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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96화


733화

이드는 부상자들을 네리베르와 케마란에게 맡기고 일리나의 방으로 돌아왔다. 긴급 상황에 쓸 포션을 한가득 안겨 주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드와 마주 앉은 일리나가 그를 요모조모 살피더니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루젼으로 바꾼 모습이 아니라 이드의 본모습으로 네리베르가 입었던 그런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크크크큭!]

네리베르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던 자신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일리나였다. 아, 도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이드는 탁자 위에서 배를 잡고 낄낄거리는 라미아를 쏘아본 후 적극 해명에 나섰다.

“내가 그 모습을 하고 있던 건 내가 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지, 절대 다른 이상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하지만 정말 이드에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끄응!”

정말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심 가득한 말에 이드는 이마를 짚었다.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은 고맙지만, 이후에 여성용 기사복을 준비해서 입어 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런 이드의 모습에 일리나가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드가 바로 달려와 줘서 정말 고맙고 기뻤어요.”

당연히 달려와야 하는 일인데도 이렇게 예쁘게 말해 주면 참 기분이 좋다. 이드는 기사복에 대한 걱정을 휙 날려 버리며 대답했다.

“이럴 때를 위해서 저 거울을 여기 둔 거잖아요. 일리나를 자주 보고 위험에 대비하려고 설치했는데, 이럴 때 쓰지 않으면 언제 쓰겠어요.” 하하호호.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는 말이 오고 갔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주 앉았던 두 사람이 어느새 나란히 붙어 있다.

‘뭐, 오랜만이니까.’

라미아는 그 모습을 너그럽게 허락해 주었다. 요 며칠 이드를 독점한 덕분이었다. 또 이드 옆에 인간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방법을 이번에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화원의 정문을 통해 일단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마법사와 신관을 포함한 황색 기사단이 바로 그들이었다.

엉망으로 변한 화원의 꽃밭에 잠시 아연한 표정을 하던 그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일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우선 부상당한 동료 기사들을 돌보고 적과 아군의 시신을 분류했다. 담담히 움직이는 기사들이었지만, 친한 동료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잔뜩 굳은 얼굴로 노려보던 빌런이 스위트를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쉴라 경이 큰소리 떵떵 칠 때부터 알아봤어. 그렇게 자신하더니 이 한심한 꼴은 뭐야! 화려하던 화원의 꽃은 어쩌고, 죽어 나간 기사들은 또 어쩔 거냐고!”

“……”

스위트는 그 앞에서 입을 꼬옥 다물었다.

사실 빌런의 행동이 바른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타 기사단의 상급 기사를 어린아이 야단치듯 혼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기사단에서 파견한 기사들을 포함한 희생자가 나왔다면 응당 그들부터 살피는 것이 먼저인데, 남 탓부터 하는 모습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황색 기사단장을 상대로 뭐라 할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스위트 경이라고 했던가? 화원의 책임자가?”

“네. 그렇습니다.”

“쯧쯧, 역시 여자들만 있는 은색 기사단에 일을 맡긴 게 잘못이야. 도대체 얼마나 통솔이 엉망이면 이 꼴이 나느냔 말이야.”

빠직!

묵묵히 빌런의 빈정거림을 참고 있던 스위트의 눈꼬리가 예사롭지 않게 떨렸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지만 은색 기사단 전체를 깎아내리는 발언은 참을 수 없었다.

“저도…….”

“뭐?”

“이렇게 많은 적이 기습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소드 팰러스를 지키는 기사들의 눈을 속이고 이백에 가까운 침입자가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녀는 에둘러 경비를 서며 일차적으로 적을 거르지 못한 기사들의 무능을 탓했다. 그 질문 앞에서는 황색 기사단도 당당할 수가 없었다.

은, 적, 흑의 삼색 기사단이 자리를 비운 지금 소드 팰러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황과 청의 기사단이기 때문이었다. 그중 오늘 밤의 경비는 청색 기사단의 임무. 이제는 스위트를 탓하는 것이 청색 기사단을 향한 비난과 같아져 버렸다.

“……크흐흠..”

그것을 깨달은 빌런이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로서는 눈에 거슬리는 은색 기사단은 몰라도 한 식구인 청색 기사단을 탓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궁해진 빌런은 괜히 잘하고 있는 기사들을 닦달하며 소리쳤다.

“어서어서 움직이지 못해! 동료들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라미아는 바쁘게 뒷정리를 하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괜히 꽥꽥 소리를 지르는 빌런을 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싸늘하게 말했다.

[흥, 이제야 지원을 해 줄 맘이 생겼나 보네요. 하기야 이렇게 대대적으로 일을 벌였는데, 무시할 수 없겠죠.]

“도망간 자들은 잘 빠져나갈까요?”

일리나가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습격자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빠져나가야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들에 대한 추적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검은 구름이 없었더라도 추적을 위해서 일부러 몇은 놓쳐 줄 계획이었다. 화원을 지키는 전력을 알더라도 은밀하게 침입할 거라고 예상했지, 설마 이렇게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습격자들이 생포되어 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어련히 길을 열어 주겠지요.”

