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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46화


783화

쿵.쿵.쿵.

거친 발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산적처럼 고슴도치 수염을 한 거한이 얼굴을 내밀었다.

꽤나 다혈질에 성격 급해 보이는 얼굴을 한 수염 거한은 이드의 모습을 대충 살피고는 말했다.

“소영주가 파티에 참석하라고 전하러 온 거라면 참석하지 않겠다고 전해라.”

수염 거한은 이드를 성의 하인으로 여긴 것 같았다.

“다른 일로 찾아왔습니다.”

“그러냐? 누구의 전언이냐?”

“그 전에 기사님께서는 오늘 왕실에서 오신 높으신 분들이 맞으시지요? 시온 자작님을 왕실로 데려가실 분들 말입니다.”

“으흐흐, 그래. 잘 봤다. 내가 바로 질풍 기사단의 보바르 님이시지.”

보바르는 휴식을 방해받아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잊은 듯 음흉하게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완전히 열리지 않은 문 뒤에서 클클거리는 웃음소리가 났다.

보바르와 함께 깨어 있는 기사들의 웃음소리였다.

“그럼 안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기사님께서 모셔 갈 시온 자작님이 위험하다고 전해드리려 찾아온 것이니까요.”

이드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안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도, 보바르의 음흉한 웃음도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이놈!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왕궁으로 가셔야 할 자작님의 발목을 잡으려고 백작가에서 수일 전부터 약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반쯤 열렸던 문이 활짝 열리며 코롤이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단단하게 검이 잡혀 있었다.

“백작성에 있는 어지간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자작님을 파티에 불러 약을 마시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약인지는 아느냐?”

“사람을 발정 난 짐승으로 만드는 약입니다.”

“쯧, 천박한 수를 쓰는군.”

코롤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하지만 긴장으로 굳은 표정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자작에게 사용되는 약이 생명을 위협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백작가에서 자작에게 손을 댔다는 것은 분명 왕실에 충성한 기사로서 거슬리는 일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런 약을 쓴다는 것은 백작가가 왕실이 가지려는 자작에 대한 지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와도 같기 때문이다.

“으흐흐, 천박하면 어떻습니까. 좋은 걸 준다는데 그저 마시고 즐기면 되지. 그런 위험이라면 저는 매일이라도 즐기겠습니다.”

“보바르, 기사로서 체면을 지키게.”

“예, 예. 흐흐흐,”

이드는 별로 반성하는 기색이 아닌 보바르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즐기다 보면 아이라는 책임이 따를 텐데요?”

“아이는 많을수록 좋지. 내 피를 이었다면 뛰어난 기사가 될 거야.”

“기사님을 닮았다면 그렇겠네요. 그런데 아이가 기사님 피를 타지 않았으면 어쩝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자작님과 짝지으려던 분께서 알고 보니 이미 임신을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런 시펄…….”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까. 안색이 시퍼레진 보바르가 흉흉한 눈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카악~ 퉤! 그런 것들이라면 우선 팔다리를 잘라 매달아 놓은 후에 이야기를 해야지.”

비록 표현이 거칠었지만, 남자로서는 같은 생각일까. 코롤은 보바르를 제지하지 않고 이드를 보며 물었다.

“그 말도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첫 시도가 실패한 후에 다녀가신 신관님도 아시는 일입니다. 신관님이 그 부인의 임신을 진단하셨으니까요.”

“인정하지. 확실히 자작은 가문의 혈통이 끊어지고, 모든 영광을 가로채일 위험에 처했군.

“맞습니다. 그러니 어서 가서 구해 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전하는 자네는 누구인지 궁금하군. 가능하다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싶고.”

말은 양해를 구하는 것이지만, 결과는 그렇게 얌전한 것이 아니었다.

슈슉~

그것을 증명하듯 코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드를 잡기 위해 보바르가 손을 뻗었다. 코롤이 상대의 시선을 끌고 허술해 보이는 보바르가 은밀히 기습하는 이런 패턴은 의외로 잘 먹혀 왔다.

후웅~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잘 먹힌다고 이드에게도 먹힌다는 말은 아니었다.

보바르가 행동하려는 순간 단전의 내력이 꿈틀거렸고, 그 희미한 파동은 읽은 이드는 그보다 두 호흡 먼저 움직였다.

이드의 무릎이 살짝 굽혀지자 마치 뒤에서 잡아당긴 듯 이드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는데, 이드는 이미 긴 복도 한중간에 서 있었다.

이드를 잡으려던 보바르의 손끝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며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움직인 것인지 모르겠군.’

코롤의 얼굴이 굳었다. 태연한 얼굴로 백작가의 정보를 전하기에 심상치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자신이 움직임조차 읽지 못할 정도라니. 

“이런, 실망입니다. 당장 자작님께 달려가셔야 할 분이 정보 제공자를 핍박하시다니요.”

“정보 제공자가 확실하지 않으면 정보와 함께 제공자도 확보하는 것이 정해진 절차라서 말이지. 한데 잡을 수 없을 것 같으니 포기해야겠지?”

“단장님!”

판단이 빠른 코롤은 이드를 잡겠다는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오히려 틈을 노리고 있던 보바르가 놀라 돌아보았지만, 코롤은 그런 반응을 무시했다. “상황 판단이 매우 적절하십니다.”

