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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63화


800화

은은한 초록의 빛은 링스피어 내부에서 스며 나오듯 신비로웠다.

언뜻 보면 검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유형화된 내공 특유의 정제된 느낌이 없다. 그렇다고 마법도 아니다. 마법을 각인할 거라면 저런 눈요기 따위를 각인하기보다는 섬광 계열의 플래시로 눈을 잠시 멀게 했을 것이다.

‘아, 혹시 그건가?’

그러고 보니 링스피어가 저런 이펙트를 낼 만한 요소가 있다.

바이트 타블렛의 코어.

링스피어로 도망갔다가 라미아의 마법과 케마란의 망치질에 링스피어의 에고로 주저앉아 버린 떼쟁이 꼬마 에고. 녀석이 깨어났다면 저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리나에게 에고가 깨어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녀의 성격상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비밀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 테고.

가능성이라면 일리나가 기사단을 떠난 이틀 사이 에고가 깨어났다는 정도일까. 이드는 바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묵묵한 이드의 시선에 네리베르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전혀. 대련은 잘했다. 열심히 수련한 티가 난다. 마지막에 꼴사납게 밀려난 것이 우습긴 했지만.”

“으윽, 그건 케마란이…………….”

눈치를 보는 네리베르를 위해 칭찬으로 시작한 말이지만, 끝이 좋지 않았나 보다.

케마란을 노려보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네리베르에 이드가 급히 말을 이었다.

“큼, 그보다 링스피어를 휘감은 기운 말이다. 혹시 에고가 깨어난 거니?”

“네. 일리나 님이 떠나신 날 밤에 갑자기 깨어났어요.”

“쉴라 경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어느새 주변에 사람들이 모였다. 쉴라도 그 속에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미리 에고가 깨어났다는 것을 안 얼굴이 아니다.

“말씀드려도 괜찮은지 몰라서, 이드 님의 허락을 받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케마란은 깜짝 놀라게 해 드리겠다는 생각이 더 큰 것 같았지만요. 단장님께는 비밀로 해서 죄송합니다.”

네리베르가 꾸벅 고개를 숙이려 하자 쉴라가 막았다.

“괜찮아. 에고 무기라면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맞아. 특히 이드 님과 연관된 것이라면 허락을 받는 것이 당연해. 사과할 일도 아니고, 사과받을 일도 아니야. 오히려 옳은 판단을 했다.”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에 네리베르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래서 에고는 어땠어?]

케마란이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본래 그녀가 각성시켜 부려야 했을 에고였기 때문일까. 라미아가 관심을 보였다.

“미운 네 살 같았어요.”

네리베르가 미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에고가 깨어났다고 신이 난 케마란을 통해 만난 에고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 에고 소드라면 가지고 싶지 않네요.’

덕분에 은근히 부럽던 마음이 싹 가셨다.

[최악이네. 그래도 케마란 말은 잘 따르는 것 같아 다행이야.]

“그러면 됐지. 링스피어를 다른 사람이 쓸 것도 아니고, 케마란만 쓰는데 문제없으면 된 거지. 그보다 에고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확인해 봤어?”

인첸트와 부여 마법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에고는 각인된 마법을 통제하고 정보를 관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신비의 집합인 마법의 궁극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에고는 제작자가 따로 각인한 마법 이외에도 특화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각성한 에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런 에고의 경우 마법 정보 생명체라기보다는 정령이나 요정에 가까워 마법과 다른 신기한 능력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링스피어에서 깨어나는 에고는 특별하다.

다름 아닌 녀석의 근원이 바이트 타블렛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는 초인에 대해 연구한 생명의 관의 모든 정수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런 바이트 타블렛에서 태어나 깨어난 에고다.

무슨 능력을 가지고 깨어났는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링스피어를 휘감은 초록색 기운에서 미약하지만 익숙한 초인력을 감지한 이드의 기대가 컸다.

그리고 대련을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밀리지 않고 쥐 잡듯 이그렌을 몰아붙이고 있는 케마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확신은 더해진다.

당장 그녀의 무공이 상승한 것도 아닌데, 이그렌을 몰아붙이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여유가 넘쳤다. 그뿐 아니라 이그렌의 의도를 완벽하게 읽고 반응하는데, 그 초식이 완벽할 정도였다. 얼마나 깔끔한지 미리 합을 맞추고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이 네리베르의 대답에 집중하자 수련장의 대련은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꺄하하~ 여기 저기. 빈틈 투성이라고요!”

“으아아~ 살살해.”

정작 본인들은 대련에 빠져 그런 일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뭐, 어차피 대련은 본인들의 실력 향상을 위한 것. 대련 당사자들만 대련에 충실하면 되는 일지만 말이다.

“확인은 했는데요. 그게・・・・・・ 조금 미묘해요.”

“뭐가 어떻게 미묘한데?”

“능력은 많았어요. 육체 능력 향상이라거나, 물, 불, 바람 등을 이용한 공격과 방어 능력, 그리고 벽 너머 사람을 감지하는 능력 등등 확인한 것만 열 가지가 넘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능력들이 너무 약했어요. 공격 능력은 1미터를 가지 못하고 흩어지고, 방어 능력도 제 일격도 막지 못할 정도로 약했어요. 벽 너머를 감지하는 것도 얇은 나무판 정도만 가능했고요.”

“쩝, 그것 참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이 아주 딱 이네.”

