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1화
468화
에단은 자신 앞에 던져진 헨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신음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드의 어깨에 걸려 있던 인물이 계속 눈에 들어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확인하고 나니,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식한 누더기 놈들. 또 사고 쳤구나.’
에단은 테이의 이야기에 나온 납치범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아는 것 같네요.”
“네,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이자가 속한 로브스라는 단체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습니다.”
로브스.
그들 사이에는 누더기로 통하는 놈들이었다.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로브의 안쪽에 수십 개의 주머니가 바느질되어 있는 모습이 누더기와 같아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하지만 우스운 별명과는 다르게 그들의 로브에 들어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만큼 일처리가 과격하고 거친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에단은 출신국의 귀족을 닮은 놈들이라고 싫어했다. 말도 되지 않는 일로 몇 번 부딪치면서 제법 많은 피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이곳에서 또 문제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드 마스터의 후계자를 상대로 말이다.
‘빌어먹을 놈. 왜 하필 이때 일을 벌이는 건데. 이거 쉽게 말로 풀 만한 분위기는 아닌데 말이야.’
에단은 이드와 엘프들의 낯빛을 읽고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로브스. 저도 이자에게서 들었던 이름이네요. 저를 찾아서 시온에 왔다고 하더군요. 목적과 다르게 어이없는 일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죠. 설마, 그런 일을 벌인 상대와 말을 섞을 거라고 생각한 거라면 멍청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신들도 절 찾아 온 거라지요?”
이놈의 입을 어떻게 열었을까. 그런 궁금증을 머릿속에 떠올리던 에단은 자신들을 돌아보는 이드의 시선에서 마치, 너희들도 이놈들과 같은 멍청이냐고 묻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 기사단과 다르게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특수 기사단은 보통 사람들이 꺼리는 존재들이었다. 무엇보다 검만을 고집하지 않고 독, 함정, 속임수 등의 수단을 가리지 않는 면 때문에 기사들에게도 이단으로 취급당하는 기사단이다. 기사들 역시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멀리하는 것이다. 에단 스스로도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자각은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누더기 놈들 때문에 이렇게 도매금으로 멍청한 취급을 당하는 것은 더욱 사양하고 싶었다.
“말씀대로 이놈들이 좀 멍청하죠. 보통 앞뒤 안 가리고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한 놈들입니다. 천지분간 못 하는 마스 왕국의 출신다운 성격들이지요.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데 말입니다.”
“저희는 대아나크렌 제국의 특수 기사단으로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에단의 말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기사다운 절도가 있었다.
“아나크렌이라.”
이드는 에단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이드와 잠시 눈을 마주치던 에단은 곧 대장에게 다가가 그를 깨워 새하얀 봉투를 받아 들고 와서는 이드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건넸다.
“이것은 대아나크렌 제국의 영광스러운 황제 폐하께서 귀인께 건네는 편지입니다.”
봉투에는 아나크렌 황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웅장하게 그려져 있었다. 물끄러미 봉투를 바라보던 이드가 천천히 봉투를 건네받자 에단이 이번에는 무릎을 꿇었다.
“저희 트와이스에서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와중 귀인께 무례를 범한 사실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할 잘못이라면 당연히 벌을 받겠으나, 저희들의 목숨은 나라에 맡겨진 터라 저희의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본국의 황궁을 통하여 물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간청합니다!”
정말 벌을 받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벌을 주기 위해서라도 황궁에 오라는 말인가. 이드는 칼을 차고 현장에서 직접 움직이는 검사가 정치인처럼 말을 참 어렵게 한다 싶었다.
위대한 아나크렌 제국 황제라는 문구로 시작한 편지는 오래전 이드와 아나크렌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이드에 대한 황제의 생각과 존경을 적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세레니아 동맹의 일원으로서 정중히 이드를 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세레니아 동맹이고? 라일론과 아나크렌 사이의 동맹을 말하는 것 같은데, 라일론에서도 대놓고 의미 없다고 말한 동맹이다. 그걸 아나크렌 혼자서 지키고 있다고? 이것들이 날 바보로 아나.’
이드는 이 편지가 자신을 낚기 위한 말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이번 사건도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뿌린 씨앗이라는 말이었다. 아나크렌과 같은 과거의 인연은 물론이고, 일리나를 찾아오며 일으킨 풍파가 모진 파도가 되어 몰려온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결국 눈앞에 있는 트와이스를 두드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선 트와이스에게 시온에서의 축객령을 내렸다.
에단과 대장이 나서서 황제를 팔아 편지에 대한 답과 이드의 동행을 원했지만, 이드는 이후에 자신이 직접 제국을 찾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휴, 어쩔 수 없나.”
