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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39화


776화

“이 아래 있군.”

이드는 발아래에 있는 사무엘의 기감을 느끼며 라미아를 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공관의 지붕 위였다.

환한 낮이었지만, 투명화 마법 때문에 공관의 누구도 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왕궁 마법사도 아니고 고작 공관에 상주하는 마법사의 수준으로 라미아의 마법을 꿰뚫어 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요구니까.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드는 편한 마음으로 쪼그려 앉았다. 그 위치가 노린 듯 절묘하게 사무엘의 머리 위였다.

“방음 좋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잠시 귀를 기울인 이드가 말했다. 천시지청술을 시전했지만, 들리는 것은 잡소리뿐. 사무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언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공간이거나 마법이 사용된 곳이라는 뜻이다.

그레이드론의 하트를 가진 이드의 천시지청술은 강력한 내공으로 수비 범위는 넓지만, 아직 천안통이나 천이통 수준에 이르지 않아 이런 곳의 소리까지는 아직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시지청술이 아니라도 건물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들을 방법은 많았다.

“그렇지?”

[물론이죠. 자 골라 보세요. 귀신도 모르게 엿듣는 방법 10선.]

라미아가 상점의 판매원처럼 말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하자. 전에 파티장에서 쓴 거 있지?”

[나노 마이크 말이죠? 탁월한 선택이에요. 아무래도 음질은 유선이 좋죠, 호호호.]

스스로의 농담이 만족스러운지 깔깔거린 라미아가 손을 펼치자 그 안에 눈처럼 돌돌 말린 실뭉치가 나타났다. 바로 파티장에서 라울의 말을 엿들을 때 사용한 나노 굵기의 금속 실이었다. 그 성능이 마음에 들었던 라미아는 그 방법에 나노 마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뭉치를 받아든 이드는 늘어트린 실 끝에 무겁고 사나운 강기의 추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물체에 강기를 형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드는 숨 쉬듯 쉽게 해냈다. 보이지 않아도 라미아 몸의 일부로 만들어진 실의 존재가 강렬하게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

중력의 힘을 빌린 실이 버터를 자르는 뜨거운 칼처럼 쉽게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결계처럼 방을 두르고 있던 사일런스 마법도 실을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내려갔을까. 금고를 따는 도둑처럼 신중히 실을 다루던 이드는 어느 순간 실 끝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아버지.”

그와 동시에 실과 라미아를 거쳐 낯선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사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시디푸, 아들아.”

장남을 향한 사무엘의 목소리는 아무런 꿍꿍이 없이 인자했다. 이그렌에게는 아버지를 인질로 잡은 죽일 놈의 인간이지만, 그도 결국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초장거리 통신에 급격히 소모되는 마나는 잡담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짧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후 사무엘이 바로 연락을 한 이유를 말했다.

“내가 시킨 일은 잘 준비하였느냐?”

“예. 고모님께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왕궁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시온 자작을 왕궁으로 호송할 테니, 즉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요.”

“쯧쯧, 역시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오기 전에 확실히 일을 만들어야겠다.”

“예. 그래서 연락을 받고 바로 자리를 만들어 시온 자작과 인사할 자리를 만들었는데, 다행히 고모님도 시온 자작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가장 아끼는 제자의 어미가 될 기회가 어디 흔하다더냐. 거기다 곧 왕국에서 대대적으로 지원할 가문이 마련한 선물입니다.”

“그럼 왕궁에서 내려오기 전에 써라. 가능하다면 분위기를 보고 왕궁으로 떠나는 날까지 둘이 밤을 보내게 만들어라.”

“그러기 위해서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파티에서 이어지는 밤이라면 시온 자작도 약 기운 때문이라고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술수에는 그런 꼼꼼함이 꼭 필요하지. 네가 잘 배우고 있는 것 같아 기쁘구나.”

“감사합니다.”

그때 감사를 말하는 시디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통신구를 유지하는 마나가 다 소모되어 간다는 신호였다.

사무엘은 시디푸에게 재차 빈틈없이 준비하라 당부하고 통신을 마쳤다.

이드는 그가 방을 나가는 소리까지 확인한 후 나노 마이크를 거두었다.

“이그렌 녀석, 사무엘이 할아버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본다고 했던가? 감 좋네. 할아버지뻘은 아니라도 시온 자작이 결혼하면 사무엘 백작은 외삼촌이 되어 가족이 되는 거니까 말이야.”

