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52화
789화
황녀는 자신의 방문을 크게 티 내지 않고 방문했다.
‘즉, 개인적인 방문이라는 뜻이지.’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검후를 찾는 일에 협력하고 좋은 정보도 주었지만, 검후와 일리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가까이 할수록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황녀 전하.”
“환대에 감사해요, 명예 후작님. 그리고 후작 부인.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지 않으셨나요?”
[황녀 전하의 방문이니, 놀라기 보단 영광이겠죠.]
라미아가 집사 대신 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명예 후작께서 수련이 끝나셨다고 하기에 와 봤어요. 그런데 손님을 만나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던데, 그렇지 않은가 봐요?”
“오늘은 유독 끈질긴 손님들이 많아서요. 그냥 두면 집사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얼굴만 보고 있습니다.”
“호호, 명예 후작님은 좋은 고용주셨군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말이라고 까르르 웃은 황녀는 라미아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은 명예 후작께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
‘이봐. 이봐. 역시 귀찮은 일을 들고 왔잖아?’
이드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의 부탁이다. 골치 아픈 일일 것이 뻔하다.
“일단 들어보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죠.”
이드가 슬쩍 한발을 빼며 말했다. 황녀도 그런 사실을 알았지만, 일단 듣고 결정하겠다는 말에 만족한 듯 말했다.
“아직 발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이번 토벌대에 저도 참가하게 되었답니다.”
그녀의 말에 라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녀님께서 직접이요? 황제 폐하가 허락하신 일인가요?]
“폐하께서 제게 맡긴 임무랍니다.”
황제는 미완의 마탑이라는 이 완벽한 악당을 토벌하는 커다란 이벤트에 제국의 용사들과 함께 황실의 이름이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러자면 황실의 일원이 토벌전에 함께해야 했다. 단순히 황실 기사단의 참가는 의미가 없었다. 제국에서 유명하다 싶은 기사단은 대부분 참가하는 데다, 오색 기사단도 참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 기사의 성지, 소드 팰러스의 오색 기사단의 명성은 황실 기사단도 넘어선다.
그렇다고 나라의 운명이 걸린 국가 간의 전쟁도 아닌데 황제가 친정을 하기에 토벌전은 너무 가볍다. 그리고 이런 경우 황제를 대신하는 황태자는 참전하기에 아직 너무 어렸다. 방계 황족을 쓰기도 조심스럽다.
미래가 어떻게 될 줄 알고?
행여나 권력이 밖으로 흐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황제였다.
그래서 황제가 최종적으로 토벌전에 참여시킬 사람으로 선택한 것이 황녀였다.
선택하고 보니 매우 좋은 결정이었다. 황제의 딸이니 황권의 누수도 없을 것이며, 여성이라는 점은 토벌에 참가하는 많은 용사들의 우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영웅이 되어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로망 아니던가!
비록 수많은 기사들과 오색 기사단까지 참여하는 토벌에서 주인공이 되긴 힘들어도, 불꽃같은 활약으로 황녀의 눈길을 받고 싶은 자들이 많을 것이다.
“좋아, 아~주 좋아.”
이 결정을 내린 황제는 완벽한 일석이조의 효과라고 자찬했다는 후문이 있다.
당사자로서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 들은 황녀는 처음에 이를 굉장히 반겼다. 그러나 곧 자신의 역할이 전장을 장식하는 꽃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심에 빠졌다.
스스로 열심히 무공을 수련한 만큼 단순한 꽃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노력하고 수련한 성과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수련자로서는 당연한 욕심이며, 인간으로서 힘이 생겼다면 사용해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그리고 그녀도 많은 수련자들처럼 실전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녀가 검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게 막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그녀를 아끼는 황제는 그녀의 주변에 기사로 인의 벽을 쌓을 것이 분명했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이번이 아니면 앞으로도 영원히 실전을 경험할 일은 없을지 몰라. 그런 기회를 이렇게 흘려 버릴 수는 없어!’
그것을 원하지 않는 황녀는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토벌대의 꽃이 아니라, 토벌대의 일원으로서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런 고심 끝에 도달한 것이 바로………….
“저라는 거군요?”
“네.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간절하게 두 손을 모은 황녀의 모습에 이드가 입을 닫았다. 화려한 보석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거친 전장에 직접 서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할 줄이야. 강단 있는 여성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 이상이다.
“그런데 이런 부탁을 하면 황제께서 저와 황녀님을 묶으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드의 말에 황녀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하지만 폐하께서도 명예 후작님과 제 생각만 확실하다면 무리하게 일을 벌이시진 않으실 거예요.”
말을 잠시 멈춘 황녀가 라미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후작 부인께서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절대 후작 부인의 자리를 노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황녀는 후작 부인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새로운 여자라니. 같은 여자로서 얼마나 스트레스 받을 일인가.
마법과 무공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두 후작 부인을 은근히 동경하고 있는 황녀는 그녀들에게 그런 걱정거리를 던져 주고 싶지 않았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말씀은 감사드려요.]
라미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황녀는 그 모습이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온 것 같아 조금 부러웠다.
