번뜩이는 날이 케마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기 직전.
쩌엉!
케마란의 시야 한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이 링스피어를 튕겨 냈다.
동시에 검의 주인인 네리베르가 케마란 앞으로 막아섰다.
“괜찮아요?”
“죽지는 않은 것 같아. 덕분에 살았어.”
“제발 부탁이니까 생각을 하고 행동해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멋대로 뛰어나가면 어떻게 해요.”
“하하. 지금부터 맡길 테니까 잘 부탁해. 꼭 내 링스피어를 되찾아 줘.”
네리베르는 등 뒤에서 들린 케마란의 말에 번뜩이며 달려든 링스피어를 쳐 내며 말했다.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최선을 다해 보죠. 하앗!”
쩌렁!
힘찬 기합과 함께 날아든 링스피어를 쳐 낸 네리베르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고요한 마음으로 링스피어와의 공방을 이어 갔다.
케마란이 자신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 이를 악물고 더욱 열심히 무공에 전념했다.
다행히도 배움을 원하는 그녀를 지도해 줄 사람은 주변에 넉넉한 상황이었다. 올바른 가르침과 노력이 만나 빠르지는 않지만 꾸준히 그녀의 실력은 늘어 갔다.
네리베르는 링스피어를 상대로 그렇게 성장한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뿜어냈다.
특히 날카롭고 빠르고 힘 있기는 하지만 상대할 만한 상대였다. 링스피어를 움직이는 빛 덩이가 창술은 전혀 알지 못하는 듯 무조건적인 베기와 돌격만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손인 케마란이야 그런 직선적인 움직임으로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검을 든 네리베르는 그런 얕은 공격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링스피어도 곧 그런 사실을 깨달은 듯 방문을 향해 도망가기 위해 틈을 보기 시작했지만, 그런 노림수를 잃은 네리베르에 의해 철저히 막혀 버렸다. 그러나 전혀 지치지 않는, 더구나 무기의 사용자도 없는 링스피어를 제압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검과 링스피어가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옷을 찢어 상처를 막은 케마란이 쭈그려 앉아 고양이처럼 눈을 번뜩이더니 네리베르와 링스피어가 부딪히는 순간 폴짝 뛰어올라
링스피어의 자루 끝. 창준 부분을 붙잡고 매달리며 소리쳤다.
“그대로 내리쳐!”
네리베르는 갑작스런 케마란의 참전과 함께 링스피어가 휘청하고 기울어지며 균형을 잃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분분히 흩날리는 검기가 깃든 검으로 링스피어의 창날을 두드려 땅바닥으로 박아 넣었다.
콰드드득!
강력한 검기의 충격 때문인지 링스피어는 양쪽에서 누르는 두 사람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들썩이다가 얌전해졌다.
“휴, 이제…… 잡은 건가?”
그 모습에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국!
완만하게 휘어져 있던 링스피어의 날이 땅속을 파고들어 한 바퀴 돌아 나오며 검기를 세우고 있는 네리베르의 팔을 베어 갔다.
링스피어를 제압하기 위해 이 위치를 고집하다가는 팔 하나가 날아갈 상황.
‘하지만 피하면 링스피어를 놓치고, 최악의 경우 케마란 양과 나 둘 중 하나가 죽을지 몰라요.’
계산을 마친 네리베르는 다가올 고통을 각오하고 이를 악물었다.
“바보야, 피해!”
걱정을 가득 담은 케마란의 다급한 고함이 터졌다. 그리고 고함은 곧 허탈한 바람 빠지는 소리로 바뀌었다.
턱!
창날과 네리베르의 팔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신발이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간단하게 링스피어의 날을 제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를 따라 두 사람에게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