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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74화


711화

[이드, 저 인간 슬쩍 빠지는데요?]

이드 또한 라울을 시야에 두고 있었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과 남의 속을 뒤집어 놓고 저만 스리슬쩍 빠지는 모습이라니.

이드는 소동을 일으키고 제 혼자 빠지는 괘씸한 놈을 부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엘론드를 나무라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버렸다. 

“엘론드!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엘론드의 등을 치며 나선 그는 머리가 엘론드의 명치까지밖에 닿지 않는 왜소한 중년이었다. 키만 되었다면 등이 아니라 엘론드의 뒤통수를 때렸을 것 같은 살벌한 표정이었다. 엘론드가 남자에게 아는 척했다.

“숙부님.”

과연 거침없이 상급 기사의 등을 때릴 만한 관계라고 생각할 때, 숙부라는 남자가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론드 경의 숙부, 엘코란 자작입니다. 엘론드 경이 아직 제대로 말을 가리지 못해 후작님과 여러 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 숙부. 말을 못 가리다니요. 제가 무슨 갓난쟁이인 줄 아십니까?”

엘론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퉁한 얼굴을 하고서 불만을 토했다. 스스로 아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이 숙부에게 투정을 부리는 어린 조카였다.

“그럼 아니냐? 황제 폐하께서 개최한 축하 파티에서 무슨 소란이냔 말이다.”

“아니,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기사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마인드 마스터, 그의 후예가 나타나 검왕을 꺾으며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각성한 초인기 때문이라니요. 그건 거짓말이잖습니까. 평생 무공을 수련한 기사를 우롱하는 일이란 말입니다!”

어지간히도 초인이 싫고, 이드가 초인이라는 소문이 싫은가 보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엘론드의 눈은 반쯤 돌아가 있었다. 황제가 내린 명예 후작의 작위에 대한 예우조차 어디론가 던져 버린 모습이다.

조카를 말리기 위해 나섰던 엘코란 자작은 진정은커녕 더욱 흥분하는 엘론드의 모습에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강제로라도 입을 막고 싶지만 손이 닿지 않을뿐더러 힘도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백작 형님은 어디서 무얼 하고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대신 보냈단 말인가!’

엘코란은 조카를 대신 보낸 백작이 지금만큼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수많은 귀족과 황제 앞에서 흉한 모습을 보였으니, 가문의 망신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새 후작이자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무자비하게 깎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잘 보여 가문의 무공에 보탬이 될 구절을 얻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일인지.

큰 고목에 매달린 매미처럼 대롱거리는 자신의 처지에 엘코란은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엘론드는 그런 숙부의 마음도 모르고 이드를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님께서 제 무례를 허락하신다면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제 할 말을 다 하고는 이제 와서 허락이라니? 이드는 거칠 것 없이 막무가내로 구는 엘론드의 태도에 어이없어하며 허락했다. 

“뭘 이제 와서.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물어보시오.”

“허락하셨으니 묻겠습니다. 초인으로서 제국 기사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자처하시는 것이 자랑스러우십니까?”

엘코란은 조카의 얼굴에 흘러넘치는 진심을 보며 힘없이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으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가문과 이드 후작의 관계는 이걸로 끝이구나.”

한편, 밖으로 나온 라울은 흐르는 식은땀을 말리기 위해 옷자락을 잡고 팔락거렸다.

“후유~ 겨우 빠져나왔네.”

“발발거리는 꼴이 마치 쥐새끼 같더군.”

발터가 사람들 눈을 피해 빙빙 돌아온 라울의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너무 그러지 마라. 유명인 얼굴 한번 가까이서 보려다가 나도 식겁했으니까.”

“무슨 말이냐?”

“뭐냐, 아이언 마스크, 설마 너도 이드가 날 압박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거냐?”

라울의 말에 발터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라울과 이드의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지만, 그는 이상한 점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공격할 수단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발터가 이드를 돌아본 후 말했다. 

“우리 예상보다 재주가 많은 자로군.”

“재주가 문제가 아니야. 성격이 자료와 달라. 내가 자신을 이용한다 싶은 순간 망설이지 않고 즉시 날 압박했어. 생각보다 과격하고 즉흥적인 구석이 있어. 온건하다는 평도 가짜일지 몰라. 저 덩치가 늦지 않게 나서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곤란할 뻔했어.”

라울이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발터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벼운 언행을 보이는 라울이지만, 필요하다면 태연하게 바닥을 길 수 있는 것이 라울이니까.

그 자리에서 곤란을 당하면 당하는 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발터가 침묵하는 사이 칸이 나서서 물었다.

“그럼 엘론드 경이 나선 것도 라울 님이 준비하신 겁니까?”

“내가 저 덩치를? 전혀.”

“하지만 엘론드 경이 나설 걸 알고 일을 키우신 게 아니었습니까? 전 그렇게 보았는데요.”

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울이 음흉하게 웃으며 답했다.

“덩치가 나설 건 알았지. 하지만 저 멍청한 덩치를 움직이는 데 준비까지 할 필요가 있나. 저 덩치나 귀족들 성격 정도는 기본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설마 이 자리에 있는, 이 많은 귀족들의 성격을 다 말입니까?”

“흐흐.”

웃음으로 넘기는 라울을 보며 칸은 질린 듯 혀를 내둘렀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꿰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능력을 인정받으니까 기쁜걸.”

라울은 좋은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상사의 칭찬이든 부하의 칭찬이든 능력을 인정하는 말은 언제든 듣기 좋은 법이다.

