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55화
792화
‘아쉬워. 소검후를 독대할 수 있는 많지 않은 기회였는데.’
검후가 생사불명이 된 지금 ‘소’검후라고 하지만, 검후의 이름을 이었다는 것은 황제가 신경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현재 제국에서 검후의 이름은 공후보다 컸으며, 기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황제만큼이나 무겁다.
특히 일리나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 이드의 아내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이드의 무게감이 더욱 올라가 버렸다.
황제로서는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나마 이드가 권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랄까?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까?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제는 일리나의 성향도 알고 싶었는데, 그 좋은 기회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일리나는 만나려면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남편 있는 여자를 단독으로 만날 기회가 언제 다시 있을까? 아무리 황제라도 그런 자리는 쉽지 않다. 이게 다 말 많은 자들과 신하의 아내를 탐한 역사 속 폭군들 때문이다.
‘당장 소검후를 만나는 것은 하루, 이틀 뒤가 되겠군.’
황제는 수일 전 당시 너무 바빠 거절했던 이드의 대면 요청을 이번에 허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검후와 함께 들라고 하면 이야기로만 듣던 소검후를 직접 볼 수 있으리라.
“한데 삼검왕은 같이 오지 않은 모양이지?”
일리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옥좌의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의 눈은 정확히 모이엔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네가 삼검왕의 사람이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자 모이엔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하옵니다. 삼검왕은 제국에 해악을 끼치는 사악한 마법사를 토벌하고자 하시는 황제 폐하의 높은 뜻을 칭송하였습니다. 하나 제국의 힘이 한데 모인 만큼 자신들이 나서게 된다면 후배들이 성장할 기회를 막게 됨을 아쉬워하며 토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기 삼검왕이 황제 폐하께 올리는 편지를 드립니다.”
“후배들의 성장이라. 제국의 검다운 깊은 뜻이로다.”
편지를 받아 든 황제는 삼검왕의 결정을 칭찬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고개를 숙인 모이엔의 정수리를 향한 황제의 눈빛은 복잡하게 번뜩였다.
삼검왕이 황궁과 각을 세운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
과연 토벌대에 빠진 것이 순수하게 그 이유 때문일까. 황제는 그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한데 모이엔 단장.”
“예. 황제 폐하.”
“검후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는가?”
흠칫.
무심한 듯 예상치 못한 황제의 말에 세 기사단장이 모두 몸을 떨었다. 검후가 실종되었음을 황제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저렇게 묻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모이엔을 딱 찍어서.
쉴라의 생각이 복잡해지는 중에 모이엔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아쉽군. 검후님이 계셨다면 그분께 토벌대를 맡겼을 텐데. 정말 아쉬워.”
황제는 모이엔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아쉽다는 말을 연발했다.
황실에서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사이.
이드는 저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행진이 벌어지는 대로변을 벗어나자 세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소문보다 빠른 건 없다는데, 다행히 이때만큼은 이드가 소문보다 빠르게 움직인 듯했다.
[사람들 때문이라면 차라리 블링크로 돌아오면 좋았던 거 아니에요?]
“번쩍거리는 마법광은 어쩌고?”
[좀 번쩍이면 어때요? 어차피 내일이면 후작 부인을 마중 나온 애처가 명예 후작에 대한 소문이 안티로스 구석구석까지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라미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저택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와 하인들이 허리를 숙였다.
“후작 부인의 방문을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일리나는 갑작스러울 만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하인들 뒤에서 이그렌이 반가운 얼굴로 걸어 나왔다.
“소검후를 뵈옵니다. 저도 마중을 나가고 싶었는데, 부부간의 애정에 방해만 될까 봐 빠졌습니다.”
“이그렌 경은 그사이 많이 가벼워졌네요. 표정이 밝아요.”
일리나는 너스레를 떠는 이그렌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하하, 이드 님 덕분에 마음의 짐을 많이 덜었습니다. 대신 그 빈자리에 이드 님에 대한 충성과 은혜만 가득하죠.”
귀족들과 좀 어울렸다고 말이 많이 매끄러워진 이그렌이다.
집사와 하인들을 물린 이드가 그런 이그렌의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토벌 때 ‘할 일’을 생각하면 이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당연히・・・・・・ 없습니다.”
이그렌이 슬그머니 이드의 눈을 피하며 목을 움츠렸다. 사실, 지금도 일리나가 왔다는 것을 핑계로 수련실에서 도망을 나온 것이다.
이그렌의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한 이드의 수련표는 수련하다 보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게 만드는 굉장히 위험한 정도였다. 얼마나 위험하면 그 순둥순둥한 이그렌이 일리나를 핑계로 도망을 나왔을까!
“그럼 다시 수련을 시작해야지?”
“옙! 두 분도 오랜만에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일리나 님. 식사 때 다시 뵙겠습니다.”
억지로 힘차게 답한 이그렌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수련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그렌이 ‘할 일’이란 건 뭐예요?”
이드는 일리나의 질문에 백작 성에서 시온 자작을 만났던 일과 돌아왔을 때 이그렌이 결심한 것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드의 이야기를 들은 일리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그렌이 결정한 일. 그녀는 그의 결정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가 도움을 바랄 때 도와줄 뿐이다.
무엇보다 그런 문제보다 일리나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시온 숲은 어땠어요?”
