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11화
748화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수도를 떠난 후 처음이었다.
“일리나에게 소식은 전해 듣고 있었지만, 역시 직접 얼굴을 보니 반갑네요. 앉아요.”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명예 후작의 작위를 받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밖에서도 제대로 예를 갖출 수 있어 정말 마음이 편합니다.”
이드는 껄껄거리는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습니까?”
“당연합니다. 매번 이드 님께 평대를 하면서 제가 얼마나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아마 이드 님은 짐작도 못하실 겁니다.”
클라인이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전혀 그런 기색을 읽을 수 없어서 몰랐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본래 이런 곤란함은 아랫사람만 알지 윗사람은 모른다.
어디까지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아랫사람, 혹은 하급자니까.
쉴라도 완전 동감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하하, 그럼 이제 맘껏 편하게 말하시면 되겠네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막상 편하게 말을 하려고 해도 이드 님이 수도에 계시니 그게 또 어렵게 되었습니다. 참, 안티로스에서의 소식은 잘 듣고 있습니다. 활약이 대단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흐뭇했습니다.”
이드는 으흐흐 하고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클라인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끔찍한 소리 말아요. 활약이 아니라 고생이니까. 찾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고, 헛소문은 또 얼마나 되는지. 흑색 기사단장의 저택이라고 조심하는데도 그랬는데, 아니었으면 몇 배는 더 모여들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흑색 기사단장과 연결해 준 쉴라 경이 참 고마워요.” “전 그저 말만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고맙죠. 아니었으면 여관방에 갇혀서 한 발도 나가지 못했을 테니까.”
엄살을 떠는 이드의 말에 쉴라가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이드는 그녀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듯하자 기회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어질 말이 그녀에게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자자수 영지의 일은 일리나를 통해 들었습니다. 고생했어요.
그 말에 쉴라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보다는 허탈해요. 거기 있던 놈들, 아마도 어릴 때 어머니가 꽤 귀여워했을 게 분명합니다. 얼마나 깔끔하게 치우고 갔는지.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요.”
“흩어진 자들을 쫓진 않고요?”
“감시하던 기사들 중 몇이 움직였지만…… 쭛.”
쉴라는 침중한 눈빛으로 혀를 찼다. 추적에 나섰던 기사들 중에 사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런 사실을 읽은 이드도 그에 대해서 더 묻지 않았다.
이어 그녀는 그들이 숨어 있던 곳을 멍청히 지키고 선 용병들을 조사한 일과, 그들이 그렇게 자리를 잡은 때부터 도망갈 때까지 손 놓고 있었던
자자수 영주의 책임을 묻고 돌아온 일을 덤덤히 이야기했다.
[쉴라 경에게 자자수 영주를 처벌할 권한이 있는 거예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미아가 궁금한지 물었다.
“그래. 오색 기사단 단장은 암묵적으로 백작과 동급으로 취급되니까.”
쉴라가 덤덤히 대답하자 클라인이 끼어들어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이런 쪽으로는 오색 기사단 중에서도 은색 기사단의 경우가 좀 특별하지. 검후님의 수호 기사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니까.”
즉 검후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발언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색 기사단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자자수 영주를 닦달하고 났더니 분하던 속이 좀 풀리더군요.”
이드는 뭔가 상큼한 쉴라의 눈빛에 그녀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기 위해 한 몸 희생한 자자수 영주에게 잠시 감사의 마음을 날려 보냈다.
하지만 쉴라의 표정이 밝아진 것은 잠깐이었다. 한참 스트레스를 푼 후에 화원의 소식을 접한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제대로 당했던 거죠. 설마 그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화원에 발을 들일 줄은.. 각오를 했던 일임에도 피해가 커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드 님께는 감사드립니다. 스위트 경들이 모르게 다녀가셨더군요.”
“뭘요. 크게 한 것도 없는데. 일리나가 다했죠.”
하지만 쉴라의 고개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 그가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물론 전장에 쓰러져 있던 부상자들을 케어한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을 물리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덕분에 죽었을지도 모르는 기사들이 많이 살았다.
자신의 자식 같은 기사들이 죽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일리나 님께는 먼저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 참…….”
이드는 곤란한 고집을 부리는 쉴라를 보다 클라인에게 좀 도와달라는 눈짓을 했다.
“하하, 마침 일리나 님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일리나 님이 소드 팰러스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이드 님은 아직 듣지 못하셨지요? 아마 이드 님보다 더 유명할 겁니다. 당장 지금도 화원 앞에서 일리나 님을 보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일리나 님의 인기가 아주 죽여줍니다! 이드 님도 그렇고, 일리나 님도 그렇고. 정말 환상적인 한 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싱글벙글 이야기하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도움을 청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래도 일리나의 이야기에 이드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전 저택 앞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처럼요?”
“그때보다 더할 겁니다. 일리나 님의 활약을 한둘이 본 게 아니니까요.”
“거기에 일리나와 검후의 공통점이 여럿 있다는 이유도 있을 테고요?”
굳이 꺼내지 않은 점을 정확히 찌르는 이드의 말에 클라인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의 말처럼 일리나에 대해 듣고 검후를 언급한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검후와 같은 여성이라는 점에 더해서 사용하던 무공까지 검후의 것과 같다.
덤이지만 그로 인해 일리나보다는 못해도 이드의 인기도 소폭 상승했다. 일리나에게 검후의 무공을 가르쳤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검후에게 마인드 마스터가 있듯, 일리나에게 이드가 있다는 뭔가 이해하기 힘든 미묘한 이유였다. 새삼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달까?
