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42화
779화
부전자전. 과연 이그렌의 아버지다운 대답이었다.
저건 이그렌 때문에 참는 것이 아니다. 정말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라면 아들이 아무리 말려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그렌의 의견에 따르겠단다.
숨은 속내를 눈치챈 이드가 말했다.
“혹시 작위를 승계하려 하십니까?”
“허허, 명예 후작님께서 벌써 제 속마음을 읽으시는 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사무엘 백작을 상대로 힘없이 휘둘린 저보다는 이그렌이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낫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참에 마침 명예 후작님이 이그렌의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시니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예 후작님의 후광에 기대려는 못난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 입으로 못났다 말하는 자작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담겼다.
이드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서 말했다.
“이그렌이 제게 무공을 배운다는 사실이 힘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런데 정말 복수는 마음에 없으십니까? 백작가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없을 수 없지요. 하지만 가문에 속한 사람으로서, 가주의 뜻을 따라야지요.”
자작은 절차만 거치지 않았을 뿐 이미 이그렌에게 작위를 넘긴 듯이 말했다.
“이그렌도 그렇고, 자작도 참 대단하십니다.”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자꾸 복수를 권하는 자신이 너무 독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정상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가문을 철저히 부숴 놓다 못해, 자신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려던 상대를 죽이지 않는 두 사람이 이상한 것이지.
어쩌면 그것은 이그렌이나 자작이 세상의 일에서 멀어져 조용한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중간한 마무리가 더 큰 원한과 복수의 불씨가 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원한을 청산하는 자들의 손속이 괜히 독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 게덴 부인의 일은 어쩌시렵니까?”
“그에 관한 일은 그저 이드 님의 도움을 바랄 뿐입니다. 가문 이전에 저 개인적으로 결코 유쾌하지 않은 수작입니다.”
과연 시온 자작도 자신의 혼인이 걸린 일에는 무당파의 도사 같은 태도는 유지하지 못했다.
“돕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직접 관여할 수는 없어요.”
“이해합니다. 이드 님이 나서시면 이번엔 사무엘이 아니라 왕실에서 절 잡고 놓으려 하지 않겠지요.”
자작은 이드의 말귀를 빠르게 알아듣는 듯했다. 노예로 팔려 가기 전에 인질이 되어 백작가에 잡혀 있기는 했지만, 그도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엘프들도 곤란해요.”
“설마 엘프분들께서 절 지켜 주시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따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이러니 인사는 제가 대신 전하는 걸로 하죠. 어쨌든 이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해결할 생각이에요.”
“무슨 뜻인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거 없지요. 간단해요. 자작이 약에 당하지 않게 하고, 최대한 빨리 왕궁의 인물들을 불러오는 것이죠. 자작이 게덴 부인이란 여자와 특별한 일 없이 왕궁으로 간다면 끝날 일이니까요.”
“과연 옳으신 말씀입니다.”
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지만, 자작은 현자의 지혜를 구한 모습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자작이 묻자 이드가 라미아에게 새끼손톱만 한 은덩이를 받아 자작에게 주었다.
“파티에 가기 전에 삼키세요.”
꿀꺽!
그 말과 동시에 자작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물 한 잔의 도움을 받아 은을 삼키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이드를 보며 말했다.
“삼켰습니다. 이게 어떤 물건입니까?”
이드는 자작의 질문에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그것도 모르고 드셨습니까? 독이면 어쩌시려고.”
“저 하나를 죽이는데 아깝게 독을 쓸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걸 강단이 있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백작가로부터 지속적인 견제와 탄압을 받아서 그렇지, 이 양반도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배짱이 대단하십니다. 역시 작위 승계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혀를 내두른 이드의 말을 라미아가 이어 받았다.
[지금 자작의 뱃속에 든 캡쳐는 자작의 내장을 보호하고, 이후 자작의 입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을 마나 실드로 감싸서 격리시키는 아티팩트에요.]
“아무리 음식과 약을 먹어도 흡수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제가 취하지 않으면 저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습니까. 왕실의 사람이 오늘내일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죠. 그리고 왕실의 사람은 자작의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게 만들 겁니다.”
“도착하게 만든다 하셨습니까?”
“네. 여기 라미아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맡겨 주세요.]
이드가 믿음직한 얼굴로 라미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을 때, 별채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작을 파티장에 데려갈 사람들이 온 모양이네요.”
“허허, 그렇게 가기 싫던 파티였는데 오늘은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군요.”
자작이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드가 그것을 제지하며 말했다.
“보통 먼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보통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들은 게으르답니다.”
즉, 올 때까지 꼼짝도 않는다는 소리다.
“그럼 그냥 평소처럼 하세요. 저와 라미아는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할 테니까요.”
이드는 말과 동시에 만류일품의 은신술을 사용했다. 뒤로 물러서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오오, 마법 같은 무공이군요! 저에게 그런 무공이 있었다면 진작 이 감옥에서 도망갔을 텐데………… 아쉽군요.”
