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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화


440화

강력한 차원 진동이었다고 한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공간이 흔들리고 좌표가 고정되지 않아 마법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했단다. 마나가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해서 마나를 이용한 기법들이 거의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전투는 중단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 차원 진동이 하루 이틀 이어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투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란 말이었다. 조용한 대치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 혼돈의 파편의 비어 있던 자리에 검게 물든 게르만이 홀연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세레니아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의 등장에 전투를 이어 가려던 생각을 깨끗하게 포기했다.

“게르만? 그가 살아 있었다고요?”

“네. 세레니아가 보기에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고 해요. 하지만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말씀하셨죠.”

끄덕끄덕.

확실히 아무리 상태가 좋지 않더라도 의식만 있다면 한 사람의 몫은 확실히 할 수 있는 위험한 놈들이다.

이후의 이야기도 채이나의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채이나가 말했던 혼돈의 파편이 했다는 제의의 내용이었다. 일리나를 통해 들어 보니 그것은 제의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이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에 잠시 대치하다 옅은 웃음과 함께 돌아서는 혼돈의 파편에 이를 갈고 있을 때 그들이 말했다.

자신들에 대해서 함구할 것을 말이다. 그들의 존재가 퍼질 때 그들이 게르만과 맺은 계약도 파기될 것이라고. 그때는 그들도 혼돈의 파편의 이름에 걸맞게 세상을 혼돈의 원시로 되돌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비밀을 지킨다면 그들은 계약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제국에 속한 ‘인간’으로서 움직이겠다고 말했다.

그 후 그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나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에서 그들은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여 순식간에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들의 오만한 말에 이를 갈던 사람들은 그 움직임을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그 힘으로 공격해 온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작도 전에 멈춰 버린 전투였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남아 있던 이들은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가슴 가득 들어찬 패배감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한참이 지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걸어 차원 진동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세레니아는 가장 먼저 국경선까지 이동되어 있는 일리나를 찾아서 돌아왔다. 이후 그녀는 각국의 수뇌들과 함께 모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혼돈의 파편의 말을 수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특별한 존재들이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그들의 원초적인 힘과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피해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그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준비해서 그들을 치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녀와 그 자리에 모인 수뇌들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혼돈의 파편 역시 스스로를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판을 다시 짤 생각인지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제국의 마법사로서 공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르만의 소식만 전해져 왔다. 그가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칩거한 상태라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한 달간 세레니아는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일리나를 데리고 세상을 돌기 시작했다. 이드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드에게 그를 찾을 수 있는 마법 물품을 주기는 했지만 그 기운을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직접 이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일리나는 그녀가 적극적으로 요청한 덕분에 함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색은 세레니아가 스스로의 생각에 대한 확신과 확인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드가 사라지면서 일어난 차원 진동을 보고 이드가 현재 이 세상 안에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스스로 제작한 마법 물품을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이드가 차원을 넘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라면 설명이 되기 때문이었다.

세 달. 그녀가 세상을 뒤지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녀는 이드가 차원을 넘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세 달 후 일리나를 그녀의 마을로 데리고 가서 마을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생각해서였다. 그녀는 이드가 돌아올 그때까지 일리나에게 어떠한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런 후 그녀는 본래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혼돈의 파편을 주시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 공식적으로 이드가 그레센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색을 중단시켰다.

이드가 채이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그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수색이 중단되고 그이와 난 숲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리고 마오를 낳았지.”

채이나가 말했다.

하지만 채이나와는 달리 일리나에게는 세레니아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처음 그녀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마을로 돌아온 지 두 주가 지났을 때였다. 라일로시드가와 함께 방문한 그녀는 언제 이드가 돌아올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누구를 먼저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드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고, 그가 가장 먼저 찾을 사람 중 한 사람이 그녀라고 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이 아니고 그녀를 먼저 찾게 된다면 자신이 전해 주는 정보들을 이드에게 전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마을을 떠났고, 남아 있던 라일로시드가는 처음 일리나와 만났을 때 약속했던 마을에 위치한 악마의 봉인 문제를 정성껏 해결해 주고 떠났다.


‘에구…… 무심한 놈.’

이야기를 듣던 이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리나에게 처음 그녀가 마을을 떠나온 사연을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라일로시드가가 해결해 주기로 했지만 일의 준비를 위해서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던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자신이 세레니아를 통해 좀 더 신경을 썼다면 더 빠르게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알았다면 그 정도는 신경을 써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했다. “그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이드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일리나의 손을 살그머니 잡았다.

“이드 덕분이죠. 이드가 있었기 때문에 라일로시드가 님께서 그렇게 빠르게 움직여 주신 거니까요.”