이드는 통신을 마치고 공관의 주인인 벤텀 백작을 만나는 사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등 뒤에서는 시온 자작을 빼앗기지 않으려 혼인 준비를 하고, 앞으로는 벤텀 백작과 웃고 있으니. 그의 정치력도 결코 무시할 것은 안 된다.

최소한 정치인의 기본 스킬인 철면과 뻔뻔함은 가졌으니까.

[그나저나 이그렌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네요.]

“어쩌긴. 분해서 부들부들 떨거나, 기절할 듯 놀라겠지.”

그러나 이드와 라미아의 예측은 모두 틀렸다.

이드의 설명을 들은 이그렌의 반응이 묘했기 때문이다. 분노도 경악도 아닌 그럴 리가 없다는 기묘한 표정.

“정말 시디푸의 고모와 아버님을 혼인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단 말입니까?”

“분명 그렇게 들었지. 그걸 위해 불타는 밤을 보낼 약도 준비했다더라. 그런데 반응이 왜 그래?”

“아니, 그게…… 제가 알기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왜? 정략결혼은 귀족가의 기본이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아는 시디푸의 고모는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 그럼 다른 고모인가 보지.”

이드가 눈을 한 바퀴 돌리며 말하자, 이그렌이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사무엘 백작의 형제는 여동생 하나뿐입니다.”

“그럼 지금 시온 자작과 결혼시키려는 고모는 누구야?”

“그러니까요.”

잠깐 정체불명의 고모에 대해서 고민하던 이드는 곧 고개를 저었다.

“에이, 누구면 어때? 어차피 강제로 시온 자작과 혼인시키려는 상대인데, 갑자기 양녀를 들였을지도 모르지. 좌우간 네 생각은 어때? 아버지 새장가 말이야.”

“목숨 걸고 반대할 겁니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약을 사용한 사기니까요. 만약 하게 되더라도 진실을 알면 아버지는 파혼하실 겁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잘못된 결혼을 유지하실 이유가 없지요.”

“음, 그 부분에 대해서 나도 생각해 봤는데. 설마 사무엘 백작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를 모르고 이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 당연히 다른 대비책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가령, 네 동생 같은 거 말이야.”

이드는 말과 함께 양손으로 배를 남산만 하게 부풀려 보였다.

그에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던 이그렌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싫네요. 사무엘 백작가의 피가 섞인 동생이라니. 그런데 임신이 그렇게 쉽겠습니까? 아버지께는 좀 죄송하지만, 나이도 있으시고 마음고생까지 심하게 겪으셔서・・・・・・ 젊을 때처럼 힘 있고 왕성하지 못하십니다.”

이그렌은 부친의 생식 능력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민망한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드가 보기에 그것은 중요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피가 섞였다는 증거이자 상징과 같은 아이의 존재는 파혼을 막는 확실한 방패막이가 될 테니까.

‘그래서 자작이 황궁으로 가는 전날까지 동침시키라고 한 것일 테고. 하지만 임신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런데 사고만 치면 모든 게 마무리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임신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이 있거나, 아니면…….?

“……이미 임신한 여성을 자작과 동침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겠어.”

이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그래도 귀족의 품위를 따지는 자인데……”

“안 될 것도 없지. 이미 결혼한 여자를 시온 자작의 혼인 상대로 거론하는 순간부터 품위는 없는 거야. 아니다. 그 전에 약을 쓴다는 시점에서 틀려먹었네.”

그래도 설마설마하던 이그렌은 이드가 그의 말을 단호히 부정하자 안절부절못하다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기 시작했다.

극도로 불안해지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왜 그렇지 않을까. 까딱 잘못하다가는 원수의 가문이 외가가 되어, 사무엘 백작을 외삼촌이라고 불러야 할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하지만 당장 이그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장 제국과 왕국을 가로질러 시온 자작에게 달려갈 수도 없고, 연락해서 술과 여자를 조심하라고 말해 줄 수도 없다.

“이드 님,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그렌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옆에 있는 이드뿐이었다.

이드는 이그렌의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 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이럴 때를 위해서 보험을 준비해 둔 거니까.”

“아! 엘프!”

이전 이드가 했던 말을 떠올린 이그렌의 얼굴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당시 이드는 시온 자작의 안전을 위해 일리나의 마을에 있는 엘프들을 움직였다고 했었다.

“아, 다행입니다. 그분들이 아버지를 지켜 주신다면 큰일은 없겠네요.”

“그렇지. 그러니 맘놔.”

엘프들의 실력을 알고 있는 이드는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라미아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정말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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