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38화
775화
헹크의 방을 나온 라울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빠르게 걸었다. 성주가 그 뒤를 따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울 님.”
“음?”
“목표는…… 계속 추적합니까?”
성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말을 하면서도 그러라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그는 헹크와 부하들을 수습하면서 이드가 남긴 전투 흔적을 직접 보았다. 수십의 나무가 쓰러지고, 땅이 뒤집히고 타오른 흔적은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 냈다고 믿겨지지 않은 파괴의 현장이었다. 마치 수십 년에 한 번 있을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난 듯했다.
성주는 그런 자연재해급의 인간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심기가 상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그와 문제가 생기면 요새의 위치를 아는 자연재해급 인간이 누굴 찾아올까? 당연히 자신이지 않겠는가!
“아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역시 그렇지요? 초인 중에서 또 한 명의 절대 강자가 났는데, 쓸데없이 부딪힐 필요는 없지요. 암요.”
성주가 라울의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하자, 라울이 눈썹을 꿈틀대더니 차갑게 대답했다.
“무슨 말입니까? 이번 일은 카라가스 지부에서 해결하기 어려우니 중앙에서 이어 가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헹크는 제가 데려갑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중앙에는 뛰어난 사람이 많을 텐데, 굳이 헹크를 왜…………….”
라울의 태도에 기가 죽은 성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데려가도 왜 하필 가장 일 잘하는 부하를 데려가겠다는 것인지.
“목표와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분명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성주는 이 일에는 더 신경 쓰지 마시고, 삼일 안에 지부를 이전할 준비나 하세요.”
“예? 이, 이전이라고요? 왜 그래야 합니까?”
내심 헹크에게 닥친 불행을 애도하던 성주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멀쩡한 요새를 이전하라니? 그것도 삼 일 안에?
‘이 양반이 미쳤나. 이 큰 요새가 무슨 시골 가정집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기가 막혔지만 라울의 명령은 변하지 않았다.
“카라가스 지부에 대해 아는 자가 생겼는데, 당연한 조치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서로 상관하지 말자고.”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성주를 라울이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체도 모르는 자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성주가 세상을 이렇게 순진하게 사는 줄 몰랐습니다.”
지부의 운영비를 떼먹고 있던 자신이 순진하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성주는 헛기침으로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제 부하들을 살려 주는 것으로 우리와 적이 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꼭 잡아야겠습니까? 그렇게 나가다간 그의 경고대로 다음에 그를 만나면 적이 될 겁니다.”
멀쩡한 요새의 이전에 일 잘하는 부하까지 빼앗기게 생긴 성주는 억울한 심정을 내뱉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던 라울이 멈춰서더니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우리 초인들의 문제를 풀어 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집착마저 느껴지는 말을 들은 성주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라울 님의 목적은 이해하지만 과연 그게 잘될지. 뭐,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삼 일 안에 준비해야 하는 이사 문제지.
“음…….”
이드가 답답한 콧김을 뿜었다.
이드의 입술이 요리조리 삐죽이며 움직이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라미아는 그 영상을 기억 속에 고화질로 저장하고는 말했다.
[아까부터 끙끙거리는데, 무슨 고민 있어요?]
“고민은 아니고, 똥 싸고 뒤를 닦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 헹크라는 남자와 초인들을 그냥 돌려보낸 일이 묘하게 찝찝하네. 좀 더 닦달해 볼 걸 그랬나?”
사실은 경지에 오른 직감이 라울의 존재를 감지한 때문이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드였다.
[적을 죽이지 않고, 멀쩡한 상태로 돌려보낸 게 아쉬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이드는 빙글거리는 라미아의 말에 눈을 흘겼다.
“누가 들으면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줄 알겠다?”
[좋죠. 물러 터진 호구보다는 냉혈한이 멋지잖아요.]
“그건 네가 보던 드라마 주인공 트렌드고.”
[현실도 다르지 않네요.]
“네 취향인 냉혈한이 아니라서 미안하게 됐네요. 에단은 뭐래?”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거하게 힘자랑을 마친 이드는 에단과 톰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안티로스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공간 이동으로 쉬고 있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존경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선들이라니.
목적했던 일도 끝났겠다. 괜히 엉덩이 붙이고 있어 봤자 남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조금 전 에단이 요새에 변화가 있다며 연락해 왔다.
[거점으로 쓰던 요새를 정리하는 것 같대요.]
거대한 요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과 사람을 옮기는 일은 아무리 은밀해도 티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날 경계한다는 뜻이네. 어쩌면 관심 끄라는 경고를 무시할 수도 있겠어. 경고가 약했나?”
[에단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어쩌면 처음부터 얌전히 경고를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거점을 옮기면서 원래 추적하던 병력도 빠질 것 같으니 그 뒤를 추적하겠대요.]
