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25화
762화
황녀를 따라 다시 황녀궁에 방문한 이드는 조금 전 일이 게일의 독단적이고 비겁한 행동일 뿐이며, 황궁이 이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들어야 했다. 그녀는 이드가 당장이라도 안티로스를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게일 경이 날 싫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요. 오해는 없습니다. 황녀님.”
그에 이드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놓아 줄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 파티 때처럼 기사의 혈기라는 것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황궁의 기사가 명예 후작에게 저지른 무례에 대한 보답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할 테니까. 협력자의 힘을 보여 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사실 이 문제는 황실로서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황궁 기사라지만 기사가 감히 후작을 상대로 이처럼 무례하게 검을 든 경우가 있었던가. 이것은 자칫 황제의 결정을 기사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황궁의 문제. 이드는 황녀가 무례에 대한 보답을 약속한 뒤에 만족한 미소를 보이며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황녀궁 앞에서 이드를 배웅한 황녀는 황제가 있는 집무실을 찾았다.
“아바마마.”
“그래. 일찍 왔구나. 후작은 벌써 돌아갔느냐?”
황제가 업무를 멈추고 황녀를 반겼다. 황제가 하던 일을 멈추고 반기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데, 그중 하나가 황녀다. 그녀는 아직 어린 황태자를 제외하고 황제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다.
“네. 배웅하고 오는 길입니다.”
“마음이 급했나 보구나. 연무장의 일 때문이겠지?”
황제는 곧바로 황녀가 달려온 이유를 짚었다. 황녀가 보고한다고 했지만,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 황제가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황녀궁 내부의 일까지 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황녀는 게일의 방문과 이후 이드와 의견차를 보인 난화십이식에 대한 주장과 증명에 대해서 말했다.
“쯧.”
황녀의 이야기를 들은 황제가 혀를 찼다. 그 안에는 게일에 대한 노골적인 실망이 담겼다. 이런 것은 그가 황녀의 남편감으로 게일에게 기대하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거기에 이왕 일을 벌이려거든 철저하게 해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증거물을 상대의 손에 넘기는 놈이었다니. 에잉!’
황제는 게일이 루키브레이커로 승부를 조작하려 했다는 사실보다 그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실망했다.
“일단 오늘 문제는 덮어 두어라. 토벌을 앞두고 시끄러울 수는 없지.”
“하지만 명예 후작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한쪽이 덮는다고 덮어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네가 잘 처리하지 않았니?”
황제가 따뜻한 눈으로 흐뭇하게 황녀를 보며 말했다. 황녀가 이드를 황녀궁으로 다시 데리고 간 이유를 정확히 읽은 것이다.
“하지만 저에겐 그런 권한이 없는걸요.”
“그럼 전권을 주마, 조용히 마무리하려무나.’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황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이상 이드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보상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드가 드래곤 레어 두 곳의 보물 창고를 통째로 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 자신하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 앞의 딸로서 귀여운 짓도 잠시.
“그런데 게일 경은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황녀가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게일의 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다.
“그는 아직 제국을 위해 쓸 곳이 많은 기사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라.”
남편 후보 일 순위를 신경 쓰지 말라니. 황녀는 그 순간 게일이 자신의 남편 후보에서 삭제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바마마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황녀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녀의 기준은 단호했다. 약한 남자와는 살 수 있어도, 비겁한 남자와는 같이 살 생각이 없다.
황녀가 돌아간 후 황제는 시종을 불러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게일에게 감봉과 함께 무기한의 정직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말만 무기한이지 실제로는 짧은 정직 처분이다. 곧 있을 토벌에 유명한 기사 중 하나인 그를 뺄 수는 없으니까.
황제는 게일이 소드 팰러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상 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끊임없이 이드와 게일을 저울에 올리는 황제였다.
“……”
게일은 눈을 꽉 감았다. 눈을 뜨자마자 닥친 통증은 문제가 아니었다. 통증과 함께 전달된 황제의 명령을 듣고서야 자신이 질투에 눈이 멀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목에 걸린 가시 같은 패배감과 처음 느끼는 열등감이 폭발한 때문에 상황을 냉정히 보지 못한 것이다.
앞서의 소문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당장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을 어떻게 다시 봐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도저히 그들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군.”
“내게 하는 말이오?”
누군가 자신의 혼잣말에 답변하자 게일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사람이 이렇게 접근하는 것도 알지 못하다니.
‘오늘은 정말 엉망진창이군.’
그런 게일의 눈에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다. 며칠 전 발터와 함께 보았던 자다.
“칸 경이 어쩐 일이오?”
“게일 경이 큰 사고를 쳤다는 말을 들어서 말이오. 나는 경이 이렇게 성급한 사람인 줄 몰랐소.’
“흐…… 나도 내가 이런 인간인 줄 몰랐소. 우리 사이에 병문안 온 것은 아닐 테고. 그래서 용건은?”
“단장님께서 찾으시오.”
“알았소. 좀 더 쉰 후에 찾아가겠소.”
