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98화
735화
황녀가 채우고 있던 이드의 옆자리만 차지할 수 있다면 이드를 끌어안은 황제가 부럽지 않을 것이다. 딸과 조카를 가진 귀족들은 명예 후작이 자신을 장인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히죽이 웃었다.
만약 라미아가 알았다가는 앞세운 딸과 함께 머리 위로 헬파이어를 뒤집어쓸 위험한 상상이 아닐 수 없었다. 존재감은 얕지만 일리나도 그 옆에서 티 나지 않게 라미아를 응원하고 있을 것은 당연!
“그런데 결혼식이라고 올까요?”
보통 원수지간이거나 눈에도 띄지 않는 하위 귀족의 결혼식이 아닌 이상에야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드의 경우는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작위를 받은 뒤 방문자도 받지 않고, 저택에서 두문불출로 그와의 만남을 바라는 귀족들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지 않은가.
‘아니, 지가 황녀야, 공주야? 왜 우리가 처녀 손수건 바라보는 기사처럼 문만 열어 주길 기다려야 하냐고!’
몇 명의 귀족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백작이 고상하게 찻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명예 후작도 특별한 사람이 전해 주는 초대장이라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오.”
“특별한 사람이요?”
“아끼는 제자의 가족 말이오. 명예 후작이 소드 팰러스에 두고 온 제자의 아버지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
있다. 거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
노백작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인물.
‘후유~ 하나뿐인 딸을 위해 조용히 있으려니 그것도 쉽지 않구나.’
네리베르의 아버지인 콜린 폴 다임 백작은 짐짓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드와의 만남을 주선하라는 것도 아니고, 초대장의 전달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제가 초대장을 들고 찾아가도록 하지요.”
후우~ 트라보 후작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자, 그럼 결혼식 날짜를 잡아 보도록 합시다.”
“제가 보기엔 이 날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결혼식에 들어갈 돈을………”
“음식은 제가…….”
급하게 진행되는 결혼식 일정에 정작 당사자인 하리온 백작은 입만 벙긋거리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람 하나 보자고 자식의 결혼식을 희생해야 한다니! 그러나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딸의 결혼식을 내어 준 만큼 최대한의 권한은 잡아야 했다.
“일단 다 필요 없고, 결혼식은 저희 저택에서 진행하겠습니다!”
뽀득, 뽀득, 뽀득.
천이 문지른 자리를 따라 기름칠된 검신이 반짝거렸다.
검을 손질할 때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고요했다. 그래서 이 순간을 나름 즐기는 이드였다.
천으로 문지를 때마다 일라이져의 검신이 더 반짝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 기분일 뿐이다. 신전에 받쳐진 일라이져는 차라리 성검에 가까워 따로 손질하지 않아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번 닦아 내는 것이나 백 번을 닦아 내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드에게 검 손질은 마음의 안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행위에 가까우니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거기다 일라이져와 달리 진짜 손질하는 맛이 나는 검이 두 자루나 새로 생겼으니 이드는 그저 지금 순간이 즐거울 뿐이었다.
“검 손질이 즐거우신 듯 보입니다.”
같이 소파에 앉아 조용히 이드를 관찰하던 이그렌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사무엘과 함께 일리나스의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던 그였지만, 파티가 있던 이틀 뒤부터는 이드와 함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파티가 있던 날 이드의 불편한 심기를 접한 벤텀 백작이 이그렌으로 하여금 이드 곁에 머물며 왕국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
“즐겁지요. 검이 아니라 마음을 닦아 내는 중이니까요.”
“마음이라…….”
이드는 빈 허리춤을 쓰다듬는 이그렌의 모습을 힐끗 바라본 후 기름 묻은 천을 밀어 주며 말했다.
“검을 닦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는다는 생각으로, 그러면서 끊이지 않고 검에 내공을 불어 넣으면 내공 단련에도 제법 도움이 될 겁니다.”
이그렌은 ‘그런 수련법도 있구나.’ 하며 천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천에 이어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 검을 보고는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 검집에 황금추. 황제가 이드에게 직접 하사한 검이었다. 뒤에 시종이 알려 온 이름이…………….
“스틸하트…… 이드님, 이 검은 제가 손질하기엔 좀.
“왜요. 황제가 하사한 검이라서요?”
“아하하하. 예.”
이그렌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더 닦을 의미가 있겠네요. 특별한 검이니까 반짝반짝하게. 그리고 하는 김에 그 검에 대한 부담도 같이 닦아요.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최고겠네요.”
“……그런 건가요?”
“그런 거죠. 검을 닦으면서 마음을 닦는다는 말. 단번에 이해 가진 않잖아요?”
“그렇죠.”
그게 바로 될 것 같으면 정신 수련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모두 검을 닦고 등선하고 말지.
“그러니까 그 검에 대한 부담을 닦아 낸다 생각하고 해 봐요. 지금 이그렌 경이 느끼는 부담이 경의 마음에 낀 때니까. 그걸 검을 닦으면서 버릴 수 있다면 그게 마음을 닦는 거니까요.”
이드의 말은 태도에 대한 충고일까, 수련 방법에 대한 충고일까?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이그렌은 곧 마음을 먹은 듯 스틸하트를 잡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강철의 검이 아니라 유리 검을 잡은 듯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그렌이 살살 검신을 문지르기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드가 문득 물었다.
“사무엘 백작을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여전해요?”
“윽…….”