“그럼 다음에 연락이 오면 조심하라고 해. 그렇게 당하고도 경고를 무시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지도 모르니까.”
[벌써 말해 뒀죠. 미리 맡겨 둔 스크롤 같은 아티팩트도 넉넉하니까 큰일은 없을 거예요.]
아티팩트도 아티팩트지만, 이미 스스로 알고 대비한다면 어지간해서는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에는 그들이 이드보다 뛰어난 실력자들이니까.
똑똑똑.
“이드 님, 이그렌입니다.”
“들어와.”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그렌이 반가운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틀이나 방에서 나오지 않으셔서 걱정했습니다. 수련은 잘되셨습니까?”
갑자기 자리를 비운 이드를 위해 집사는 수련을 핑곗거리로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나름. 나보다는 이그렌에게 별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걸 보면 내가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야.”
“사실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벤텀 백작이 아버님에 대한 문제를 사무엘 백작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동시에 이그렌이 자신에게 급히 달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무엘 백작의 반응이 걱정된 모양이군?”
“부끄럽습니다.”
이그렌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담이 약한 모습이지만, 아직 사무엘 백작의 손에 시온 자작이 잡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반응도 아니다.
“벤텀 백작을 만나고 사무엘 백작이 별다른 말은 없던가? 한마디 있을 만한데.”
“그렇지 않아도 어제 절 방으로 불러 술 한 잔을 같이 마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오해는 털어 버리고 서로 새롭게 출발하자고.
“흥, 오해는 얼어 죽을 오해!”
이드는 뻔뻔한 사무엘의 말에 콧김을 뿜었다. 가문을 망하게 만들고, 노예로 팔려고 했다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아들을 부린 일이다. 이를 어떻게 오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드는 명명백백한 잘못을 두루뭉술한 말장난으로 넘어가는 사무엘과 같은 자들을 혐오했다. 그런 자들 중 세상에 득이 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자신의 죄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가 무엇인들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을까.
[그게 다예요?]
연신 혀를 차는 이드를 대신해 라미아가 물었다.
“응.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도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 그래서 새로울 건 없는데도 묘하게 좀 달랐어. 특히 이상했던 건 날 보는 눈빛이 바뀐 거야. 이전의 그가 포로를 살피는 감시자 같았다면, 이번엔 좀 달랐어.”
“어떻게?”
“그게…… 말이 안 되지만, 절 보며 흐뭇해했습니다. 마치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요.”
이그렌과 사무엘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드는 묘한 표정을 하고는 말했다.
“잘못 본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그렌이 벅벅 머리를 긁으며 바보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마 가장 믿어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일 것이다.
그 당혹스러운 상황이 답답해서 이드가 나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겠지.
“당장 급한 일은 없으니, 사무엘 백작에 대해서는 내가 한번 알아보지. 백작은 지금 어디 있어?”
“감사합니다. 백작은 저택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을 백작가에서 내보내는 일로 백작가와 연락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그렌의 말을 듣던 이드는 연락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거렸다.
“연락이라면 마법을 이용한 연락?”
“예. 공관에 일리나스와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와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하루 깎지 않은 수염이 까끌까끌하다. 지구에서의 생활로 수염을 깎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다.
푸스스스스
바위를 모래로 만드는 파옥수로 수염을 소멸시켰다. 이드는 수염이 사라지고 매끄러워진 턱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그럼 사무엘 백작이 과연 집에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부터 알아볼까?”
“백작이 사실대로 알려 주지는 않을 텐데요?”
“무슨 소리야? 당연히 몰래 엿들어야지.”
“…….”
엿듣는다는 말을 너무 당당하게 외치는 이드의 모습에 이그렌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가 제국의 명예 후작으로서의 체면은 창고에
처박아 둔 발언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감사하기도 했다.
장난 같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옛 인연 하나를 보고 적극적으로 나서 주는 이드가 너무 고마웠다.
‘아버님의 일만 해결된다면 내 기사로서의 생은 이분들을 위해 살리라.’
이그렌은 말없이 조용히 다짐했다.
이드가 알았다면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을 테지만, 속으로만 다짐한 일이라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그렌의 말대로 얼마 후 사무엘이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내려왔다.
이드가 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다 알려졌기 때문에 사무엘도 외출 전에 이드를 찾았다. 짧게 이드와 인사를 나눈 그는 준비시킨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났다.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마차의 뒤를 따랐다.
공관의 위치는 알기 때문에 먼저 가서 기다릴까 고민했지만, 사무엘이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샐 수 있어서 귀찮지만 마차의 뒤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무색하게 마차는 곧장 일리나스의 공관을 향해 달렸다.
공관에 도착한 사무엘은 이미 이야기가 된 듯 통신구가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은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일로 쓰이는 방이기 때문에 통신구가 있는 방은 사방이 막혀 있고,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드와 라미아에게는 그런 특별한 방의 이야기를 엿들을 방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