이드는 아주 대대적으로 적의 침입을 허락했을 것이 분명한 삼검왕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잡히는 자가 생기더라도 스키퍼라는 자는 확실히 빠져나갈 수 있겠죠. 그가 가지고 있던 초인기라면 성벽을 통과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이드의 말에 스키퍼의 능력을 떠올린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들이 돌아가는 곳을 조사하는 일만 남은 거네요.’

“그게 원래 계획이긴 한데, 조금 달라질 것 같아요.”

“어째서요?”

미리 세워 둔 계획을 변경한다는 말에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드는 그녀에게 파티장에서 만난 라울에 대한 이야기와 라미아가 도청한 내용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무래도 아래쪽에서 찾아 올라오는 것보다는 이쪽이 좀 더 빠를 것 같아요. 라울에 대해서는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어 있지만, 공식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발터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조사해 볼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도 시르피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구멍을 파는 것보다는, 머리에 가까운 발터를 파 보는 것이 무언가 나올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이다. 

“일단 에단이 추적하고 있는 라인도 있으니 어디서건 쓸 만한 정보가 나와도 나오지 않겠어요?”

[적당한 정보가 나오지 않을 땐요?]

“그땐 발터라는 놈의 몸에 직접 물어야지. 마침 미완의 마탑 토벌이라는 좋은 소재도 있겠다. 그 싸움 중에 적당히 빼돌려서 실종시켜 버리면 아무도 모를 거야.”

실로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계획을 꾸미는 이드였다. 제국의 초인기사단장의 납치라니. 누군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말이었지만, 일리나와 라미아는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세 사람에게 있어 발터는 기사단장이 아니라 악독한 부녀자 납치범일 뿐이었으니까.

이드는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 청색 기사단이 자해에 사용한 단검을 꺼내 일리나의 탁자 앞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이 단검은 따로 챙겨 두었다가 밖에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스위트 경에게 전해 주세요. 손잡이 쪽은 절대 만지지 말고요.”

“이 단검은 어째서요?”

“짐작대로 청색 기사단에 배신자가 있더라고요. 이쪽이 질 것 같았는지 이 칼로 스스로를 찔렀는데, 덕분에 여기에 지문이 남았죠.”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저 그게 뭔지 알아요. 라미아가 보여 준 영화에서 봤어요.”

[이럴 경우를 위한 선견지명이었죠.]

얼토당토않은 끼워 맞추기를 비웃어 준 이드가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쉽죠. 일단 이건 자해의 증거에요. 그리고 라미아 말로는 이 기사가 화원의 사일런스 마법을 발동시킨 자일 가능성이 높다네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쪽에서도 해당 기사의 지문이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배신자라는 완벽한 증거가 되겠네요.”

“그렇죠. 지금까지 없던 지문이라는 증거가 바로 인정되진 않겠지만, 마법사들이 나서면 지문의 증거 능력 정도는 금방 확인해 줄 수 있을 거예요.” 

[마법까지 동원하면 아마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고 장담해요.]

아마 호기심 덩어리인 마법사들이라면 따로 의뢰를 하지 않아도 서로 달려들어 지문에 대해서 파헤칠 것이 분명했다.

무공과 마찬가지로 이드에 의해 이후 그레센 대륙의 범죄 수사에 있어서 중요하게 사용될 지문이라는 요소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소드 팰러스가 자랑하는 오색 기사단 중 청색 기사단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절대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을 거예요. 당장 파견 기사들 중 사망자가 한둘이 아니니까 삼검왕이 나서도 수습하긴 힘들걸요?”

수습이 뭔가.

삼검왕이라면 가장 앞장서서 배신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해야 할 입장이 될 것이다.

어쩌면 배신했던 기사는 동료들의 분노와 멸시, 그리고 충성했던 삼검왕이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이야기다.

배신자에 대한 조사는 명목상 삼검왕의 이름으로 하게 될 테니까.

어쩌면 배신한 기사를 죽여 버리고 며칠 지나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해 버렸다고 발표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기지 못하도록 클라인이 나서긴 하겠지만, 그렇게 죽어 버려도 크게 상관이 없다. 배신자를 잡아낸 것은 과외의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 있어도, 죽어 있어도 그가 있었다는 존재 자체로 이드들에게 이득이다.

무엇보다 오색 기사단, 그중 청색 기사단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사건이기도 하니까.

이후 검후에 대한 배신 혐의로 그들을 지목하는 일이 있어도 무조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

이후 몇 가지 당부를 더한 이드는 일리나의 방으로 가까워지는 기척들에 아쉬워하며 짧은 입맞춤을 하고 거울을 통해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 시각 페시딘 역시 창밖을 내려다보며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드득! 이 근본 없는 것들이 내 그렇게 경고했거늘 감히 내 말을 무시했단 말이냐!”

그는 화원을 중심으로 퍼지는 독 안개와 혼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허락한 작전에는 이런 혼란과 인명 피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검후가 사라지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소드 팰러스를 함부로 굴릴 생각이 없었다.

푸스스슥-

분노에 찬 그의 손 아래 돌로 된 난간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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