이드가 입맛을 다셨다. 미묘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

저래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열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라도 가벼운 일 검조차 막아 내지 못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럼 지금 케마란이 사용하고 있는 건 뭐야? 저건 네 말처럼 약해 보이지 않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케마란과 이그렌의 실력 차는 크지 않다. 케마란이 미세하게 앞서는 정도? 그런데 일방적으로 밀리는 이그렌을 보면 도저히 미세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미묘한 능력 중에 딱 하나 진짜가 있었거든요. 의식 가속 능력이요.”

“오호라, 생각의 속도가 빨라졌다는 말이지.”

이드는 능력의 이름을 듣고 단번에 케마란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늘었으니 자연히 여유가 생길 수밖에.

“케마란 말로는 가속 상태에 들어가면 세상이 느려지고 소음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데, 그 느낌이 마치 무공 수련에 깊이 빠졌을 때와 비슷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육체 능력 향상도 다른 능력들에 비해서는 효과가 커서 도움이 되고요. 어디까지나 다른 능력에 비해서지만요.” 

“환상적이네.”

이드가 휘파람을 불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의식 가속이라니.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에게 있어 최고의 능력이 아닌가. 상대의 움직임을 여유 있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라니. 저 능력만 있으면 상대가 아무리 기묘한 묘수를 들고 나와도 당황하거나 허둥댈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수에 당황하는 이유가 대응할 방법을 찾을 시간이 없어서인데, 케마란은 중요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도라는 점에서 어떤 이는 헤이스트를 언급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말해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속도와 시간의 차이 같은 것이다.

네리베르가 말했던 다른 능력이 모두 쓸모없더라도 이것 하나만 있다면 전혀 아쉽지 않다. 이드는 의식 가속이 그만큼 대단한 능력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당장 수련장 위에서 케마란이 그 능력의 대단함을 몸소 확인시켜 주고 있지 않은가.

뻐억!

이드가 수련장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그렌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충격에 호흡이 끊어져 컥컥거리는 모습에 케마란이 다가갔다.

“・・・・・괜찮아요?”

끄덕끄덕.

이그렌이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요. 지금 숨을 못 쉬고 있다고요.”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케마란이 도움을 요청하려고 고개를 돌릴 때였다.

이드가 그녀보다 한발 먼저 다가와 있었다.

“마스터! 다행이다. 이그렌 경이 숨을 못 쉬어요.”

대놓고 안도하는 케마란의 말에 손을 흔든 이드는 혈도 몇 곳을 진정시켜 이그렌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커허허허헉~ 주, 죽는 알았습니다. 헉헉.’

이그렌이 막혔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케마란을 올려다보았다.

“케마란 경은 도대체 뭘 먹고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강해진 겁니까? 혹시, 제가 절망적인 둔재였던 건가요?”

케마란의 실력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란이 컸던 모양이다.

“그럴 리가. 그럼 네리베르도 둔재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다. 저거 다 장비발이야. 검기를 입힌 것도 아닌데, 링스피어가 초록빛으로 번쩍이는 거 보이지?”

“꼭 장비발 때문은 아닌데, 나도 열심히 했는데…..”

자신의 실력을 깎아내리는 이드의 말에 자신의 노력이 저평가된 느낌이 들어 갑자기 우울해지는 케마란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크게 반발할 수도 없는 것이, 링스피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압도적인 차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넌 좀 쉬면서 체력이나 회복해. 좀 이따 대련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또, 또요?”

숨넘어갈 뻔한 고비를 넘기고 쉬고 싶은 이그렌이었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제대로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어쩌면 삼 일 후에 토벌대가 출발할지도 모르거든.”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토벌 발표한 지 제법 지났으니 빠른 건 아니지. 일단 이거 마시고 잠시 기다려.”

이드는 그에게 포션 한 병을 던져 주고는 케마란에게 다가갔다.

“잘했다. 수련 열심히 한 티가 났어.”

“좀 전엔 장비발이라고 하셨으면서…………….”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기본이 없으면 좋은 장비도 아무 짝에 쓸모없는 고철이 되는데, 넌 완벽하게 사용했잖아.”

장비의 능력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최악의 경우 어린아이에게 보검을 쥐여 준 꼴이 날 수 있다.

휘두르긴커녕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경우 말이다.

그걸 생각하면 하루 만에 의식 가속이라는 능력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케마란의 능력은 분명 칭찬해 줄 만한 것이었다.

“히히, 마스터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죠?”

“에고가 깨어났다면서?”

“네. 놀라셨죠? 링스피어라고 부르고 있어요.”

“네리베르는 미운 네 살이라던데?”

“얘가 마음씨 고약한 사람을 알아보는 거죠.”

“마음씨 나쁜 사람은 친구를 엉덩이로 밀치는 당신 같은 사람이겠죠!”

뻔뻔한 발언에 분노한 네리베르가 소리쳤지만, 케마란은 익숙한 듯 무시했다.

“그 에고, 링스피어가 이상한 말을 하거나 그런 건 없고?”

“네. 좀 고집이 세긴 하지만요.”

“내가 한번 봐도 될까?”

“여기요.”

이드가 손을 내밀자 케마란이 잠시 망설임도 없이 냉큼 링스피어를 내밀었다.

굳이 따지자면 링스피어에서 깨어난 에고에 대한 지분은 이드와 라미아가 반 이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링스피어가 이드의 손에 잡히는 순간 생각지 못한 반응이 일어났다.

따각.

이드의 심상 깊은 곳에 조용히 잠들어 있던 씨앗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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