“집에 먼지가 쌓여 있어서 청소했죠.”
이드는 이번 시온 숲 방문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라미아가 혀를 쯧쯧 차며 일리나의 팔짱을 꼈다.
[바보. 일리나가 묻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일리나, 저 바보는 두고 방으로 가요. 내가 일리나를 위해서 시온 숲을 찍어 왔으니까. 보면 놀랄 거예요. 정령수에서 놀던 아이들도 한 뼘이나 자랐거든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아이들이 무슨 콩나물인가? 몇 달 사이에 한 뼘이나 크게?
“벌써요?”
그런데 일리나는 그 말에 기뻐하며 관심을 보인다. 설마 정말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러지 말고 숲이 보고 싶으면 한번 다녀올까요? 마법으로 가면 순식간인데.”
두 사람을 따라 방으로 들어온 이드가 한쪽에 서 있는 거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고 가는 데 몇 달이 걸리는 먼 곳도 아니고, 거울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인데 아쉬워만 할 이유가 있나?
그런데 두 여성의 생각과는 좀 다른 모양이다.
“괜찮아요. 라미아의 이야기와 영상이면 충분해요.”
[쯧쯧, 정말 분위기를 몰라요. 분위기를, 이런 건 그리움에 취해서 사진으로 봐야 하는 거라고요.]
도대체 무슨 분위기를 모른다는 건지. 이드가 억울한 표정을 하자 일리나가 오랜만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쉴라가 봤다면 역시 사랑하는 사람 곁이 좋은가 보다 하고 물었을 모습이다.
[이드는 저와 일리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우리가 아니었으면 평생 혼자였을걸요?]
과연 여기서 반박을 해야 할까, 참아야 할까. 이드는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리고는 두 사람이 편히 사진을 감상할 수 있도록 차와 쿠키를 준비했다.
‘내가 말로 라미아를 이길 수는 없지. 가만 보면 이번엔 일리나도 라미아 편인 것 같고.’
그리움에 취해 사진을 본다고? 이드는 감정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엘프에게도 저런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두 시간이다. 이드가 차와 쿠키 시중을 들어야 했던 시간이.
시온 숲에 머무른 시간이 두 시간이 되지 않는데, 무슨 이야깃거리가 그렇게도 많은지.
이드는 그런 후에야 겨우 소드 팰러스와 삼색 기사단의 토벌대 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이 오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삼검왕은 토벌에 참가하지 않네요? 난 토벌전의 혼란한 틈에 날 노리지 않을까 했더니.”
[누구누구처럼 말이죠?]
“그래. 나처럼 말이지.”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당당히 인정하고는 팔짱을 꼈다.
생각할수록 의심이 갔다. 자신의 일 때문이 아니라도 삼검왕은 이번 토벌에 나서야 했다. 제국으로부터의 홀로서기를 하려면 기사들의 지지가 필요한데, 이번처럼 제국 전역에 있는 기사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을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런 기회가 많았다면 황제가 대대적으로 토벌대를 만들 일도 없을 것이고, 귀족들도 자랑스럽게 보유한 기사단을 참가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말고는 또 없어요?”
이드의 질문에 일리나는 그녀가 알고 있는 일들을 전했다.
가령 삼검왕이 토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결정에 철벽의 검왕이 크게 반대했다는 소문이 있다거나.
토벌대에 흑색 기사단이 아니라 모이엔이 이끄는 청색 기사단을 보냈다는 것은 무언가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는 클라인의 전언이라거나.
또는 삼색 기사단에 더해서 후배의 성장을 위해 수련생들로 기사단을 꾸려 삼색 기사단과 함께 보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잠깐만요. 삼색 기사단에 누굴 따라 보냈다고요? 수련생?”
이드는 어이없는 얼굴로 일리나의 마지막 이야기에 반응했다.
“네. 30세 이하의 수련생이요.”
“30세 이하? 그 인원을 달고 토벌에 참가하라니. 제대로 토벌에 나설 생각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이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소드 팰러스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수련생이 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처럼 어린 나이에 들어와 하나하나 배워 가는 수련생과 이미 많은 실정과 경험을 쌓은 후에 스스로의 배움이 모자람을 알고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이 되는 경우다.
사실 후자의 수련생은 이름만 수련생이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실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런 두 종류의 수련생을 나누는 기준이 30세라는 나이다. 30세 이하 중에서는 후자에 속한 수련생이 하나도 없다. 즉, 삼색 기사단과 함께 온 수련생은 말 그대로 실전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애송이들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다.
과연 삼색 기사단이 그들과 함께 토벌에 참가해서 마음대로 활약할 수 있을까? 아끼는 후배들을 위험한 전쟁 속에 던져두고? 이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쓰다 버리는 노예병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지. 이렇게 되면 세 개 기사단 중 최소 한 개 기사단은 손발이 묶이게 되는데.”
삼검왕이 토벌에 나가지 않는 것과 엮어서 생각하면 의도는 분명하다. 보는 눈이 있어 참가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미완의 마탑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클라인 백작하고, 쉴라 경은 뭐라고 해요?”
“두 사람도 이드와 같은 말을 했어요. 그리고 쉴라 경은 나중에 찾아오겠다고 했으니 그때 물어보세요.”
“음,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궁금한데.”
이드의 바람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날 저녁에 쉴라가 저택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