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67화
804화
토벌전 마지막 어전회의가 끝났다.
황제가 떠나자 사람들은 토벌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려면 미리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으니까.
“지휘관 임명을 축하드립니다, 후작님.”
“펄시피아 기사단의 위위 펄시피아 남작입니다, 록마틴 후작님.”
“모레아 기사단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중에는 이드에게 접근하는 자도 있었다.
“명예 후작님과 함께 토벌에 참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드도 이전처럼 그들을 피하지 않고 적당히 상대했다. 이전과 달리 여기 있는 자들은 함께 전장에 설 자들. 즉 아군이다. 전장에 서기 전부터 그들을 무시하는 느낌을 주어 반감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명예 후작님 저도 있습니다.”
“저도…….”
우르르.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드가 그들을 피하지 않자 록마틴 후작에 못지않게 많은 자들이 아귀처럼 몰려들었다.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중구난방으로 외치니 대화가 안 된다. 이드는 적당히 인맥관리를 해 보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하하,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아무래도 황녀 전하와 참전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어디 한두 명이어야 상대를 하지. 지금까지 사람 많은 자리는 일부러 피하던 이드에게는 단번에 너무 고레벨로의 도전이다.
황녀의 안전은 좋은 방패였다. 이드가 몸을 빼자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아무도 잡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이드는 일단 보는 눈이 있어 황녀궁의 황녀를 찾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차를 내밀었다.
이드는 어쩐지 분한 기분을 느끼며 차를 한 잔 마신 뒤 바로 궁을 나섰다.
황녀가 짧은 시간이라도 무공 수련을 도와주길 원했지만, 냉정히 거절했다.
“선생을 놀리는 학생은 벌을 받아야지.”
이드는 뾰족이 입술을 내민 황녀의 모습에 분한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쉴라를 만난 이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그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모이엔 단장이 게일 경과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합니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히 입을 닫고 있던 쉴라가 말했다.
[애초에 결별한 적도 없는데, 다시 손을 잡았다는 것도 이상하네요. 게일이란 놈,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소드 팰러스의 인간이잖아요.]
“그가 정정당당해야 할 대련에 비겁한 수단을 사용한 순간부터 최소한 나와 은색 기사단에게는 더 이상 소드 팰러스의 기사가 아니게 되었죠. 쉴라가 거만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단단히 꼬인 팔의 모습이 절대 그 안으로 게일을 들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럼 초인파의 제안은 거절한 것이네요. 진심일까요?”
그때까지 조용히 듣기만 하던 일리나가 게일의 진심을 의심했다.
“그렇지 않겠어요? 확인해 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비록 게일이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긴 했지만, 거짓으로 모이엔을 속이는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 소드 팰러스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확인해 볼까요?]
“가서 물어보게?”
[진실만 대답해 준다면 그 방법도 좋지만, 그보다는 증거를 봐야죠. 예전에 설치해 둔 카메라가 있잖아요.]
“어! 그거 아직도 있었어?”
이드는 놀람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전 발터를 감시하기 위해 그가 서재 겸 업무를 보는 방에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해서 잊고 있었다.
[아직도 있다니요! 내가 그거 관리하느라 매일 얼마나 신경을 쓰는 줄이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치우고 싶어도 지금까지 한 고생이 아까워서라도 못 치워요. 분명 기다리면 언젠가 때는 오기 마련인 법!]
작은 주먹을 바르르 떨며 라미아가 불타올랐다.
말하는 중에 본심이 끼어 있는 것 같지만, 이드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일단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통 자연 다큐의 제작 과정도 기다림의 연속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좋은 장면이 나오고. 문제는 발터의 방에 설치된 몰카는 다큐가 아니라는 것.
“과연 쓸 만한 내용이 있을까? 지금까지도 별거 없었잖아.”
이드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자 라미아가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제가 무작정 하는 말이 아니라고요. 모이엔 단장이 수도에 도착해서 게일을 만난 건 첫날이 처음이자 끝인데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았겠어요?]
“폰・・・・・・ 이 아니라 통신구?”
[딩동, 전 가능성 높다고 봐요. 그리고 도둑 길드 보고로는 오늘 발터의 출근 시간이 평소보다 늦었다네요.]
“어쩌면 발터가 통신구로 게일과 통신을 했을지도 모르겠네. 운이 좋으면 그게 카메라에 찍혔을 것이고.”
물론 운이 매우 매우 매우 좋아야 찍혀 있겠지만, 이드는 따라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 사이 라미아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두 손을 모으자 빛이 번쩍이며 고양이 마크가 붙은 비디오카메라가 소환되었다.
“그런데 그거 뭐가 요란하게 많이 붙었다?”
[연구 중이거든요. 마나석으로 배터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하지만 마나석은 발각될 수 있어서 일부러 카메라를 쓴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연구 중이란 말이에요. 배터리 갈기 너무 귀찮아요. 개발하고 말겠어요. 탐지 마법에 걸리지 않는 마나석 배터리! 흑흑.]
라미아가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훌쩍거렸다.
“카메라가 뭐죠?”