그는 본래 이런 칭찬을 듣기 좋아하는 인물이지만, 그 탁월한 능력이 모두에게 인정받은 후에는 오히려 그를 칭찬하는 소리가 줄어 버렸다. 이미 검증된 능력을 다시 칭찬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다 큰 남자가 히죽거리는 모습이 흉하다는 듯 보던 발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왔으면 조용히 보고 갈 것이지, 이게 무슨 짓인가?”

“이 정도면 조용한 거 아닌가? 서로 얼굴도 기억에 남고.”

뒤에서 일을 지휘해야 할 인간이 적의 기억 속에 얼굴을 남겨서 어쩌려고? 애써 한숨을 참은 발터가 달라붙는 숙부를 떼어내는 엘론드를 보며 말했다.

“저 날뛰는 놈을 보고 조용하다는 말이 나오나? 우리가 게일의 계획을 망친 걸 알면 인테그란 후작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끌끌, 그딴 게 무슨 계획이야? 질투에 불타는 애송이 기사의 희망 사항을 계획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 거기다 초인인지 기사인지 제 정체성도 똑바로 세우지 못하는 후작이 좋아하지 않으면 또 어쩔 건데?”

라울의 번들거리는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눈빛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자를 향한 것. 그 눈을 마주한 발터는 덤덤하게 말했다. 

“어쩔 건 없지. 하지만 후작의 요청은 네가 수락한 일이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봐. 저 덩치는 내가 준비한 말이 아니야. 내가 일을 꾸민 게 아니란 말이지. 난 그저 누가 굴리려고 벼랑 끝에 세워 둔 돌을 슬쩍 밀었을 뿐이야.”

발터는 턱을 쓸었다. 라울이 고작 이런 일을 가지고 거짓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레오날도 후작인가?”

“아마도? 쓸데없는 소문을 가장 빨리 처리하고 싶은 사람 중 하나잖아.”

‘아마도’라는 말이 붙었을 뿐 확신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큰 파티에 아들을 보내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마침 그들이 이야기 중인 그 레오날도 후작은 황제 옆에 있었다. 소동의 중심지를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해결하겠다는 게 오늘까지였지. 자네 작품인가?”

“그렇습니다. 저 일만 마무리되면 소문이 잡힐 것입니다.”

“흐음…….”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벌어지는 판에 레오날도 후작이 무슨 일을 꾸민 것인지는 파악이 되었다. 하지만 엘론드 정도로 일이 마무리될 수 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황제의 속을 짐작한 듯 레오날도 후작이 추가 설명을 더했다.

“이드 후작에 대해서 이야기만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엘론드 상급 기사를 꺾어 주는 모습만 보여도 충분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말로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니까요. 무엇보다 오늘 파티에는 실력자들도 제법 참석했습니다. 그들이 알아서 이드 후작의 실력을 증명해 줄 겁니다.”

“훗, 기대하지. 아, 그런데 엘론드 백작은 어디로 빼돌린 건가?”

“최근에 공을 쏟고 있는 마담이 있다고 들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흐흐흐, 역시 열정적인 남자로군, 백작은.”

황제가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백작의 결석이 다른 중요한 일 때문이었다면 절대 웃어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여자 때문에 중요한 자리를 아들에게 미루는 자다. 그런 자를 어떻게 믿고 함께 일을 하겠는가.

“따로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레오날도 후작은 그런 부분도 빠트리지 않고 챙겼다. 그는 황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드와 마주 선 엘론드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속은 편치 않았다.

그가 꾸민 일에 따르면 엘론드가 나서는 것은 파티가 무르익은 후여야 했고, 엘론드를 도발하는 것도 그가 준비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에 의해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틀간 엘론드의 생각을 유도하며 준비한 것이 엉망이 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준비한 일이 온전히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라울이라는 자의 행동도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황제와 공후를 비롯한 거대 귀족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자작 따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아무리 기사들의 우상인 후작이 초인이길 바라는 마음이 커 판단력을 흐렸다고 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가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물론 일이 커진 것이 두려워 도망을 갔을 수도 있지만…….. 레오날도 후작은 탐색하듯 파티장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초인기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라울을 찾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알아봐야겠군.’

별거 아니라며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레오날도 후작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엘론드는 레오날도 후작이 미리 안배해 놓은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본대로 연기하는 배우도 아니고, 미리 지시해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가 싶기도 한 부분이지만 의외로 간단한 일이기도 하다.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듯, 미리 결론을 만들어 머릿속에 박아 두면 된다. 어지간히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사람은 그 결론을 향해 달려가게 되어 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이 바로 진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고,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엘론드와 같이 고집스럽고,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했다.

덕분에 이드도 골치가 아팠다. 이건 뭐 말이 통해야 대화라는 것을 하지, 이미 결과를 정해 놓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으니 진전이 없었다. 엘론드의 억지를 들어 줄 만큼 들어 주었다고 생각한 이드가 말했다.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 끝내야겠소.”

“이런 중요한 일을 이대로 끝내다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엘론드 경, 아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행동은 상당히 무례했고, 나는 그것을 제법 참아 주었소. 그러나 나도 이 이상은 참을 생각이 없소.’

이드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자 입술을 꾹 다물던 엘론드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후작께서 저와 겨루어 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초인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가 믿어드리겠습니다.”

엘론드의 무모한 행동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 그 중 유일하게 엘론드의 숙부인 엘코란만은 절망에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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