“…….”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황녀와 어떻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저렇게 단호하게 잘라 말할
줄이야.
뭐랄까? 남자로서 좀 섭섭하다고 할까?
“다른 문제는 없도록 할 테니까요. 네~?”
공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똑 부러지고, 카리스마 있던 황녀의 애교 있는 목소리에 이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자, 어떻게 할까?’
부탁 자체는 어렵지 않다. 황제에게 한마디 해 주는 것이 무엇이 어려울까. 문제는 그런 부탁을 했을 때 당연히 따라올 책임이다.
말에 책임이 따르듯, 꽃이 아닌 기사로서의 황녀를 보려면 그녀에 대한 안전을 이드가 책임져야 한다.
그런 고민으로 이드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예민한 이드의 귓가로 꽥꽥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분명 따져야 할 일이요.”
“옳소. 아무리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하지만, 고작 명예 작위 하나 얻고서 우리를 이리 홀대하다니. 실로 무례하고 무식한 자가 분명하오.”
“평민인 자가 갑자기 귀족이 되었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기세가 등등한 자들이다.
저택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발걸음에 거침이 없다. 미리 그 주변에 사람을 물려 두어서 그들을 막는 자도 없었다.
그나마 가까이 있던 집사가 그들의 목소리에 움직이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 그런 기척들과 함께 눈에 들어온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황녀의 얼굴.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 이드는 즉시 집사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막지 말고, 그냥 두세요.』
갑자기 귓가를 두드리는 이드의 목소리에 집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목소리만 들려왔지만 집사는 따로 이드의 모습도 찾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원래 대기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역시 좋은 집사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따르는 모습에 이드는 그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황녀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죠.”
“어머, 정말 부탁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이드의 말에 황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정말 들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와드리는 대신 황녀님도 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말과 함께 이드가 하얀 이빨을 번뜩이며 웃었다.
“좋아요. 어떤 일인가요?”
이드의 미소가 육식 동물 같다고 생각하며 황녀가 물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는 모자란 것 없고 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부탁할 일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곧 저절로 아시게 될 겁니다. 곧이요.”
쾅!
그리고 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동시에 이드의 귀에는 이미 익숙한 목소리가 삐딱한 자세로 방에 들어섰다. 등 뒤로 다섯 명의 귀족들을 세운 그는 방 안을 한 번 둘러본 뒤 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런 침입자의 등장에도 평온한 이드의 눈빛에 그들은 속에서 불끈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한없이 가다리게 만들어 놓고 저렇게 평온하다고? 감히 자신들을?
“명예 후작, 당신은 감히 아나크렌 북부를 관장하는 노리코 후작가를 대표해서 방문한 나와 여러 귀족을 무시하고 푸대접했소. 도대체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이오?”
“암요. 암요. 제정신이 박혔다면 이런 짓은 할 수 없지요. 명예 후작은 신전에 한번 가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소.”
“어디 명예직 따위로 얻은 작위와 우리 브라키오 후작님을 같이 볼 수 있겠소. 또 그분의 글을 들고 온 나를 무시하다니. 명예 후작은 분명한 잘못을 한 것이오.”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치솟는 화기에 머리에서 거리지 못한 가슴속 말들을 우르르 쏟아 냈다.
‘이렇게 거칠게 나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저질러 놓은 일에 저항감이 사라진 듯 더욱 거침없는 말이 자연스럽게 쏟아졌다.
그때 이드가 재미있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내도 모자를 판에 웃다니! 방에 난입한 귀족들이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드의 미소는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들에게 뒤통수를 보이고 앉아 있는 황녀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는 머리 뒤에서 쏟아지는 막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황제가 임명한 명예 후작에 ‘최소’ 삼검왕급의 강자를 상대로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한 귀족이 결국 뒤통수만 보이는 황녀까지 언급하고 말았다.
“허허, 이런 답답하신 분을 보았나.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오, 명예 후작. 귀족이 되었으면 귀족의 예법을 따르고 행할 줄 알아야지. 고작 이런 계집아이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너는 무엇 하느냐. 어르신들이 들어섰으면 얼른 일어나 자리를 비워야지, 앉아 있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막말에 황녀는 차라리 재밌다는 얼굴이 되었다. 실로 신선하다고 할까?
그녀는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이드에게 가벼운 손짓으로 이드가 원하는 도움이 저들의 처리냐고 물었고, 이드는 환한 미소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끈!
그 모습에 황녀는 맡겨 달라는 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두 눈을 반달로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아하게 돌아섰다. 황녀의 얼굴이 방문 앞을 막아선 귀족들을 향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의 미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얼음처럼 차갑고 도도한 기도만이 남아 있었다. 변검에 버금가는 속도의 표정 변화를 보여 준 황녀가 느릿하게 입술을 들썩였다.
“이상하군요. 제가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할 분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말이죠.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군요. 그렇지 않나요?”
“……어?”
순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황녀의 얼굴을 알아보기를 거부한 두뇌에 뚱뚱한 어느 귀족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들은 황녀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깨너머로 입술을 뻐끔거리는 이드의 모습을 보고도 인식하지 못했다. 축하, 축하, 여러분 모두 이제 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