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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4화


471화

전날 떠들썩한 일이 있었지만 엘프 마을의 아침은 평소와 같았다. 빠르고 고요하다. 어제의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 지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일리나의 집도 다르지 않았다.

일리나의 집 앞마당에 나와 명상을 하던 이드가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가끔 늦잠도 자고 게으름을 피울 때도 있지만, 맑은 새벽의 명상은 웬만해서는 거르는 법이 없다. 이미 내공운기로 기운을 기르는 단계를 지난 이드에게는 정신과 마음을 단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물론 내공운기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작은 시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하나하나의 호흡이 모여 내력이 쌓이는 것과 같이 일단 운기를 하면 내력이 쌓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양이 너무 적다. 큰 호수에 물 한 바가지를 더한다고 티가 나지 않듯이 말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화경의 경지에 들게 되면 화경에 오를 때처럼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어 도약하기를 바란다. 그 한순간의 도약은 비약적인 내력의 증가와 발전을 가져오는 동시에 엄청난 정신적 희열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련자들에게 끊을 수 없는, 마약 이상의 쾌락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은 쉽게 오지 않는다. 그렇게 쉽다면 애초에 깨달음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고, 정신을 단련하며 명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드는 내력 면에서는 다른 수련자들과 다르게 자유로웠다.

그레이드론의 하트가 있었기 때문에 내력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그의 명상은 온전히 한 단계 위로의 도약을 위한 것이며, 이드 무공의 핵심 키워드인 의형강기를 가다듬기 위한 수련이었다. 전투시 이드가 보이는 공격이 살아 있는 듯 분명한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의형강기에 있다.

의형강기는 무림에서도 초극에 속하는 신공절학이었다. 의형강기 자체가 그렇기보다는 그러한 기법을 포함한 무공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신공절학 안에서만 의형강기가 자유롭게 운용이 가능하다는 말과도 같았다.

의지를 강기 위에 덧씌운다. 의형강기에 대해 기술하는 내용 중 절대 빠지지 않는 말이었다.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강기의 형태는 분명해지고, 안으로 압축된 강기는 강력해진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에 좀 더 유연한 반응과 형태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의형강기를 발현하고, 유지하고, 발출하기 위해서는 강대한 내공은 물론이고 거대한 바윗돌 같은 정신력이 필요했다.

명상은 이를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수련 방법이었다.


“후.”

이드가 모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일어나 몸을 풀었다. 까맣던 하늘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도 날씨는 정말 좋겠구나.”

푸른 나무 마을에 온 이후로 하루도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 인생도 저러면 참 좋을 텐데.”

전날 시르피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다. 시르피와 자신을 찾기 위해 시온에 들어와 있는 자들을 생각하니, 맑은 하늘과는 달리 이드의 마음속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

이드는 집 앞을 지나가는 엘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일리나와 라미아가 일어났는지 안쪽에서 작은 대화 소리와 함께 달그락거리며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은 소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런 아내를 얻을 수 있다면 고생을 좀 해도 괜찮다 싶었다.

“이야, 냄새가 맛있는 게 너무 좋은걸요. 좋은 아침이에요, 일리나, 라미아.”

“일찍 일어났네요.”

[이드, 이리 와서 앉아요. 일리나가 스프를 맛있게 만들었어요.]

웃으며 들어오는 이드를 일리나와 라미아가 맞았다.

“그래? 이거 기대되는데.”

이드는 간단히 손을 씻고 일리나가 주는 스프 접시를 들고 탁자에 앉았다. 그 뒤를 따라 일리나가 이드가 가져온 과일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와 과일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맞은편에 앉았다.

“음, 정말 맛있는데요. 익숙한 맛도 나고.”

스프를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의 앞에서 라미아가 한쪽 날개로 V자를 만들어 보이며 자랑했다.

[처음 맛이 좀 약한 것 같아서 지구에서 가져온 스프 가루를 좀 넣었어요. 아무래도 복잡한 일이 있을 때는 잘 먹어야 할 것 같아서요.]

“어쩐지 익숙한 맛이 나더라. 크큭,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에헤헤. 당연한걸요.]

“스프가 맛있어서 아쉬워요. 라미아도 함께 먹을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일리나도 스프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지구의 스프는 엘프인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맛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맛이 좀

강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게요. 일단 저도 같은 생각이라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네요. 하지만 곧 될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 라미아.”