[축하해요. 순식간에 인기인이 되었네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자신과 함께 과도한 관심에 피곤해하는 라미아가 할 말은 아이었다.
“휴우~ 전 불편할 뿐이지만요.”
일리나가 귀엽게 한숨을 쉬며 곤란해했다. 하기야 이드를 보겠다고, 수업을 듣겠다고 저택 앞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만 해도 문 밖을 나서기가 곤란했는데, 그때보다 더하다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원이 크고 넓어 답답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덕분에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일리나는 최근 엉망이 되어 뒤집힌 화원의 복구에 힘쓰고 있다. 화원의 복구는 엘프인 그녀에게 노동이 아니라 취미를 즐기는 시간이자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녀가 엘프인 사실을 모르는 기사들은 그녀가 손만 대면 화사하게 살아나는 화원의 모습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너무나도 극적인 장면을 목격한 기사들은 입을 떡 벌리고서 일리나의 진짜 직업이 정원사가 아닌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의심이 정답이기도 했다. 직접 이전에 엘프라는 종족이 가진 태초의 개념 중 하나가 신의 정원사이니까.
“조금만 참아 줘요. 곧 토벌대가 조직되면 관심이 수도로 옮겨질 테고, 그러면 이쪽은 조용해질 거예요.”
이드가 일리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만 클라인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과연 그런다고 일리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까. 가장 핫한 이슈메이커 둘이 한곳으로 모이는데, 오히려 관심이 더 늘어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 화원의 습격에 대해서는 하나도 얻은 게 없는 거네요.”
일리나를 위로한 이드가 결론을 냈다.
입맛이 썼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에 쉴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후퇴하는 적들의 추적도 모두 실패했으니까요.”
“나름 공을 들인 작전이었는데, 아쉽네요.”
이번 미끼를 이용한 역추적은 이드와 쉴라, 클라인이 함께 짜낸 작전이었지만 완전히 실패해 버린 것이다.
“저희 추적이 어설펐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놈들의 움직임이 대단했습니다. 뒤에 조사해서 알아낸 사실이지만, 마치 이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는 듯 빈틈만 골라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이놈들은 단순 무력만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클라인은 부득부득 이를 갈다가 이드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도 이드 님이 마지막에 배신자 한 놈을 잡아 주셔서 살았습니다. 일단 화원에 잡아 놓고 있는데, 마침 내공이 금제되어 있어서 놈도 많이 당황하고 있는 상태거든요. 그 금제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신관이 치료에 나서더라도 두 달은 유지될 겁니다.”
“그럼 한 번 더 봐 주시겠습니까? 내공이 사라진 상태가 길어지면 놈도 정신적으로 구석에 몰릴 것이 분명합니다.”
“흐흐흐, 그럼 돌아가는 길에 들러 단단히 손을 보도록 하죠.”
이드는 클라인과 마주보며 음침하게 웃어 보였다. 배신자에게 인권이 어딨나? 배신자는 괴롭히는 것이 제 맛!
“참, 그리고 이번 일은 삼검왕 쪽에서도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이드는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래요? 전 당연히 이번 습격에 대해 삼검왕 쪽에서도 알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관계가 없다는 겁니까?”
“아니요. 오히려 알고 있어서 분통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소드 팰러스를 제 몸처럼 아끼는 양반들이 이렇게 큰 소란을 허락할 리가 없지요. 제 생각엔 초인파 측에서 삼검왕에게 알린 것보다 많은 전력을 투입한 것 같습니다. 아마 확실히 처리하고 싶었겠지요.”
“그럼 삼검왕이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거네요.”
“하하, 발등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뒤통수가 얼얼할 겁니다. 어쩌면 이번 일로 둘 사이가 벌어지면 틈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적당히 화원에 누워 있는 놈을 써 볼까 싶습니다.”
이드는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벌릴 수 있으면 더 벌려 놓아야죠. 아, 혹시 발터라는 자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발터라면…… 초인기사단장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기본적인 정보밖에 없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발터 초인기사단장이라면 제가 안면이 좀 있습니다.”
클라인이 턱을 긁으며 고개를 젓자 쉴라가 나섰다.
“그래요? 어떤 자에요?”
“특별히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기본적인 사항들과 그의 초인기가 대지 계열이라는 것, 그리고 신념이 투철한 자라는 것 정도입니다.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했죠.”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왜 물으시는지?”
이드는 클라인의 물음에 파티장에서 발터와 라울이 나누었던 이야기와 그것을 보고 이드와 라미아가 조치했던 일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이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초인파였지만, 설마 그 뒤에 또 다른 세력이 물려 있을 줄이야. 클라인은 분하고 어이없는 기분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반대로 쉴라는 뜨겁게 분노를 토해 놓았다.
“감히! 검후께서 초인파를 위해 나섰던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이드 님, 그런 자는 절대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완의 마탑의 토벌 때 그를 따로 확보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꼭 제가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꾸욱!
검을 쥔 쉴라의 손이 분노로 떨려 하얗게 변했다.
“끌끌, 좋은 생각입니다. 전장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할 것이 없는 법이지요.”
마침 토벌이 있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초인기사단장에 있는 발터에게 정보를 얻어내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점점 흉흉해지는 분위기에 질렸는지 라미아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그나저나 게일이란 남자 어떤 놈이에요? 이전에 이상한 수작질을 걸어오던데. 괜찮은 인물이라더니, 클라인 백작님이 말하던 것과 다르잖아요.] 마치 불량품을 받고 따지는 것 같은 라미아의 말에 클라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분명 자신의 입으로 게일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크흐흐흠~”
오늘 이드를 만나고 처음으로 말이 막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