일리나가 라미아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다 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상을 저장하는 장치에요. ‘마나’ 없이요.”
“호”
이드는 카메라에 욕심을 가진 쉴라를 뒤로하고 영상을 확인했다. 어두운 방을 빨리 감기로 돌리자 창밖으로 빛이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고, 다시 조금 지나자 발터가 작은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잠시 후 방에 들어온 누군가가 건네는 물건을 탁자에 올리는 부분에 반사적으로 재생을 누르자 스피커를 통해 게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터 단장님께 게일이 인사드립니다.”
순간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을 보기 위해 붙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외쳤다.
“빙고~”
그리고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발터와 게일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짧고 굵었다.
“박쥐 같은 자.”
화면에서 발터가 사라지고 재생이 멈추자 쉴라가 아무도 없는 화면을 노려보며 이빨을 갈았다. 그러고도 속이 풀리지 않는 듯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드는 그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불과 몇 주 전까지 수도에서 소드 팰러스를 대표하던 인간의 바닥을 보았으니.
[어처구니없는 인간이네요. 일리나가 의심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 초인파와 손잡고 소드 팰러스와 손을 잡을 척을 했을 줄은 몰랐어요.]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우린 발터와 게일의 영상만 봤잖아.”
“이드는 반대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군요?”
일리나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물을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던 쉴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더 싫군요. 속이기로 한 자와 손을 잡고 다른 자를 속이고 있다니. 기사가 할 짓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게일이 초인파에 연락하기 전에 먼저 모이엔과 손을 잡고 초인파를 속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가 있나요?”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게일이 초인파에 가 봤자 초인이 아닌 그는 초인파에서 외부인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조직에 섞이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버려질 수 있지 않겠어요?”
다른 조직으로 옮기는 게일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불안 요소였고, 근심거리였다.
“휴~ 아무래도 모이엔 단장만큼이나 게일 경에 대한 감시도 소홀히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쉴라는 게일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투로 말했다.
“그러는 게 좋겠죠. 일단 우리도 도둑 길드에 게일에 대한 것도 의뢰하도록 할 테니까요.”
“그럼 할 일이 생겼으니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웅하죠. 아, 그리고 황녀 호위 기사단에 차출될 기사단원들은 일리나와 인연이 있는 기사들로 부탁해요. 아무래도 전장에서 황녀를 지키는 건 일리나가 될 것 같으니까요.”
“이드 님께서는?”
“당연히 놈들의 심처로 진입해야죠. 그 안에 제가 찾던 것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알겠습니다. 일리나 님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기사들로 뽑아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쉴라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기사단 숙소로 돌아갔다.
이드는 쉴라를 배웅한 후에 수련장의 이그렌을 찾았다. 그가 잘 수련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없는지를 확인한 후 침실로 돌아왔다.
라미아와 일리나가 먼저 침실에서 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그럼 씨앗을 까 볼까?”
[어서요. 뭐가 나올지 궁금해 죽겠어요.]
“그런데 정말 안전한 거죠?”
두 사람 사이에서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털어 버리지 못한 일리나가 말했다.
[쓸모없을 수는 있어도, 해로울 일은 절대 없어요. 이드 몸에 들어가는 거라서 10번이나 확인했다고요.]
라미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거기다 계속 이대로 눌러 둘 수도 없는 일이니까. 어차피 깔거라면 빨리 까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하는 게 좋죠.”
이드가 라미아 편을 들며 겉옷을 벗고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하잖아요. 초인의 씨앗에서 뭐가 나올지.”
이드가 걱정하는 일리나를 달래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동시에 자신의 가슴속에 내력으로 눌러둔 초인의 씨앗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할짝였다.
초인의 씨앗.
이드는 전날 내력으로 내리 눌러놨던 놈에 대한 봉인을 풀고 그 내용물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일리나에게 말한 것처럼 씨앗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한 이유도 있었지만, 만의 하나 폭탄일지 모르는 씨앗을 언제까지 몸에 품고 있을 수는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라미아가 확인필 도장을 찍었으니 폭탄일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폭탄이라면 위급한 때가 아닌 지금처럼 안전한 곳에서 다양한 안전장치를 해 두고서 터트리는 것이 가장 안전할 테니까.
무엇보다 터트리지 않고 내력으로 눌러두는 것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손가락 세 개를 한데 묶어 둔 느낌이랄까? 당장 해 보면 안다. 생활을 못할 정도로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시시때때로
걸리적거리며 짜증을 불러온다.
이드는 굳이 그런 스트레스 유발 물질을 가지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혼돈의 파편과 언제 싸울지 모르는데, 괜히 전력의 손실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혼돈의 파편, 몸에 폭탄을 둘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어중간히 전력을 남겨 두고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드가 긴 시간 발전하고 강해진 만큼, 그들도 봉인을 온전히 떨쳐 내고 완전히 힘을 회복했을 테니까. 어쩌면 이드처럼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드는 만만치 않은 상대를 두고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거기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어. 막상 열어보니 정말 쓸 만한 놈이 튀어나올지?”
솔직히・・・・・・ 내심 굉장히 기대 중인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