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68화
805화
“후우우~”
바닥에 앉아 편하게 눈을 감은 이드가 긴 숨을 내쉬었다.
중단전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숨이 사라지자, 상처를 단단히 묶은 압박붕대처럼 초인의 씨앗을 둘러싸고 있던 내공이 서서히 압박을 줄여 나갔다.
‘슬슬 얼굴 좀 볼까? 과연 뱀이 나올지 매가 나올지 보자고.’
초인이 나타나고 수십 년.
초인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접근이 있었지만, 초인기에 대한 정확한 메커니즘은 아직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다.
특히 실험동물 취급받던 초인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 대륙의 새로운 힘의 축이 된 이후부터는 연구조차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연구 속도는 더더욱 늦어졌다. 개중에는 아예 연구를 포기한 곳도 있었다.
적지 않은 초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힘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초인기가 이단의 악마라고 신탁이 내린 것도 아닌데, 괜히 들춰내서 뭐하겠어? 오히려 우리들 목줄 조일 방법이나 찾겠지.”
“맞아. 맞아. 때로는 자연의 이치대로 그냥 두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지. 초인은 신과 세상이 우리 인간에게 내린 은혜라고.”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두려움보다는 욕심이었다. 새로운 초인이 나타나면 자신들이 가진 위치가 흔들릴 테니까. 특히 초인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될 경우 힘의 추는 그 제작자에게로 넘어갈 테니까. 초인이 되어 그 혜택을 누려 본 당사자이기 때문에 잘 안다. 초인기를 부여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굉장한 권력을 가지게 될지를 말이다.
그 앞에 엎드려 발이라도 핥아 초인기를 얻고자 하는 자는 평민과 초인을 가라지 않을 것이다. 평민은 초인이 되기 위해서, 초인은 더 강력한 초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인공적으로 초인이 생겨나는 순간 더 이상 초인들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프라이드도, 우월감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필요에 의해 생산되는 초인은 선택받은 인간이 아니라 요구에 맞춰 만들어지는 상품과 다를 것이 없으니까.
그런 일을 염려한 초인들의 반대가 없었다면 미완의 마탑도 마왕을 소환하는 흑마법사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당히 국가와 기관의 지원을 받으면서 연구, 개발에 노력했을 테니까.
뭐, 그렇다고 미완의 마탑이 초인들과 일반인을 데리고 인체 실험을 한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초인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서, 초인에 대한 연구는 가로막혔지만 초인들이 사용하는 초인기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이어졌다.
재미있게도, 그 이유는 초인이 기사와 마법사와 함께 대륙의 새로운 힘의 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각국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기사와 마법사의 마법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당연했고, 초인기 역시 그런 연장선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험동물 취급당하는 것에 분노해서 힘을 키우는 바람에 또 다시 연구 대상이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나마 연구의 목적이 초인의 탄생이 아닌, 초인기 그 자체라는 점이 다행이랄까.
덕분에 초인기에 대해서 밝혀진 사실들이 제법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초인기와 정령력의 유사성이었다. 그 외에도 초인기의 분류의 한계라거나 속성의 한계 같은 여러 가지 결과가 있지만, 이드는 첫 번째 사실에 가장 주목했다.
에단과 초인의 전투를 통해 스스로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인기가 각성하는 이 순간, 이드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확신했다.
‘틀림없어. 초인기가 정령력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정령력을 기초로 생겨난 것이 초인기다.’
무극신기와 소극적으로 공명하면서도 구분되는 의지를 지닌, 갓 태어난 아기 같은 작은 힘. 그것은 분명 정령의 것과 같았다.
이드가 정령사이기 때문에, 또 내공과 융합해서 사용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정령에 기초했다고 하면 초인기의 다양한 계통도 이해할 수 있지. 다양한 속성의 정령력이 얼마나 더해졌는가에 따라 새로운 속성이 태어날 테니까.’