“칭찬은 고맙군. 대신 누군지는 밝혀 주지 않겠나. 자작도 자신을 도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야지.”

“자작님이라면 절 아실 겁니다. 그래도 물으시거든 인자한 영주님께 은혜를 입은 옛 영주민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말과 함께 만류일품을 사용한 이드의 모습이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은혜 갚기라고? 흥, 개도 믿지 않을 수작이지.”

“사실일 수도 있다. 듣기로 자작이 영지를 매우 아꼈다고 하니까.”

“그보다 어째서 그렇게 쉽게 포기하신 겁니까?”

“그자의 말대로 적절한 판단을 한 거지. 자넨 그자를 잡을 자신이 있나? 난 없는데.”

먼저 두 손을 들어 버린 코롤의 말에 보바르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렇게 말을 하는 이상 오기로 잡을 수 있다고 했다간 코롤의 실력을 깔아뭉개는 것이 될 테니까 말이다.

코롤은 조용해진 보바르의 모습에 이드가 사라진 자리를 살폈다.

‘이드 명예 후작 말고 자작가를 지켜 줄 힘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 아니, 어쩌면…….’

“명예 후작이 보낸 자일 수도 있을까.”

“저자가 제국에 있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붙여 준 자라는 말씀입니까? 설마요. 차라리 제국으로 데려가고 말지. 저런 실력자를 여기 붙여 두는 건 엄청난 인력 낭비입니다.”

“뭐, 만약의 가능성이라는 것이지. 아닐 가능성도 높아. 내가 알기로 명예 후작 주변에는 아직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사람이 없다고 계속 없으란 법도 없다. 코롤이 그런 사실을 접한 후 따르는 자가 생겼을지 모르고, 또 홀연히 대륙에 나타난 명예 후작처럼 어디서 갑자기 명예 후작의 부하를 자처하는 자들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명예 후작과 함께 나타난 후작부인처럼 어딘가에는 다른 가족과 식솔들, 부하들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말이다.

“쯧,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지. 준비해라. 파티장으로 간다.”

“준비 벌~써 끝났습니다.”

말과 동시에 안에 남아 있던 세 번째 기사가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나오며 그중 한 자루를 보바르에게 던졌다. 기사의 첫 번째 준비물은 언제나 검이지 않겠는가.

“다른 놈들은 깨우지 않습니까?”

“왜, 백작가에서 칼이라도 들까 무서운가?”

보바르에게 검을 던진 기사, 록코스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하자 보바르가 검을 어깨에 척 기대며 비웃음을 흘렸다.

“흥, 백작가 놈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런 용기는 없지.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는 호위대를 치는 것은 곧 반역이니까.”

“훗, 그럼 지친 아이들은 두고, 백작가에 우리 임무를 방해하는 반역자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러 가도록 하지.”

코롤이 거침없이 파티장을 향해 나가자 록코스와 보바르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드는 그들과 한걸음 떨어져 세 사람의 모습을 살피며 쫓았다.

파티장으로 향하는 세 사람은 농담과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드는 그런 세 사람의 행동이 정치적인 계산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눈치챘다. 이런 기사들을 호위로 보낸 걸 보면 일리나스의 왕이 시온 자작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왕궁에서 자작이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물론 백작가가 사용한 것처럼 지저분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드도 딱히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강제되지 않은 혼인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이니까.


그 시각.

시디푸는 시온 자작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있었다.

“하하하, 파티가 즐거워서 그런지 술이 술술 넘어가는군요.”

“……”

시온 자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갖은 핑계와 건배로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한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하다니.

시온 자작은 몸에서 나는 열이 술에 탄 약 때문인지, 시디푸에 대한 화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어차피 이 파티장에 그의 편은 없었다. “호호. 자, 자작님. 다시 건배해요.”

“즐거운 파티와 맛있는 술을 위해!”

당장 시디푸를 제외하고도 자작의 옆에 들러붙은 두 여자가 잔을 들었다. 시디푸가 자작에게 소개한 후부터 자작의 양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자들이었다.

시디푸가 신경 써서 뽑아 온 만큼 게덴 부인보다 훨씬 젊고, 아름답지만 시온 자작이 보기에 게덴 부인과 하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젊고 빼어난 청년과의 사랑을 꿈꿔야 할 나이의 여자들이 무엇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에게 몸을 던지고 있는지. 불쌍한 한편 몸에 뿌린 향수가 고약한 악취가 되어 콧구멍을 괴롭혔다.

이런 것이라면 감옥 대신 사용되고 있어도, 편히 숨쉴 수 있는 자신의 방이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드가 그만해도 좋다는 허락을 할 때까지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시온 자작은 어서 빨리 이드가 방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해 주길 바라며 술잔을 들었다.

그나마 술맛이 좋아서 다행이다. 약이 들었다는 사실이 찝찝해서 그렇지 와인의 맛은 시디푸가 말하는 것처럼 훌륭했으니까.

이 향과 맛이라도 없었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와인이 입으로 들어오지 않지?’

그런 생각으로 눈을 뜬 시온 자작의 눈에 자신의 술잔을 잡고 있는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손과 그 손의 주인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처음 뵙겠습니다. 자작님을 수도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임무를 받은 코롤 콘 남작이라고 합니다.”

“아, 남작이 바로 호위대의 책임자인……?”

“제 소식은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런데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술은 그만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코롤은 말과 함께 단호한 힘으로 자작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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