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66화
803화
“폐하, 그 말씀은 황녀께서 직접 검을 들고 적들과 싸운다는 말씀이신지요?”
에이, 아니겠지. 평소 그렇게 아끼는 황녀를 적 앞에 세운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소.”
하지만 황제는 그들의 생각을 완벽하게 배신해 주었다.
그의 말에 귀족들은 대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 말씀은 받들기 어렵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하옵니다. 황녀께서 전투라니요. 이는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까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그러합니다. 황자님도 아니고, 황녀께서 검을 들고 전장에 서다니요. 이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국운이 걸린 전쟁도 아닌데 황녀께서 험한 일에 나서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황녀와 제국을 걱정하는 자는 물론이고, 황녀가 용감하게 싸움에 나서는 것으로 생겨날 정치적인 문제를 걱정한 자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황녀의 참전을 반대했다.
“허허허, 보아라. 너의 참전을 반대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귀족들의 반응에 황제는 황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선 벌써 허락하셨죠.”
“쯧쯧, 저들을 설득하는 것도 내 책임이란 말이구나.”
“황제 폐하께선 제국의 주인이시니까요.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저들도 당연히 따라야죠.”
“재미는 저 혼자 보고, 아비에게 뒤처리를 맡기다니. 못된 딸이로고.”
날름.
황제의 한탄에 황녀가 손에 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살짝 혀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괘씸하고 귀여워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제 폐하?”
갑작스러운 황제의 웃음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던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크흠, 경들이 황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참으로 고맙구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전장은 예측 불가의 장소.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목소리를 높이는 귀족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전장을 수없이 구른 장군도 눈먼 화살에 맞아 죽는 곳이 전장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나 역시 경들과 같았소. 하지만 황녀의 끈질긴 주장에 결국 허락하고 말았소. 기사들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겠다는 황녀의 용기가 가상했기 때문이오.”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흐뭇하게 황녀를 바라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드는 그런 황제가 불쌍해 보였다. 황녀가 세상을 위해 용기를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갈고닦은 실력을 실전에 써 보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나서는 것이었으니까.
그 사이 황제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똑똑한 황녀는 내가 허락할 수밖에 없는 든든한 보호자를 구했더란 말이오.”
“그 보호자가 혹시…….”
사람들의 시선이 황녀의 곁에 앉은 이드를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에게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이드가 황녀와 나란히 앉아 있어 신경이 쓰이던 참에 나온 말이기에 이거다 싶었던 것이다.
“그렇소, 명예 후작이 황녀를 지켜주기로 했다오. 드래곤처럼 강력한 명예 후작이 황녀를 지켜준다는데 내 어찌 허락하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황녀는 이번 토벌을 위해 짧은 시간이지만 명예 후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오. 그 노력을 어찌 모른 척하리오.”
황제는 말하는 중에도 꾸준히 황녀가 일을 주도하였음을 알렸다. 동시에 황녀가 그런 부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예 후작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자 계산이 빠른 자들이 나서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 노력, 황녀 전하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전장의 위험을 알고 그리 준비를 하셨다니, 황녀께서는 전장에도 밝으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뿐입니까. 명예 후작께 무공을 배우다니요. 이는 마인드 마스터에게 무공을 배웠던 검후님과 같은 모습입니다. 바로 전설의 재현이 아니겠습니까!” “오~ 그렇습니다. 전설의 재현! 진짜 차기 검후가 바로 여기 있으셨습니다그려!”
좋은 건수를 물었다 여긴 자들이 흥분해서 외쳤다.
‘듣자하니 기분 나쁘네. 이거………….’
이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처럼,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있다. 황녀가 진짜라면 소검후라는 별명과 함께 차기 검후로 소문난 일리나는 가짜란 말인가?
이드는 진짜 차기 검후라며 외치는 놈들의 얼굴을 살펴 기억에 담았다. 이드의 입술이 그의 기분을 따라 삐뚜름해졌다.
“허허허허.”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전설의 재현이라는 말이 유난히 귀에 쏙 들어왔기 때문이다. 황녀가 검후라니.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이상 좋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강력하게 반대를 외치던 자들도 포기했다. 이미 결과가 보이는데, 더 반대를 해 봐야 황제에게 찍히기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로서 황녀의 참전은 결정된 것으로 하겠소.”
더 이상 반대하는 자가 없자 황제가 선언했다.
이어 황녀를 보호하고 그녀의 지휘를 따를 기사단도 즉석에서 꾸려졌다. 은색 기사단과 황실의 양대 기사단에서 기사를 차출하기로 했다.
“한데 마법사이면서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바이트 타블렛이라는 중한 물건을 지맥에 묶어 두다니요. 제 스스로 개목걸이를 채운 꼴이 아닙니까.”
“초인을 잡아 인체 실험을 하는 자들입니다. 정상적인 놈들일 수가 없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정상적인 놈들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아군의 전략적 우위가 확실하지만, 어떤 미친 수단을 들고 나올지 모르는 놈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페이로스 백작님?”
