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273화


710화

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목소리와 화려한 금발은 분명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저, 저분…… 라울 님 아닙니까? 라울 님이 왜 저기에…….”

칸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발터를 바라보았지만, 그라고 라울의 속을 아는 건 아니었다.

“나라고 저놈의 속을 알겠나, 젠장.”

발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그런 그의 눈은 라울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에도 라울을 바라보는 눈은 많았다. 정확히는 이드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집단을 향한 눈이다. 그곳이 이 파티의 중심이었으니까. 심지어 춤을 다 추고 자리로 돌아간 황제까지 턱을 괴고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벤텀 백작은 속이 탔다. 가문의 무공이라고 못 박아 두는 이드의 발언이 이그렌에게 가르치는 무공을 일리나스 왕국에 넘기지 않겠다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왕국에는 이미 이드와 시온 자작가의 후손에 대한 일을 보고해 둔 뒤였다. 당연히 왕국에서는 이그렌이 배울 무공을 원했고,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드의 반응을 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아니, 도리어 반감을 품은 듯 보였다.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 벤텀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 그런 문제라면 이미 왕국에 연락했습니다. 그때는 왕국은 물론, 시온 자작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일이니까요.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이그렌 경이 무공을 익힌다면 명예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렴 그렇지요. 그러나 왕국에 서로 간의 오해로 남겨진 무공도 올바르게 고쳐야 시온 자작가의 불명예가 온전히 회복되지 않겠습니까?”

왕국의 백작씩이나 되는 자신이 많은 사람 앞에서 애걸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벤텀 백작에게는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일리나스 왕국에 세워질 제2의 소드 팰러스를 꿈꾸고 있었다. 그 업적에 자신도 손을 보태고 싶었다. 제국이 검후의 무공을 기초로 소드 팰러스를 쌓아 올린 것처럼, 일리나스도 온전한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얻게 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 제국이 생각하는 소드 팰러스의 위치가 어떠한가.

‘단순히 제국뿐 아니지. 전 대륙에 걸친 위세가 어지간한 왕국 못지않아. 나라고 삼검왕과 같은 위치에 오르지 말라는 법은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기회는 잡는다.’

이드는 벤텀 백작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욕망을 보았다.

‘쯧쯧, 사무엘이고 이자고 어떻게 일리나스 왕국의 백작은 하나같이 이러나 몰라.’

말하는 것은 왕국을 위해 체면도 던져 버린 충신인데, 그 알맹이는 전혀 달랐다.

“글쎄, 어떨까요. 꼭 이그렌 경과 왕국 사이에 남은 오해라는 벽을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마인드 마스터가 초대 자작에게 전한 무공을 오해라고 표현한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순간 벤텀 백작은 자신이 치명적인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이드는 급히 제 말을 수습하려는 벤텀 백작의 말을 끊었다.

“아, 됐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하도록 하지요. 이 파티가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도 아니고, 무엇보다 백작님 말고도 인사해야 할 분이 많습니다.”

과연 이드의 말대로 벤텀 백작의 뒤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금발의 남자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이드의 시선을 받자 벤텀 백작을 어깨로 치며 앞으로 나섰다.

“어? 어!”

엉거주춤 힘없이 밀려난 벤텀 백작이 당혹스런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흥미롭게 일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순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해한 벤텀 백작은 수치심에 이를 갈며 자신을 밀어낸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익! 이자가!”

“음? 후작님과의 이야기는 끝난 것 같았는데, 혹 남은 말씀이라도?”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벤텀 백작은 말이 막혔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긴 했지만, 제국의 황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파티를 망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이드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었다.

벤텀 백작은 눈앞의 사내에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냉정히 상황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한 발 물러섰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다. 일단 이그렌 경을 따로 불러 후작과의 오해를 풀자. 당장 후작의 마음을 돌리려 하다가는 오히려 반감을 살 수가 있다. 그나저나 도대체 사무엘 백작은 그간 저런 오해도 풀지 않고 뭘 했단 말인가!’

벤텀 백작은 이그렌을 이드에게 접근시킨 지분을 요구하던 사무엘을 떠올리고 짜증을 냈다. 자신의 망신에 대한 책임을, 미리 이드와 오해를 풀어 두지 않은 사무엘에게 돌린 것이다.

이제는 말이 궁하던 차에 금발의 남자가 잘 나서 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이드 앞에 선 남자가 이드를 향해 말했다.

“대륙에 그 이름도 유명하신 이드 후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겠습니다. 라울이라고 합니다.”

‘라울 자작이라・・・・・・ 내 기억해 두지. 오늘의 은혜는 철저하게 갚아 주마.’

자신을 어깨로 밀어낸 무뢰한의 이름을 머리에 새긴 벤텀 백작의 눈에 난잡한 살기가 번뜩였다.

라울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어설픈 살기를 비치는 그의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발터와 칸이 혀를 찼다.

‘쯧쯧쯧, 멍청한 놈. 상대도 살피지 않고 살기라니. 제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순간 두 사람의 생각이 하나로 일치했다. 하지만 벤텀 백작에 대한 생각은 잠깐이었다. 라울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벤텀 백작에 대한 것은 머리에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잘 부탁드리오, 라울 자작.”

“듣기 황공한 말씀입니다, 후작님. 악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이드는 웃는 얼굴로 손을 내미는 라울의 손을 반사적으로 잡았다.

지이잉.