대장은 이 이상 귀찮게 한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이드의 태도에 임무를 포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심 포기하고 있던 임무라 크게 미련도 없었다. 임무를 받을 당시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힘으로 제압해서라도 데려오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도 상황이 따라 줄 때의 이야기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전투력 하나만은 뛰어난 로브스를 진짜 걸레로 만들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후계자 본인의 실력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다른 걸 떠나서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값만 생각해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인물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곳에는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엘프들까지 있었다. 이미 많은 인원을 잃은 트와이스로서는 그들을 상대할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은 그저 무사히 귀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해라.”
“옛!”
그때까지 힐끔힐끔 이드를 훔쳐보고 있던 대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임무는 실패했고,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살아서 돌아간다는 사실이 못내 기쁜 것이었다.
“저 녀석……………”
그때 대장의 눈에 대원들 뒤에서 천천히 이드에게 다가가는 에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장은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를 보지 못한 듯 눈을 돌렸다.
황제의 편지를 구겨서 던져 버린 이드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에단이라는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야기는 다 끝난 것 같은데.”
“물론입니다. 트와이스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방금 저희들의 대장이 그렇게 선언했습니다.”
이드는 에단의 말에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가장 앞서서 상황을 이끌고 있어서 그가 대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체의 임무가 끝났다면, 개인적인 용건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은 트와이스가 아니라 제 개인적인 용건입니다. 부디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드는 에단이 건네주는 작은 종잇조각을 받아 들었다.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는 앞서의 새하얗던 편지와는 정반대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천천히 펼쳐든 종이 안에는 짧은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시르피 드 아이넬 아나크렌 혼. 초대 소드 팰러스의 마스터 태대공녀 실종. 소드 팰러스 2대 마스터.
이드의 눈이 조용히 커졌다.
“이건…….”
“조용한 곳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음.”
이드는 에단의 말에 더 묻지 않고 다시 글을 읽었다. 종이에 적힌 시르피라는 이름이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오빠’ 하며 자신에게 매달리던 귀여운 모습이 떠올랐다.
“살아 있었구나.”
한편으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구십 년의 세월 앞에 자신이 알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다. 일리나와 채이나처럼 긴 수명을 가진 이종족이 아닌 사람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당장 채이나의 남편이자 강자였던 바크로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녀인 시르피가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녀로서 많은 혜택을 받았을 테지만, 그래도 평균 수명이라는 것이 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열넷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것을 생각하면 지금 나이는 백이 넘었을 것이다. 그레센을 떠나 지구의 평균 수명도 한참을 뛰어넘은 나이다.
이드는 그녀가 기사들에게 마인드 로드를 전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물었다.
“시르피가, 태대공녀가 경지를 넘었습니까?”
“예. 태대공녀께서는 위대한 검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에단이 조용히 대답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피가 세월을 이길 정도의 강자가 된 것이다.
황녀라는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길을 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에서 살면서 몸을 단련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황족인 만큼 수련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바로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수련이란 도구만 있다고 되는 것 아니었다.
수련이란 것이 그런 것이었다면 부자와 권력자들 중에 고수 아닌 자가 없었을 것이며, 중원의 최강자는 언제나 황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자이면서 고수인자는 중원에서도 드물어 찾기 쉽지 않았다.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그저 자기 몸을 지킬 정도의 가벼운 수준일 뿐이었다.
수련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괴로울 정도로 괴롭히는 행동과 같았다. 그 속에 규칙이 있고, 법과 도가 있지만 시작은 그저 고통스러운 고행의 연속일 뿐이다. 언제나 존귀하게 모셔지는 황족이 스스로 그런 고통을 자처하기는 쉽지 않다. 그 많고 많은 무공을 황궁 무고에 모셔 두고도 중원의 황족이 따로 호위를 두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시르피가 여자의 몸으로 그 괴로움을 스스로 찾아 감내한 것이다. 그것도 무공이라는 새로운 수련법을 친절히 가르쳐 줄 선생도 없이 말이다. 이드는 그녀가 천재였던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필 처음 전해 듣는 소식이 실종이라니.”
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을 이길 정도의 강자가 된 그녀가 실종이라니. 분명 보통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시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과거에서 이어지는 인연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혹시 테이를 이용한 것도 절 보기 위해서였습니까?”
“쯧.”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드는 머뭇거리는 에단의 말에 작게 혀를 차고는 페르디움에게 다가가 에단을 마을로 데려가는 일을 상의했다. 그는 이드가 확실히 그를 책임지는 것을 전제로 동행을 허락했다.
“우리와 함께 엘프 마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앞서와 같은 허튼짓을 한다면 경고 없이 바로 손을 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