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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99화


736화

정성스럽게 준비된 다과가 다임 백작과 이드 사이에 놓였다. 이드를 찾은 손님에 대한 대응 중 가장 정중한 대우다.

다임 백작도 듣는 귀가 있기에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 이드를 만나 보려고 저택을 찾은 사람 모두 만남을 거절당하고 돌아가야 했으니까. 명예 후작이다. 그보다 작위가 낮은 귀족이 찾아와 고집을 부려서 해결될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방문은 즉시 허락되었다.

‘역시 노백작의 예측은 정확하군.’

그러나 기쁘기보다는 입맛이 썼다. 그는 딸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스승과 이런 식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창 이드에 대한 일로 시끄럽고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 움직이지 않았지만, 관심이 잦아들면 조용히 이드를 찾아 네리베르를 잘 지도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 부담되는 물건을 들고 만나게 되어 버렸다.

‘이 백작님, 방문해 놓고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야?’

이드는 조용히 자신을 살피는 다임 백작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드를 네리베르의 신랑감으로 생각하고 살피고 있다든가 한 것은 아니겠지요?]

라미아의 눈초리가 새초롬해진다. 이대로 두었다간 다임 백작이 조용히 저택 지하로 끌려갈지 모른다 싶어 빠르게 부정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딱 봐도 네리베르에 대한 사랑이 넘쳐 보이지 않아? 저런 양반이 사랑하는 딸을 후처로 보낼 리가 없지.’

심각한 얼굴 어디에서도 딸에 대한 부정은 찾기 힘들지만 라미아는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럼 뭘까요?]

라미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쩐지 이드는 다임 백작의 생각이 대충 헤아려졌다.

‘아마・・・・・・ 부담감과 자존심이겠지. 네리베르 때문이었다면 찾아왔어도 벌써 찾아왔을 거야. 그런데 지금에서야 갑자기 저런 무거운 얼굴로 찾아왔다는 건 네리베르가 아니라 다른 문제로 찾아왔다는 거 아니겠어?’

[당연히 자의는 아니겠네요.]

저런 찌그러진 표정에 자의가 끼어 있을 턱이 있나. 부탁할 것이 있어 방문한 사람의 태도와 표정이 저래서야 될 일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이드는 아끼는 두 제자 중 한 명의 아버지라는 점을 감안해 백작의 부담을 덜어 주기로 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다임 백작님은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네리베르의 부친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전 파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더군요.”

“감사한 말씀입니다. 저야말로 먼저 찾아뵈어야 했지만, 파티에서는 오히려 인사를 드리는 것이 명예 후작께 폐가 될 것 같아 미루고 있었습니다. 네리베르를 아끼고 지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저야말로 재능이 뛰어난 좋은 학생을 가르치게 되어 즐겁습니다. 네리베르와 케마란을 가르치는 시간은 소드 팰러스에서 세 번째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추가로 말하자면 첫째가 일리나, 라미아와 함께하는 시간이고 두 번째는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이지만, 굳이 백작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빙글빙글 밝은 미소에 세 번째로 즐거운 시간이라고 말하자 백작도 조금은 풀어진 얼굴을 했다.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케마란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십니까? 제 학생이기도 하고, 지금은 네리베르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이입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네리베르의 통신과 편지에 명예 후작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적혀 있는 이름입니다. 링스피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해서 사용하는 천재라지요.”

“오오! 네리베르가 정말 케마란을 천재라고 썼습니까?”

[정말이라면 그 편지, 케마란에게 보여 주고 싶네요.]

내심 인정하는 듯하지만, 절대 천재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않던 네리베르가 설마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케마란을 천재라고 소개했을 줄이야.

라미아는 이미 파티장에서 소개된 바 있었기에 새가 말하는 광경에도 다임 백작은 놀라지 않았다. 대신 두 사람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따뜻하고 추억 어린 미소를 지었다.

“네리베르는 어릴 때부터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친한 친구에 대해서 솔직하게 칭찬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 말이 부정 스위치를 제대로 올린 듯했다. 그는 지극히 주관적인 네리베르의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했다.

과연 다임 백작이 말하는 네리베르와 자신이 알고 있는 네리베르가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크크큭, 이거 뒤에 네리베르와 케마란을 불러 놓고 알려 주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네리베르의 얼굴이 달아올라 터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혹시 너……??

[당연히 녹음 중이죠. 히히히.]

라미아가 이드에게만 보이도록 척하고 엄지를 올린다. 톤이 높은 웃음소리에는 절대로 네리베르와 케마란 등을 모두 불러 놓고 녹음해 놓은 다임 백작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실로 완벽한 개구쟁이가 여기 있다!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 즉, 공통 관심사만큼 쉽게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이드는 다임 백작과의 분위기가 편해진 것을 느끼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방문하신 이유를 들어 볼까요?”

“역시 짐작하셨군요.”

“파티 때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셔서 짐작했고, 방금 대화를 나누며 확신했습니다. 혹 네리베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까 조심하시는 분이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찾아오셨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저와 백작께서 네리베르를 학생과 딸로 두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해는 없습니다.”

이드는 확실히 선을 그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백작과 네리베르에 대한 생각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다임 백작은 내심 고마우면서도 뿌듯했다. 명예 후작은 소문으로 떠도는 실력만큼이나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었다.

‘네리베르의 스승이 이런 사람이라서 참 다행이구나.’