순간 이드는 자신 안에 깊이 잠들어 있던 초인의 씨앗이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근골에 스민 후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인 적 없던 놈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손에서 씨앗의 움직임에 화답하듯 작게 꿈틀거리는 초인력이 느껴졌다. 안과 밖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초인력은 이드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잠에서 깼나 싶던 씨앗은 다시 있는 듯 없는 듯 얌전해졌다. 다만, 씨앗에 반응한 라울의 초인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것 봐라? 렉터 이상의 초인력이잖아. 이자는 누구지?’

이드는 이미 잠든 씨앗에 신경을 끄고 라울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상대는 내공을 움직이는 것처럼 초인력을 잘 감춰 두고 있었다. 그러나 라울을 향해 한 번 열린 기감에는 여전히 거대한 초인력이 감지되었다.

라울의 초인력을 느낀 이드와 달리 상대는 이드 안에 잠들어 있는 초인의 씨앗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매우 뛰어난 분인 듯한데, 제국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오만?”

“하하하, 그리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저 시골 자작일 뿐입니다. 마침 이드 님의 소문을 듣고 뵙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라울이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렇소?”

“네. 무엇보다 후작님께서 초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쁘던지요. 이건 정말 모든 초인의 복이지 않겠습니까.”

마치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하는 말에 이드의 눈꼬리가 상큼 치켜 올라갔다. 그의 말에서 악의에 가까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오호라, 무슨 꿍꿍인지는 몰라도 좋은 의도로 접근한 건 아니란 말이렷다.’

이드는 손을 놓은 후 흐려진 기감을 쫓아 무극신기를 풀어 냈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는데, 망설일 필요가 있나. 적이라면 하나라도 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리 말하는 것을 보면 자작은 초인인 듯한데, 헛소문을 들었군. 난 초인이 아니오.”

초인의 씨앗이 싹을 틔우면 몰라도.

내심 말을 더한 이드의 무극신기가 낮도깨비처럼 라울의 심령을 압박하며 초인력을 자극했다.

‘이런! 듣던 것과・・・・・・ 다르잖아!’

이드의 성격이 따뜻하고 참을성 있으며 온건하다고 보고받았는데, 그 보고를 믿고 슬쩍 찌르기 무섭게 격렬한 반응이 튀어나올 줄이야! 라울은 돌아가는 즉시 보고자의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을 결심하며 초인력으로 단단히 벽을 쌓아 무극신기를 막았다. 대대적인 공격이 아니고서야 공성보다는 수성이 쉬운 법이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름 아닌 게일 경의 말이 아니겠습니까. 혹, 무공보다 강력한 초인기를 가져 그러신 거라면 전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초인기도 무공도 자신의 힘. 후작께서 검왕을 꺾고 사검왕이란 명성을 얻으신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후작께서 초인기가 무공보다 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쁩니다.”

이드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무극신기의 압박 속에서 힘겹게 쏟아 낸 말은 완전히 억지였다. 일의 당사자가 아니라는데, 게일의 말을 앞세워 진실로 몰아간다.

“과연 자작이 내 말을 온전히 듣고 있는지 의심스럽구려.”

쿠르르릉!

순간 주인의 짜증에 바짝 조여든 무극신기의 힘에 초인력으로 단단히 쌓아 올린 벽이 일부 무너져 내렸다.

라울은 새파래진 얼굴로 울렁이는 속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최대한 빠르게 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물러나야 함을 알았다.

“큽, 제가 후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게일 경의 말이 워낙 단호하여, 무공의 주인인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기사가 아니라 초인라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초인이 초인을 위한 무공을 만든다면…….”

라울은 말과 함께 파티장의 한쪽을 힐끗거렸다.

‘이 정도 말을 들었으면 나올 때가 됐다. 그만 참고 나와라, 이놈아!’

그리고 그 순간, 라울이 애타게 부르던 자가 한껏 미간을 모으고 나타났다.

“흥,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에 초인 따위를 가져다 붙이다니요. 저 멍청한 오크도 비웃을 겁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짧게 자른 검은 머리에, 남들보다 상체가 하나 더 붙은 듯한 거한이었다.

갑자기 앞으로 나선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순간, 라울의 눈꼬리가 안도와 만족감에 반달을 그리며 휘어졌다.

“저자는 황색 갈기 기사단의 상급 기사가 아니오?”

“엘론드 경이오. 참고로 황색 갈기 기사단 중에서도 극도로 초인을 싫어하는 자로 유명하지.”

귀족들 중 거한의 정체를 알아본 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파티처럼 중요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는 행사 때는 대부분의 기사가 황궁과 수도 안티로스의 경비 임무에 나서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 사고라도 있어 봐라. 제국이 휘청거릴 것이 아닌가. 파티장만 제압하면 제국의 수뇌가 한 번에 날아가니까.

그때 무언가를 찾아 바쁘게 주변을 돌아보던 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역시나 엘로드 백작이 보이지 않는군. 엘론드 경이 백작을 대신해 파티에 나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백작이 실수한 것 같군.”

그 사이 라울을 노려보며 다가선 엘론드가 이드를 노려보며 선언하듯 외쳤다.

“황제 폐하께서 임명하신 후작님을 뵙습니다. 그러나 초인 따위가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을 이었다는 사실은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저………….”

마치 이드를 향해 싸움을 거는 듯 건방진 발언에 사람들은 어이없어 엘론드를 손가락질했다. 그 사이 라울은 실실 웃으며 엘론드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