그러나 칸은 발터의 부름에 즉시 움직이지 않는 게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말을 더하려 했지만, 가까워지는 기척에 하려던 말을 멈추어야 했다.
“……최대한 빨리 방문하길 바라겠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마친 칸이 벽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진 후 방문이 열리더니 막내 기사가 들어와 말했다.
“단장님께서 게일 경이 깨어났는지를 확인하고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게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오늘 자신을 찾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새삼 자신이 만든 사건의 크기가 느껴졌다.
“좋아. 가지.”
게일은 오늘 하루가 아주 길 것 같다고 예감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이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무엘을 볼 수 있었다.
“황녀님의 초대를 받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이드 님.”
“축하받을 일은 아니죠. 그보다 바쁘신지 백작님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하하하, 이드 님께 신세 지는 죄로 사람들이 이드 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얼마나 부탁을 하는지. 제가 아주 거절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힘들다고 엄살을 떨며 슬쩍 이드의 눈치를 보았다. 제법 큰 대가를 받고 이드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이드의 말에 사무엘 백작은 기겁하고 손을 흔들어야 했다.
“이런・・・・・・ 그러면 제가 따로 집을 봐 드릴까요?”
“저, 절대로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이렇게 바쁜 것이 아주 아주 좋습니다.”
“뭐, 언제든 필요하면 말씀만 하세요.”
말만 하면 내보내 준다. 단 집을 직접 알아봐야 할 테지만.
이드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린 사무엘이 이드를 기다린 용건을 꺼냈다.
“이그렌 경이 부재중이라 알아보니 일리나스의 공관에 갔다고 합니다. 이드 님께서 태워 주셨다는데, 혹 이유를 아십니까?”
“물론이지요.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전 시온 자작가의 불행에 대해 사무엘 백작이 했던 말이 생각나지 뭡니까. 그래서 벤텀 백작에게 그 일에 대한 조치를 부탁했는데, 그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시・・・・・・ 온 자작가의 일・・・・・・ 말씀이군요.”
이드의 말에 사무엘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자신이 혓바닥을 놀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올 줄이야!
하지만 이드는 그런 사무엘을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벤텀 백작도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해서 말을 꺼내 보았는데, 잘된 모양입니다. 언제까지 사무엘 백작님이 시온 자작을 돌보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하하하, 이드 님이 그렇게나 저를 생각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는 사무엘 백작의 볼이 실룩거렸다. 참으로 쓸데없는 참견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드를 앞에 두고 왜 그런 짓을 했냐고 할 수도 없는 일.
그리고 이그렌이 공관으로 간 이유가 그것이라면 여기서 이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도 공관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드 님의 배려는 감사하지만, 전혀 부담되지 않으니 천천히 하라고 말씀을 드려야지요.”
“하하하, 그러세요. 이그렌 경이 이런 사무엘 백작님의 마음을 잘 기억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빈말이 아니다. 정말 마음 깊이 기억하고 사무엘의 처리를 확실히 했으면 하는 것이 이드의 바람이다.
이드는 사무엘의 마차가 맹렬한 속도로 공관을 향해 달리는 것을 보고는 돌아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집사가 다가와 물었다.
“저녁은 어떻게 준비할까요?”
“저녁은 아무래도 혼자…….”
[이드, 정보 분석 끝났어요!]
이드는 말하던 도중 들린 라미아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말을 바꾸었다.
“나가서 먹을 것 같네요. 따로 준비하지 말고 저택의 시종들과 먼저 들어요. 아무래도 사무엘 백작과 이그렌 경도 저녁은 먹고 올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드의 말에 집사가 아무런 의문도 없이 허리를 접었다.
그 모습에 막 돌아서려던 이드가 말했다.
“참, 조만간 내가 저택을 구해서 나가게 될지 모르겠는데. 그 저택 관리를 집사가 해 줄 수 없을까요?”
몇 번이나 생각하던 스카우트였다.
흑색 기사단장의 배려로 그의 집에 신세를 진 상황에서 그의 저택을 지키는 집사마저 빼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만.
‘어쩌겠어. 이런 유능한 집사를 구하는 일이 쉬운 것도 아니고.’
수도에서 인맥이 좁다 못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드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
“으음, 죄송하지만 조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집사도 생각이 있는 듯 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급여는 무조건 지금의 세 배 이상을 줄 테니까요.”
정말 좋은 관리인의 경우 급여에 흔들리지는 않지만, 또한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라 이드가 무조건을 외쳤다.
집사를 물리고 방으로 돌아온 이드는 방 한가운데 자리한 거울을 앞에 두고 라미아를 불렀다.
“라미아.”
[네. 지금 돌아갈게요.]
“아니, 잠깐만. 그러지 말고 날 그쪽으로 불러 줘.”
[여기로요?]
“응. 거기서 확인할 게 있다는 걸 깜빡했어.”
[알았어요.]
이드의 말에 즉답하는 라미아의 목소리 뒤로 ‘또’라고 절규하는 비올라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물론 이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