갑작스럽기도 하지만, 당황스러운 내용에 손가락을 베일 뻔한 이그렌이 아픈 손가락을 쪽쪽 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시온 자작님을 내성으로 옮겼다는데도요? 제가 봤을 땐 그거 이그렌 경에 대한 협박 같이 들리던데.”
협박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협박이 확실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그렌이 우물거리며 입에 문 손가락을 씹었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향한 시선을 그대로 두고 말했다.
“전 죽어야 할 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이그렌 경은 앞으로도 기사로 살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 검에 피를 묻혀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이그렌은 이드의 말에 닦고 있던 검을 내려다보았다. 가치는 달라도 자신의 검과 똑같은 검신. 이드의 말대로 언젠가 자신도 검에 피를 더하게 될 것이다. 대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 생명을 끊어 내는 피.
‘어쩌면 명령에 알지도 못하는 자의 피를 더하기보다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악당의 피를 묻히는 것이…….’
이드는 깊이 생각에 빠진 이그렌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용히 날아온 라미아가 이드의 마음속에 말을 전해 왔다.
[으아, 방금 분위기 굉장히 무서웠던 거 알아요? 막 무슨 악마가 순수한 청년을 살인자로 이끄는 것 같았어요!]
피식.
‘따지고 보면 기사건 무인이건 살인자, 아니 살인마들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 그보다 일리나한테 연락 온 건 어때?’
라미아는 같이 있던 중 갑자기 일리나의 연락이 왔다며 방으로 날아갔었다.
[쉴라 경이 내일 복귀할 거래요. 결국 아무것도 찾은 게 없나 봐요.]
자자수 영지로 출동한 세 개 기사단은 화원이 습격받던 날 자자수 영지에 있던 초인들도 함께 영지를 빠져나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허탕을 치고 말았다.
감시하던 기사들이 그 사실을 알려 오긴 했지만, 거리가 있어서 기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이 화원을 습격하기 위한 유인 작전이었던 것이다.
허탈한 모습으로 자자수 영지에 도착한 쉴라 등이 얻은 것은 적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쓸모없는 흔적뿐이었다.
놈들은 영지를 버리기로 작정을 한 듯 함정도 하나 없이 거두어 가 버렸다.
오색 기사단에게 피해를 주려면 아무래도 특별한 물건을 써야 하는데, 그러자면 아무래도 특정한 흔적이 남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쉴라 등은 짐작했다.
결국 은, 적, 흑의 기사단은 빈손으로 복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놈들도 여러 가지로 준비를 했어. 놈들이 입은 피해도 상당하지만, 결국 지하실에 있던 가짜도 죽이고 갔으니까.’
[마지막에 밖에서 신호를 줬다니까 아마 그자들이었겠죠.]
‘누가 계획했는지 모르지만, 대담하면서 치밀한 작전이야. 숨긴 수가 두 개나 있을 줄은 몰랐지.’
어차피 잡아가든 죽이고 가든 알아서 하라고 비운 지하실이지만, 성안과 지하 양쪽으로 암살자를 준비해 뒀을 줄은 몰랐다.
[가짜였으니 다행이지. 진짜였으면 어쩔 뻔했어요.]
‘진짜였으면 그렇게 허술하게 두지 않았지. 그래도 덕분에 임무를 완성했다고 좋다고 돌아가지 않겠어? 추적은 잘 되고 있겠지?’
[에단에게서 특별히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요? 그나저나 우린 어떻게 해요?]
‘어쩔 거 있어? 라울도 사라졌겠다, 발터에 집중해야지.’
이드는 일라이져를 닦던 천을 탈탈 털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 습격 다음 날 은밀하게 발터의 저택을 감시한 결과 라울은 찾을 수 없었다.
습격 상황을 구경하고는 바로 안티로스를 떠난 것 같았다.
안타까운 사실은 라미아가 은밀히 설치해 둔 카메라에서도 의미 있는 장면이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어쩌면 하고 기대했었는데………….]
라미아가 아쉽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당장 이드가 발터에 집중한다고 했지만, 그것도 의뢰해 놓은 것과 카메라에 의지한 것일 뿐이었다. 밤마다 발터의 저택을 방문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장 토벌이 발표된 상태라 발터가 저택으로 돌아오는 날보다 돌아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이드는 하루빨리 발터를 족칠 수 있는 토벌이 시작되길 바랐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타난 집사가 살짝 허리를 굽혔다.
“콜린 폴 다임 백작님께서 명예 후작님을 뵙고자 방문하셨습니다.”
그 말에 요 며칠과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던 이드가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콜린 폴 다임? 다임이면・・・・・・ 네리베르의 성이 다임이지 않았나?”
[맞아요. 네리베르 폴 다임. 아버지가 백작이라고 했던 걸로 기억해요.]
같은 성을 사용하는 백작이 제국에 둘은 없을 터!
“만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네요. 정중히 모셔 주세요.’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네리베르 경의 아버님이신가요. 전 제 방에 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집사가 나가자 이그렌이 닦고 있던 스틸하트를 검집에 넣어 이드 앞에 조심히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드는 그 손에 검을 닦던 기름 천이 그대로 들려 있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집사의 안내를 받아 다임 백작이 나타났다.
큰 키와 날카로운 눈이 인상적인 그의 모습에 이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네리베르가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나보네요.]
이드는 마음으로 전해지는 라미아의 말에 말없이 동의했다. 어떻게 된 것이 두 부녀의 얼굴에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이름이 아니었으면 네리베르와의 연관성을 전혀 몰랐을 뻔했다.
“콜린 폴 다임이라고 합니다. 명예 후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이드는 미소와 함께 다임 백작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