예를 들면 노랑과 파랑 물감을 섞으면 초록색이 나오고, 빨강, 노랑, 검정을 섞으면 갈색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빠가가각.
씨앗의 껍질이 완전히 깨어지고 안에 있던 녀석이 태어났다.
굳이 묘사하자면, 제대로 삐약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작고 투명한 존재감. 이드는 녀석이 새로 태어난 정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약한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자유로운 영혼의 냄새가 없었다.
이드는 무극신기를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녀석의 껍질부터 뼛속까지 무극신기로 철저하게 조사했다. 단 하나의 비밀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존재의 의지는 거세된 것처럼 희미하다. 그래, 이건 차라리 잘 프로그래밍된 기계 같은 느낌이야.’
슈루루.
겨우 알을 깨고 나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씨앗에서 깨어난 초인기가 올올이 풀려나며 이드의 육신과 마나에 결합을 시도하고는, 곧장 이드의 정신체에 감응하기 시작했다.
무극신기를 통해 위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드는 그에 호응했다.
좁쌀만 한 내력까지 완벽히 의지 아래 두고 있는 이드의 허락이 없다면 초인기가 아무리 난리를 피워 봤자 감응은 불가능하니까.
철컥.
곧이어 이드의 정신에 시원한 무언가가 달라붙는 느낌과 함께 초인기와 이드가 이어졌다. 그 감각은 정령의 계약과 너무도 많이 닮아 있었다. 다음 순간 이드의 감각에 새로운 감각이 태어났다.
인간에게 없던 꼬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된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갓난아기가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새롭게 태어난 초인기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 감각은 매우 신기하고 기묘한 것이었다. 동시에 하염없이 부러운 기능이었다.
따로 배우고 익히지 않아도 힘을 깨우치는 것만으로 사용법을 알게 된다니. 무공도 공부도 이렇게 익힐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분명했다. 기초적인 사용법만 겨우 익혔을 뿐 숙련도는 바닥이다.
이후 숙련도를 올려 키워 나가는 것은 온전히 초인기를 얻은 초인의 몫인 것이다.
“금속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인가.”
프로그램의 설치를 마친 듯 초인기가 움직임을 멈추고 대기 상태에 들어가자 이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고생했어요. 초인기는 무사히 얻은 건가요?”
이드가 눈을 뜨기 전까지 조마조마한 표정이던 일리나가 밝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제없이요.”
“금속을 다루는 능력이 이드가 얻은 초인긴가요?”
“네. 직접 보여 줄게요.”
이드는 테이블 위의 스푼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꿀렁.
단단하던 스푼이 푸딩처럼 출렁이더니 둥근 구슬처럼 뭉쳤다. 이어 별 모양이 되고, 삼각형이 되고, 미니 사이즈의 일라이져가 되더니 작은 인형으로 변하던 중 주르륵 무너졌다.
“휴~ 현재는 여기까지네요. 보는 것처럼 금속의 형태를 마음대로 다루거나, 금속 성분을 분리할 수 있어요. 조금 능숙해지면 땅에서 특정 성분을 뽑아내서 금속 제품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거 마치…… 작은 대장간이네요.”
“뭐, 틀린 말은 아니죠.”
거의 정령과 같은 선에서 금속을 다루는 능력을 보고 대장간이라니! 이드는 묘한 탈력감에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이드가 얻은 초인기로 할 수 있는 대부분이 대장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그런데 라미아는 아직 안 끝났나 보네요.”
이드가 조용히 반응 없는 라미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초인기를 깨우며 이드가 초인기를 살핀 것처럼 라미아 역시 이드와 이어진 영혼의 연결을 통해 초인기를 살피겠다고 했다.
[으흐흐흐흐.]
이드가 말하기 무섭게 라미아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넌 또 왜 그래?”
[꺄하하하! 잭팟이 터졌어요. 최고의 초인기를 얻었다고요!]
