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62화
799화
라발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물었다.
소극적인 반응이지만, 이 정도면 협력할 의사가 분명하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지금은 그 말만으로 충분합니다.”
무슨 일을 맡겨도 묵묵히 할 것 같지만 당장 시킬 일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대응도 상대가 무얼 할지 알아야 할 수 있다. 이번 토벌에 삼검왕의 노림수가 끼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다.
이런 때에는 상대가 먼저 움직일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그저 라발이 이쪽의 뜻에 호응한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당장은 아니라도 힘이 필요한 상황에 라발이, 적색 기사단이 아군이라는 사실은 든든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드가 강해도 한 손이 열 손을 감당할 수는 없는 법. 손발은 많을수록 좋다.
“그럼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조용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짐작하고 있었다고 해도, 짐작과 확인은 다르다. 거기에 한발 물러서 현재의 소드 팰러스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입장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흐름에 발을 들이밀게 되었으니 속이 복잡할 것이다.
“내일 어전회의 전에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지금은 너무 정신이 없어. 명예 후작님도 내일 뵙겠습니다.”
작지만 세심한 쉴라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은 라발이 무겁게 몸을 돌려 저택을 나섰다.
어전회의에 참석할 계획이 없는 이드였지만, 굳이 정신없는 라발을 붙잡아 그런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우리도 들어갑시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을 배웅한 사람들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이드는 빈 잔을 치우는 집사에게 이그렌을 불러오게 했다.
그 후 이드는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살폈다. 두 사람은 무거운 사실과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나이에 비해 뛰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무공에 한정한 것일 뿐이다. 누가 누굴 배신하고, 몰래 음모를 꾸미고, 또 그 음모를 막고 부수는 것은 아직 그녀들에게 무거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제국 황실과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이라는 대륙의 절대자들이 연관된 이야기를 듣고도 울고 도망치지는 않았으니 그 용기는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케마란도 네리베르도 긴장할 것 없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그렌이 오기 전에 물어도 좋다.”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쉴라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던 네리베르가 가슴에 품고 있던 의문을 풀어냈다.
“저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전까진 알려고 해도 알려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그때 너희는 위험한 일에 관련될 일 없는 수련생이었으니까 그런 거지.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수련생이 아니잖아.”
“네, 자랑스러운 은색 기사단의 기사죠.”
이드는 어깨를 쭉 펴며 은색 기사단의 단복을 뽐내는 케마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랑스러운 은색 기사단 소속의 기사. 그렇기 때문에 들려준 거야. 두 사람이 더 이상 수련생이 아니라 은색 기사단과 소드 팰러스의
미래이기 때문에, 소드 팰러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애초에 몰랐다면 몰라도, 두 사람은 이미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이드 님에 대해서요?”
“물론 그게 가장 큰 비밀이지.”
이드가 대견하다는 듯 케마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사로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던 케마란은 이드의 행동에 히죽거리며 웃었다. ‘당신은 강아지인가요!’
마치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케마란의 모습에 네리베르는 이를 갈았다. 지금이 어디 웃고 장난칠 때인가!
그녀는 케마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왜 이제 와서 자신들에게 감추고 있던 진실을 밝힌 것일까. 정말 자신들이 기사가 되었기 때문일까?
네리베르는 그렇게 단순한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혹시 소드 팰러스의 미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저희들이 배우고 있는 난화십이식 때문인가요?”
네리베르가 어렵게 꺼낸 말에 이드는 과연 생각이 깊다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 난화십이식은 소드 팰러스에서 가장 특별한 무공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쉴라 경이 두 사람에게 굉장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야.”
이드는 쉴라가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얼마나 아끼고 신경 써서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리나에게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신입 기사를 아끼는 단장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입 기사를 아껴도 자신이 익힌 난화십이식을 가르치진 않지. 난화십이식이 가진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은색 기사단과 소드 팰러스의 미래라는 것도 이드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이드가 읽은 쉴라의 생각이었다.
자신이 검후의 죽음을 가정하고 쉴라를 소드 팰러스의 새로운 검후로 세울 생각을 가진 것처럼 쉴라는 검후와 자신 대신에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소드 팰러스의 새로운 검후로 세울 생각인 것이다.
이드는 쉴라의 생각에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쉴라의 기대가 감격스럽지만 부담스러운 네리베르다. 이드는 그녀가 감격과 동시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하다. 부담을 느끼라고 한 말이니까.
쉴라가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은 더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겐 그럴 만한 재능도 있고.
하지만 과도한 부담은 오히려 재능을 망칠 수도 있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마지막까지 열심히. 절대 방심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이드는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적당히 텐션을 조절하며 두 사람을 자극했다.
똑똑똑.
“이그렌 경을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기분이 적당히 고조되었을 때 마침 그 흥분을 풀어낼 최고의 상대가 도착했다.
짝!