“며칠 후며 무공 없이도 여길 떠나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겁니다.”
이드가 말을 마치는 순간 쿵쿵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온 자작님, 파티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자작의 허락도 없이 활짝 열린 문 뒤에는 두 명의 기사가 있었다. 그들에게 그 무례는 극히 당연한 것인 듯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자작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왜 오지 않나 했지. 자, 가세.”
“…..”
평소와 다른 자작의 반응에 두 기사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지만, 곧 의문을 지우고 자작을 연행하듯 호위하며 별채를 나섰다.
이드도 그들의 뒤를 따라 별채를 나와서 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드가 천천히 은신술을 해제한 덕분에 이번엔 놀라지 않은 윌이 말했다.
“자작과 이야기는 잘 하셨습니까?”
“필요한 이야기는 나누었어요. 엘프 전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더니,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걸요. 직접 보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이드가 그렇게 말하자 윌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이드의 부탁으로 하는 일이지만, 어쨌든 감사의 인사가 기분 나쁠 이유는 없으니까.
이드는 윌과 함께 자작이 호출된 파티장이 보이는 지붕으로 위치를 옮기며 라미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미리 세워 놓은 계획대로 따로 떨어져 각자 맡은 일을 해야 했다.
“적당히만 해. 이상하다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크게 티만 내지 마.”
[걱정은 전~혀 쓸데없으니까 믿고 맡기세요.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 올 테니까.]
가슴을 두드리며 탕탕 큰소리를 친 라미아는 곧 골렘을 아공간에 넣은 후 은빛 화살이 되어 하늘에 구멍을 뚫을 기세로 쏘아졌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윌이 말했다.
“왕실에서 출발한 호위대를 찾아가는 거겠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들이 최대한 빠르게 도착하도록 만들 겁니다. 라미아에게는 쉬운 일이죠.”
이드는 말과 함께 멋지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어지는 윌의 말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럼 아루스한이 있는 북서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저긴 그냥 북쪽인데…….”
‘라미아……! 그쪽이 아니래!’
다음 순간 북쪽 하늘을 향해 날던 은색 빛줄기 하나가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허둥지둥 날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르던 은색 빛줄기가 풍기던 신비로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성의 연회장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며 파티가 시작되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백작가 사람들로, 홈 파티에 가까웠다.
백작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 자작이 참석하는 파티에 외부 손님을 초대해 봐야 자작과 친분을 쌓으려고 달려들 테니, 백작가로서는 좋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있어서는 자작을 혈족으로 품으려는 계획에 방해만 될 뿐이다. 그래서 시디푸는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작은
파티를 준비했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들을 파티에 참석시켜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고모와 자작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상황과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자작이 백작가의 계략을 안 순간 이미 그의 계획은 실패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작은 물과 기름처럼 파티에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이전이었다면 자신의 행동 하나가 이그렌에게 피해를 끼칠까 조심했지만, 이젠 그런 생각을 버렸다. 이드가 이그렌의 곁에 있는 한 누구도 이그렌을 해하지 못할 테니까.
또 지금도 이드와 시온 숲의 엘프 전사들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시디푸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시온 자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자가 오늘따라 왜 저렇게 여유롭지? 혹시 밖의 소식이라도 접한 건가?’
그러나 시디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외부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지 않았던가.
거기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고모부가 될 사람을 신문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자작이 적당히 취하길 기다리긴 어려울 것 같으니 바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고모님.”
시디푸는 미리 준비한 와인병을 들고 자작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이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함께하고 있었다.
“저 여자가 게덴 부인이구나. 약을 쓰는 이유가 있네.”
연회장의 창을 통해 내부를 살피던 이드는 자작에게 접근하는 게덴 부인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화려한 옷과 빛나는 보석으로 꾸몄지만,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다.
백작가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자작이 저 여인과 하룻밤 화끈한 사고를 치게 만들려면 술에 더해서 약이 필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이드가 지켜보는 사이 자작에게 다가간 시디푸가 게덴 부인을 자작에게 소개하며 와인을 권했다.
하인을 시키지 않고 그가 손수 들고 움직일 정도로 좋은 와인이었지만, 그걸 보는 자작의 시선은 떨떠름하다.
와인 안에 독약을 탔으니, 아무리 천상의 맛을 담은 와인이라도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백작가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말도, 이드가 왔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자작은 착잡한 표정으로 시디푸가 주는 와인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부디 아티팩트가 잘 작동하기를…………… 절대로 저 여자와 동침하고 싶지는 않군.’
살그머니 심호흡을 한 자작은 시디푸와 건배를 한 후 단숨에 잔을 비웠다.
따악!
“독약을 마시려면 똑같이 마셔야지. 안 그래?”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가 시디푸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