라미아는 아직 먹지 못한다. 덕분에 식사 시간에는 대화만 하며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그게 먹는 사람이나 기다리는 그녀나 여간 어색한 시간이 아니었다. 이드는 최근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명상 수련의 시간을 조금 더 늘려 볼까 생각했다. 라미아의 변신. 의형강기보다 더욱 신경 쓰고 있는 명상 수련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기대할게요, 이드]

이드가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스프를 더는 이드 앞으로 일리나가 과일을 깎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나갈 땐 저도 같이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먼저 얘기를 하는 건 둘째 치고, 이건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닌 통보였다. 사실 이드는 어제 에단이 말한 소드

팰러스를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드의 성격에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이드에게 라미아가 헛고생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녀 말대로 자기 성격에 시르피의 일을 눈감고 넘길 수 없다면, 차라리 일찍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방향을 정하자 라미아와 같이 이드의 생각을 읽은 일리나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그러니 좀 더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자고 대화를 미뤘다.

지금 일리나는 그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벌써 결정을 내린 거예요?”

“하루면 충분해요.”

생각만 확실하다면 일 분도 긴 시간이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아무래도 초인들과 부딪힐 것 같기도 하고…………… 쉽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그동안 저도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수련은 충분히 했으니까요. 이드의 발목을 잡진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이상의 상황이 온다면 이드가 지켜 주지 않겠어요?”

일리나의 말대로였다. 엘프들에게 무공을 전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것도 일이 년 전이 아니라 까마득히 오래전의 이야기다. 그 사이 그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세상에 나가서 실력을 보인다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강자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드가 곤란한 듯 뒷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좀 더 그녀를 말려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일리나의 눈을 보고 말리기는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드는 살짝 일어나 연극 무대의 배우처럼 한 팔을 멋지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훗, 나의 공주님을 지키는 것은 나만의 기쁨이랍니다.”

“호호호.”

[칫, 나는요!]

장난 같은 이드의 모습에 일리나가 웃었다. 라미아는 자리에 앉은 이드의 손을 치면서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은 없느냐며 투덜거렸다. 일단 시르피의 일로 나가 보기로 결정은 했지만 당장 나갈 수는 없었다.

지금 시온에 커다란 골칫덩이가 몇 개 들어와 있기 때문이었다. 트와이스와 같이 이드를 포섭 또는 확보하기 위해서 각국에서 파견된 특수 기사단들이 문제였다.

이드가 숲을 떠났는지, 아니면 그대로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 그들은 이드의 흔적을 찾을 때까지 계속 이 시온을 뒤지고 다닐 게 뻔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혹시라도 그들이 푸른 나무 마을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을에 큰 위기가 될 수도 있다.

푸른 나무 마을의 존재를 알게 된 그들의 상부에서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을의 존재를 아는 순간,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푸른 나무 마을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었다.

뭐, 운이 좋아 침입자들이 몬스터에 의해서 모두 전멸하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현재는 시온의 모든 몬스터가 버서커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성 높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으면 어차피 그들을 대신할 인원이 다시 내려올 것이다.

결국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세 사람은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었지만, 딱히 이거다 할 만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답을 꼭 안에서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안에 있는 것만으로 안 되면 외부의 것을 빌려오면 된다. 세 사람은 나란히 집을 나섰다.

“아, 오늘 햇살이 정말 따뜻하고 좋아요.”

[정말요. 날개 말리기 딱 좋은 날씨예요.]

“……………너, 설마 날개에 녹스는 건 아니지?”

퍽.

결국은 한 대 맞았다. 숙녀의 몸을 두고 할 말이 아니란다.

‘넌 새가 아니잖아.’라는 말은 가슴에 고이 묻어만 두었다. 그 말을 했다가는 한 대 더 맞을 것 같아서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새의 몸에 머물고 있는 것도 결국 이드의 능력 때문이니 말이다.


“그래, 그 말이 맞아. 확실히 그들을 그냥 시온에 내버려 두는 것은 문제가 있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우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엘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이드를 찾아온 일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네가 당분간 외부에 나가 있는 상태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면 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당장 어제의 테이처럼 누군가 납치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일도 있을 수 있다. 우디는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드도 우디의 그런 생각을 잘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시온을 나서기 전에 그들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적당한 방법이 없을까요, 장로님? 저희들끼리 먼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죠.”

“으음.”

이드의 말을 들은 우디가 가만히 입을 닫았다. 어느새 그는 단봉을 꺼내 들고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라일로시드가에게 이 단봉을 건네받은 후 생긴 그의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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