질문을 받은 제국 마탑 탑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소 마법사라면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한 이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라는 욕심에 이성을 잃은 미완의 마탑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능합니다. 당장 저라면 바이트 타블렛을 터트리겠습니다. 지맥의 강력한 마나를 흡수한 아티팩트인 만큼 폭발력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으음.”
탑주의 말에 자폭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달려가 상대를 쓸어버리면 된다는 생각에 굉장히 꺼림칙한 장애물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장애물일 뿐 자신들이 패배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만 아니면 되는 거지.’
이드는 그런 기색을 느끼고 혀를 찼다.
‘꼭 피를 봐야 아픈 줄 알지.’
하지만 굳이 나서서 그들에게 상대의 강력함을 이해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이건 말로 이해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졌는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드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번을 기회로 정신을 좀 차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았다.
현재 제국의 힘은 강력하지만, 나태하니까. 오랜 시간 전쟁 없이 커 오면서 긴장감도, 경계심도 흐물흐물한 연두부처럼 물러졌지. 이 상태로 혼돈의 파편이 이전처럼 전쟁이라도 일으키면 피해는 어마어마해질 게 분명하다.’
차라리 혼돈의 파편의 흔적이라도 발견하지 못했으면 모르겠지만, 생명의 관 지하의 그 더러운 곳에서 메르시오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놈들이 무엇을 노리고 어떤 일을 꾸미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단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어쩌면 이번 목표인 정신의 관에서 놈들을 마주칠지도 모르지.’
사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는 입장이기도 했다.
일단 놈들을 만난다면 드래곤들이 사라진 이유나, 혼돈의 파편이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한 티끌만 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파악한 것이라고는 미완의 마탑과 혼돈의 파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 확인을 위해서라도 미완의 마탑에 대한 토벌이 필요했다.
‘겸사겸사 혼돈의 파편이 꾸미는 일을 방해하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대상인 미완의 마탑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계획도 무산될 것이 아니겠는가.
혼돈의 파편에게 보내는 자신의 복귀 인사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드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이, 어진회의도 끝에 다다랐다.
이권과 명예가 달린 예민한 문제가 모두 결정된 것이다.
그 외의 문제는 현장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쉬는 시간을 합쳐 세 시간의 긴 시간 동안 이드가 한 것이라고는 황녀의 참전에 대해 몇 마디 해 주는 것이 다였다.
다음에는 황녀가 아무리 부탁해도 이런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이드였다.
“황제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회의를 끝내기 전 모이엔이 일어나 말했다.
‘그건가?’
어전회의 내내 한발 물러선 태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던 모이엔의 발언에 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쉴라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도 매와 같은 눈으로 모이엔을 은밀히 살피고 있었다.
이드와 마찬가지로 이어질 그의 말이 이번 토벌에 대한 삼검왕의 노림수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모이엔 단장의 청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궁금하구려. 말해 보시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청은 큰 것은 아니옵니다. 현재 황실에 소속되어 있는 소드 팰러스의 검왕자 게일 경을 이번 토벌에 한해서 저희 청색 기사단과 함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게일 경을 말이오?”
황제의 눈이 조용하게 번뜩였다.
“그러하옵니다. 게일 경이 오랜 시간 소드 팰러스를 떠나 있어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침 그들이 오색 기사단의 기사로 토벌에 참가하였으니,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기회를 주시기 바라옵니다.”
“친구 간의 회포라…………….”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내심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수련생 동창회도 아니고, 토벌대에서 무슨 회포를 푼단 말인가.
‘진짜 속셈은 게일 경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겠지. 그나저나 분명 그 사건에 대해 함구하라 하였거늘. 괘씸한 놈들.’
자신의 기사가 명령을 어기고 비밀을 발설하였다니. 황제는 괘씸함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내심 어쩔 수 없다 싶었다.
당시 사건을 목격한 기사는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소드 팰러스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초인파에 힘을 실어 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이엔의 청은 거절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황녀와이드를 이어 주는 일이 조금 어려워 보이자, 바닥을 치던 게일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그렇지 않아도 적당한 명분을 찾아 게일을 다시 복귀시키려 했던 황제였다.
그는 좌중의 귀족들을 쓸어 보며 그들도 이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를 살핀 후에 이드를 돌아보았다.
결정은 황제의 몫이지만, 게일이 벌였던 사건의 당사자인 이드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제의 시선을 받은 이드는 묘한 시선으로 모이엔과 함께 발터를 살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도둑 길드의 보고로 발터가 게일과 만났다는 것을 아는 이드였다. 그런데 모이엔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게일이 그의 손을 잡았다는 것일까?
잠시 눈을 반짝이던 이드가 황제의 뜻에 따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린 기사들을 생각하는 모이엔 단장의 청을 허락하겠소.”
“감사드리옵니다, 황제 폐하.”
황제의 허락에 모이엔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