“뭐, 그렇다 치고.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죠?”

두 사람 사이에 은근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채이나가 일리나의 말을 재촉했다. 그녀의 방해에 이드가 슬쩍 째려보려다 우디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을 보고는 움찔해서 이어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슬그머니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놓고서 말이다.

“그 뒤로 이 년에 한 번씩 세레니아 님이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지를 말씀해 주시고는 했죠.”

“그럼 그들의 행방이나, 움직임에 관해서도?”

“네, 말씀해 주셨어요.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정보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어째서요?”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얼마나요?”

일리나가 손가락 3개를 펼쳐 보였다.

“3년 동안이요. 이후에도 활동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게르만뿐이구요”

“그럼 다른 셋은?”

“이런저런 수단을 사용해서 조사했지만 찾지 못하셨어요. 거기다 게르만도 궁정 마법사로서 활동할 뿐이라고요.”

확실히 가치 있는 정보로 가공할 수 있는 내용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말을 하던 일리나가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곧 이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세레니아 님께서 마지막으로 들르셨을 때 게르만이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하다고, 그걸 알아볼 거라고 하셨어요.” “마지막이요?”

이드는 마지막이라는 말에 기분 나쁜 냄새를 맡았다.

“네, 68년 전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를 끝으로 세레니아 님께서는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오지 않고 있으세요.”

일리나는 대답을 하면서 오른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꺼내 보였다. 은은하고 투명한 청색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반지였다. 표면에 섬세한 세공이 가해진 그 반지는 이드가 일리나의 손에 끼워 주었던 반지였다.

“세레니아 님께서 처음 절 마을에 데려다주실 때 이드가 준 이 반지에 마법을 새겨 주셨어요. 위험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나 이드가 절 찾아왔을 때 연락을 할 수 있도록 메시지 마법도 함께 걸려 있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때 이후 아무리 메시지 마법을 활성화시켜도 대답이 없으세요.”

일리나는 말을 마치며 조용히 들고 있던 반지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녀의 손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탁자 위 반지로 향했다. 라미아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반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반지를 둘러싸고 있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마법의 언어와 기호들이 떠올라 보였다.

[세레니아 님이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아요. 반지에 걸려 있는 마법은 정상이에요. 그레센에 있다면 어디에 있건 이 반지에 저장된 메시지를 들었을 거예요.]

대륙 하나를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역시 드래곤의 실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런 마법 물품의 힘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그레센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답은 두 가지다. 그녀가 죽었거나, 마법 물품의 힘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있거나. 이전의 이드처럼 말이다. 어느 쪽이든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 반지에 걸린 마법으로 세레니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없어요.]

라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반지에 걸린 마법은 한 쌍으로 공명하는 마법이에요. 그래서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알 수 있죠. 단순한 메시지 마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마법적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데 가장 안정적인 최상의 방법이죠. 다른 한쪽을 찾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확한 마법은 없어요. 그래서 세레니아 님도 이 반지에 해당 마법을 걸었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반지에 적용된 마법이 상대를 찾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말이었다. 세레니아가 대답하지 않는 이상 이 반지를 이용해서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니아와의 연락이 끊기고 그녀도 알아본 사실이었다. 엘프 마을에 담겨 있는 세월의 지혜가 얼마인가. 하지만 그 지혜를 가지고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드는 세레니아의 일이 걱정도 되고, 방법이 없다는 것에 허탈하기도 했지만 생각 외로 덤덤했다. 며칠 전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시간으로 9년이고, 그레센의 시간으로는 60년이 넘었다. 지금에 와서 자신이 호들갑을 떨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드는 자신이 넘긴 시간의 괴리가 생각 외로 크다고 느꼈다.

“잠깐만…… 그러면 혹시 라일로시드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세레니아와 연락이 끊겼다면 다른 드래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세레니아를 찾기 위해서는 그를 찾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드와 일리나를 그녀에게 인도한 것이 그였다. 그라면 세레니아와 연락이 끊긴 일에 대해서 알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세레니아의 소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와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이런 이드의 생각은 정확했다.

“네. 세레니아 님의 말씀이 있으셔서 제가 직접 움직일 수 없었지만 대신 마을의 전사분이 다녀오셨는데, 레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셨죠.” 일리나의 말을 우디가 이었다.

“아무래도 마법적인 힘이 작용한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움직였지만 나 역시도 찾을 수 없었네. 아무래도 단단히 숨겨 두신 듯했어. 세레니아 님의 일도 있고 해서 혹시나 다른 분들은 어떨까 싶어 다른 마을을 통해 알아봤는데 다른 분들 역시 레어를 비우시거나, 숨겨 두시고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다는 답을 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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