앉은 자리에서 방방 뜨며 만세를 부르던 라미아는 곧 일리나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정신없는 모습을 보였다.
엄청난 하이텐션이다.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의미.
이드는 라미아의 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리나를 위해 라미아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자, 자, 기분 좋은 건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설명 좀 듣자. 뭐가 잭팟이고, 최고란 말이야? 설마 내가 얻은 초인기를 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말의 의미를 봐서는 분명 초인기에 대한 감상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금속을 다루는 능력이 그렇게 좋은 것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리나의 말이 섭섭하긴 해도, 대장간보다 백배 정도 나을 뿐이지, 아무래도 최고의 초인기라고 하기에는 좀・・・・・・ 아니, 많이 모자라다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다.
차라리 그레센이 아니라 지구라면 또 달랐을 것이다. 수많은 금속이 세상 모든 곳에 있고, 금속을 이용한 제품이 수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레센은 다르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최고의 기준이 바뀌긴 하지만, 일단 그레센 대륙의 초인기의 기준은 적에게 얼마만큼의 충격을 주느냐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면, 금속을 다루는 초인기는 그렇게 우수한 능력은 아니다. 능력을 통해 쇠구슬이나 검을 만들어 이드가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순수하게 능력의 쓰임으로 따지면 직접 불이나 물을 다루거나, 육체를 변화시키는 능력보다는 파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무슨 말이에요. 우린한테 이보다 더 최고의 능력이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에요?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벌 받을 거예요.]
하지만 라미아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혹시 그녀는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게 좋다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나도 궁금해요.”
겨우 라미아의 손에서 벗어난 일리나가 말했다.
[호호호, 좋아요. 모자란 학생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도록 하겠어요.]
라미아는 말과 함께 아공간에서 검은 뿔테 안경을 꺼내서 썼다.
이드는 조용히 눈을 가렸고, 일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경은 왜・・・・・・
[지구에서 설명할 때 복장이에요. 그보다, 핵심은 따로 있으니까. 이드, 고개 들고 잘 봐요! 이게 뭐라고 생각해요?]
“뭐긴 뭐야. 너지.”
정수리를 찌르는 라미아에 고개를 든 이드는 눈앞으로 쑥 내밀어진 라미아의 가면을 보고 말했다.
단순히 가면이 아닌 라마아의 본체. 설마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닐 테고?
짝!
순간 일리나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 알겠어요. 혹시 라미아의 몸이 금속이니까 금속을 다루는 능력이 있으면 도움이 되는 건가요?”
“뭐? 아니, 물론 라미아의 검신이 금속이긴 하지만・・・・・・ 정말 그런 거야?”
이드는 순간 혼동이 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라미아의 몸체가 현재 금속이기는 하지만, 과연 초인기가 라미아에게도 통할까?
[당연히 통하죠. 이드가 원하고 제가 원하면 당연히 통해요! 제가 변신할 수 있는 한계치가 단번에 랭크업하는 거라고요! 더 이상 이 아바타도 필요 없단 말이죠! 기대해도 좋아요. 이드, 일리나. 전 곧 다시 인간이 될 거에요.]
과연 그런 이유라면 라미아가 하이텐션인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가 얻은 초인기는 금속을 다루는 능력이지, 금속을 인간으로 바꾸는 능력은 아니란 말이지.’
아무래도 라미아가 너무 확대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은 이드다.
괜히 기뻐하는데 찬물을 뿌리는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이드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라미아의 기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흐흥, 내가 설마 그것도 모르고 좋아하겠어요? 결과적으로 금속에 대한 이드의 지배력이 늘어났잖아요.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서 늘려야 했을지 모를 지배력이 단숨에 늘어났으니 확실한 랭크업이죠.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난 지배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이드가 저에 대한 세상의 인식만 전환시키면! 짜짠~ 피가 흐르는 생명체의 탄생이에요!]
“확실히 그렇네?”
이드는 라미아의 기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