이드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고 화끈하게 몸을 좀 풀어 보자. 내가 너희 둘을 왜 찾았는지는 들었지?”
“귀여운 저희들이 그립다고 하셨어요.”
그런 적 없다.
“저희 실력을 확인하고 동시에 이그렌 경의 대련 때문입니다.”
“역시 네리베르가 대답은 똑 부러지지. 그럼 상대도 도착했으니까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한번 볼까?”
“깜짝 놀라실 준비나 하세요.”
기세 좋게 대답한 케마란이 방문을 열었다.
“이드…… 님이 아니라 케마란 경? 네리베르 경?”
갑자기 나타난 두 여기사에 이그렌이 놀라는 사이,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그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 어? 자, 잠깐만. 갑자기 이게 무슨……?”
“자, 이그렌 경. 오늘 하루 영혼까지 불태워 보자고요!”
“저, 저기요~ 이, 이드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그렌의 비명이 길게 퍼졌다.
“하하, 제대로 불이 붙은 모양이네.”
이드는 느긋한 걸음으로 척척 걸어가는 한 사람은 범죄자처럼 끌려가지만ᅳ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쉴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일부러 두 사람을 자극하신 거죠?”
“그런 쉴라 경은 일부러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었고요?”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쉴라다. 누구보다 두 사람의 빠른 성장을 바라는 것이 그녀다.
“잘 견딜 수 있을까요?”
“잘 견디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잘 견딜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이 우리 일이죠. 그게 상사와 스승의 책임이니까요.”
“……그렇죠. 잠시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네요.”
쉴라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두 사람이 빨리 성장하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케마란의 재능에서 미래를 보고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이다.
쉴라는 바쁜 마음을 내려두었다.
길게 생각해야 할 때다. 케마란이, 네리베르가 부족하면 어떤가. 자신이 있고 이드가 있는데 말이다.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 말이다.
이드가 마음의 평화를 찾은 쉴라와 함께 수련장에 들어섰다.
잠깐의 시간차였지만, 대련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네리베르가 먼저네?”
당연히 성격 급한 케마란이 먼저 시작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깝게 간발의 차로 링스피어를 뽑는 게 늦었거든요. 설마 수련장에 들어서기 전에 검을 뽑는 꼼수를 부릴 줄이야. 네리베르가 더러운 수를 배웠어요.”
먼저 시작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 오리주둥이를 하고 있던 케마란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제 얼굴에 침 뱉기다.
검보다 긴 링스피어로 간발의 차라니. 네리베르보다 먼저 링스피어를 뽑고 있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으니까.
이드는 그 사실에 대해 말을 할까 말까 하는 사이 수련장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챙. 쩡. 쩌정.
검과 검이 부딪히며 규칙적인 소음이 터졌다.
네리베르나 이그렌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기사 수업을 받으며 무공을 수련한 만큼 검로가 정직하고 강직했다. 비슷한 성격인 두 사람의 대련은 화려하지 않지만, 품위가 있었다.
“어떤 것 같아요?”
일리나의 질문에 쉴라와 케마란이 귀를 쫑긋 세웠다.
“좋네요. 기본기가 더 단단해졌어요. 역시 네리베르는 쉴라 경을 닮은 것 같아요. 성장 방향이 비슷해요.”
쉴라 역시 난화십이식을 통해 기본기와 함께 자신이 기존에 익히고 있던 검법이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드의 평가에 쉴라가 흐뭇해했고, 케마란은 경쟁심을 불태웠다.
동경하는 쉴라와 닮았다니. 최고의 칭찬이 아닌가!
‘나도!’
링스피어를 쥔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케마란의 마음은 알지만 애초에 검과 링스피어라는 무기의 차이 때문에라도 그녀는 쉴라와 같을 수가 없다. “다음은 나니까 빨리 끝장내 버려!”
조바심이 난 케마란이 응원인지 독촉인지 모를 소리를 버력 외쳤다.
[저기서 끝장내 버리면 네 차례는 없는데?]
라미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케마란이 곧장 말을 바꿨다.
“・・・・ 빨리 항복해라! 나도 좀 싸우자!”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하지 못해요!”
도저히 기가 막혀 참을 수 없는지 네리베르가 싸우던 것도 잊고 바락 소리쳤다.
자연스레 대련이 멈춰 버리자 케마란이 신나게 뛰어나갔다.
“둘 다 멈췄으니까. 대련 끝이야! 이제 내 차례라고!”
“다, 당신 정말…… 꺅!”
갑작스러운 난입에 화를 내던 네리베르는 곧 케마란의 엉덩이에 밀려 수련장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불만을 표시하기 전에 케마란의 링스피어가 녹색으로 물들며 이그렌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어헉!”
“어라? 저건 뭐야?”
이드는 난데없는 난입과 기습에 기겁하는 이그렌은 무시하고 녹색으로 물든 링스피어에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