다임 백작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지고 왔던 초대장을 이드 앞으로 밀어 주었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봉투 안에는 정중하게 결혼식에 초대하는 글이 담겨 있었다.

“청첩장이군요?”

“아무래도 이런 일이 아니고서는 명예 후작님과 만나기가 힘드니까요.”

“설마 절 불러내려고 일부러 결혼식을 만든 것은……”

난감한 표정을 한 이드의 짐작에 다임 백작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끈질기게 저택을 찾은 후에 자신까지 보냈으니 그렇게 짐작하는 것이 꼭 이상한 것은 아니다 싶었으니까.

“아니요. 그 결혼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좀 당기기는 했지만.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토벌처럼 전쟁이나 전투가 있을 때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이드의 의문은 타당했다. 아무리 개인 간에 혹은 집안끼리 결혼이 약속되어 있더라도 큰일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리진 않는다. 혹시라도 전쟁이나 토벌에 나서서 새신랑이 죽어 버릴 경우, 남은 신부는 신혼에 과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차라리 결혼식이라도 올리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슬퍼한 후 새롭게 시작하면 되지만, 과부가 되어 버리면 곤란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반대로 전쟁에 나서기 전에 서둘러 결혼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손이 귀한 가문일 경우, 전쟁에서 혹시 가문의 후예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전에 어떻게든 자손을 보기 위한 결혼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큰 전쟁이 아니라면 하나뿐인 가문의 후계자가 전장에 서는 일은 드무니까.

그래서 물었다.

“혹시 신랑이 토벌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손이 귀한 가문의 유일한 후계라거나.”

“하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결혼하는 새신랑은 유능한 기사입니다.”

이드는 결혼을 서두를 전통적인 이유가 없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이거 저 때문에 급한 결혼을 하게 된 신랑, 신부에게 갑자기 미안해지는군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여러 귀족 가문에서 대대적으로 지원을 한 성대한 결혼식을 하게 될 테니까요.”

“뭐, 그러시다면.”

이드는 다임 백작의 말에 신랑, 신부에 대한 미안함은 거기까지 하기로 했다. 자신이 이유가 되긴 했지만, 결국 그들의 결혼식은 그들 가문에서 결정한 것,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란 말이지.’

그렇게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면 세상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당장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참가할 토벌에서도 사상자에 대한 책임이 이드의 것이 될테니까.

“다임 백작님께서 이걸 가져오신 이유는 제가 꼭 결혼식에 참석해 주길 원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으신다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할 일은 명예 후작님을 뵙고 초대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히 끝났으니까요.”

이드는 다임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도 네리베르를 생각해서 그를 배려해 줄 마음은 있지만, 피해를 각오하고 그를 위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 정도라면, 그리고 혹시 거기에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아니요. 참가하도록 하죠. 다른 걸 떠나서 저 때문에 결혼식도 당겨졌는데, 제가 빠져서 분위기까지 칙칙하면 신랑, 신부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네요.”

자신을 보려고 모였다 바람을 맞고 인상을 쓴 귀족들 사이에서 축하받을 신랑, 신부의 모습이라니!

“……신랑, 신부를 대신해 감사드려야겠군요.”

다임 백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감사는 여기 초대장을 보내온 하리온 백작에게 듣고 싶네요.”

초대장을 전달하고 참석 의사까지 확인한 다임 백작은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일어났다. 무리한 부탁에 대한 허락까지 받았으니 더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무례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백작이 직접 들고 온 초대장과 그 안의 정중한 글 어디에서 무례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말했다.

“백작님께서도 토벌에 참가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참가하지 않는 가문이 드물 것입니다.”

다임 백작은 토벌에 참가하기 위해서 로비를 하는 귀족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토벌은 황제가 선포한 대대적인 사건인 만큼 정예가 모여 안전하다. 명예욕이 있다면 그런 자리에 끼어서 명성을 드높이고 싶은 것은 당연. 그러나 참가할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참가하고자 하는 제국의 귀족은 수없이 많다 보니 당연하게도 참가 자리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토벌대가 완성된 후에 네리베르와 함께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요. 은색 기사단도 토벌에 참가할 테니까요.”

“하하하, 반가운 말씀입니다. 그런 자리를 만들어 주시면 꼭 달려오겠습니다. 저도 케마란 경은 만나 보고 싶군요.”

“참, 그런데 이번 결혼식에 발터 백작도 참석합니까? 초인 기사단 단장 말입니다.”

“일단 초대장은 나갔을 겁니다. 참가할지는 발터 백작이 결정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혹, 명예 후작께서 만나 보고 싶으시다면, 제가 나서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저 이전 파티 때 꽤 강한 인상을 받아서 물어보았을 뿐입니다. 백작님께서 애써 주실 일은 아닙니다.” 

다임 백작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드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빠져나간 다임 백작은 마지막으로 이드에게 당부하듯 말을 남겼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결혼식에 참석하실 때는 필히 파트너를 동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초대장을 받을 때 명예 후작님의 비어 있는 파트너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다시 소파로 돌아온 이드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차라리 목숨을 노린다면 대처가 편하지만 파트너 자리라니..

“일리나를 부를까?”

거울을 이용하면 금방이지만.

[그럼 거울의 존재를 들키잖아요! 그리고 일리나가 아니라도 이드 파트너 자리엔 제가 있을 테니까 절대 안심하세요. 이번에야말로 제가 활약할 때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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