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70화
807화
벤텀 백작이 두터운 인의 장막을 헤치고 다가왔다. 개선장군처럼 가슴을 활짝 편 그의 얼굴은 밀린 숙제를 마친 아이 같았다.
“벤텀 백작도 파티에 참석했군요.”
“하하, 제가 어떻게 이 자리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잘 오셨습니다. 사무엘 백작은 요즘 저택에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일이 좀 바빠서 그리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어렵게 안색을 정리하고 말을 하자 벤텀 백작이 재빨리 그 사이를 치고 들었다.
“참, 마침 명예 후작님을 뵌 김에 전해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벤텀 백작이 내게요? 무엇입니까?”
벤텀 백작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드는 그가 시온 자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걸 알았지만 모른 척 답했다.
“그전에・・・ 이그렌 경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곧 있을 토벌에 대비해서 열심히 수련 중입니다.”
“하하, 과연 이그렌 경입니다. 파티도 마다하고 수련에 열중하다니. 일리나스 기사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전할 소식이 이그렌 경과 관련된 것인가 봅니다?”
“예. 일전에 명예 후작께서 어려운 이그렌 경의 가족을 도와주고 있는 사무엘 백작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사무엘 백작의 부담도 덜고, 소홀했던 시온 가문을 돕기 위해 시온 자작을 불렀고, 오늘 왕궁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기회가 되면 시온 가문에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일리나스 왕국에서 먼저 나섰다니. 참 다행입니다.”
이드가 흐뭇한 표정으로 벤텀 백작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만큼 과거의 인연인 시온 자작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뿌드득.
그 모습을 보던 사무엘이 조용히 이를 갈았다. 시온 자작가에 대한 지분을 같이 가져가기로 약속해 놓고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그나마 미리 이야기를 듣고 시온 자작을 잡아 두려 했던 일까지 실패했다. 그것도 그냥 실패한 것이 아니라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한 실패였다. 사무엘은 그런 일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시디푸에게 실망했고, 실실 비웃음을 흘리는 벤텀 백작을 죽이고 싶었다.
거기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명예 후작이 자신과 자작가 사이의 일을 아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아니지, 아니야. 그걸 알았다면 빼앗긴 날 그냥 둘 리가 없으니, 그건 아닐 거야.’
사무엘은 애써 부정적으로 흐르는 생각을 다스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시온 자작도 왕궁에 빼앗긴 지금, 사실을 알았다면 명예 후작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타국의 귀족이란 것도 개의치 않았으리라. 제국의 명예 귀족일 뿐 아니라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타이틀이라면 왕국 변병의 백작 하나 처리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나마 미리 이그렌의 마음을 돌려 둔 것이 천만 다행이군. 이대로 명예 후작 옆에 있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리라’
설마 이드가 자신의 문제를 이그렌에게 맡겼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대대적으로 착각 중인 사무엘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드는 더욱 깊어진 미소로 벤텀 백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작의 노력은 내 기억하도록 하지요.”
“모두 왕국의 은혜입니다.”
공을 왕국으로 돌린 벤텀 백작은 이드가 조금 마음을 연 듯 보이자 매우 기뻐했다.
시온 자작이 무사히 황궁에 도착한 소식도 들었겠다, 이드는 슬슬 파티장을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조금 이른 듯하지만, 일리나와 라미아가 화제의 중심이 되면서 확실히 얼굴도장을 찍은 덕분에 어지간해서는 무성의하다는 뒷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틈이 생겼다.
“소드 팰러스 청색 기사단 모이엔 게롯 단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소드 팰러스 적색 기사단 카발 트레인 단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소드 팰러스 은색 기사단 쉴라 이마큘리 단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삼색 기사단의 기사단장과 기사들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 것이다.
“자, 그럼 우린 이쯤에서 빠지자고.”
이드가 라미아와 일리나의 손을 잡은 순간 세 사람의 모습이 파티장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모이엔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한데 이 자리에 저보다 더 유명하신 분이 있다고 하던데. 어디 있는지 알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토벌 전에 꼭 친해져 두고 싶은 분이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모이엔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사방으로 눈을 번뜩였다.
당연하게도 그가 찾는 것은 이드였다. 자신의 말처럼 정말 친분을 쌓고 싶어서 찾는 것은 아니었다.
‘실력이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기에 파티보다 적당한 자리가 없지.’
모이엔이 이 파티에 참석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기 때문에, 그는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하나둘 들려오는 말이 심상치 않았다.
“음? 분명 저기 계셨는데.”
“그러게 말이오. 후작 부인 두 분도 저쪽에 서 있으신 걸 봤는데. 어딜 가신 걸까요?”
“…”
“설마・・・・・・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요.”
정답이다.
모이엔은 구애하던 여자에게 바람맞은 것 같은 허탈함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각.
저택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이그렌은 빵을 뜯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임시 집주인에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어라? 이렇게 일찍 돌아오시다니 ・・・・・・ 설마 벌써 파티가 끝난 건가요?”
“아니, 배고파서 밥 먹으려고 일찍 돌아왔지. 먹을 게 있어야 말이지. 음, 스프 냄새 좋네. 집사, 우리 먹을 것 좀 준비해 줘요.”
태연히 집사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하고 앉은 이드를 보며 이그렌이 실없이 웃었다.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파티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람은 이드 말고 없을 것 같아서다.
이드는 급하게 준비되어 나온 접시 위의 고기 한 조각을 물어뜯었다.
“역시 식사는 편하게 하는 게 최고야.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먹방할 필요 있나.”
그리고는 놀라 아직 입 안에 든 걸 씹어 삼키지 못하고 있는 이그렌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다. 벤텀 백작의 말인데, 시온 자작이 왕궁에 잘 도착했단다.”
“다, 다행이네요. 모두 이드 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나중 문제고 시온 자작에 대한 걱정도 없으니 이제 사무엘을 처리하는 일에만 집중해.”
“네. 최고로 깔끔하게 사무엘 백작을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이그렌은 말을 말로 끝내지 않았다. 남아 있던 요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듯 입안으로 쓸어 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읍…… 수련하러. 수련하러…………… 일어나겠습니다.”
입안에 든 걸 최대한 흘리지 않으려 하다 보니 말이 끊어진다. 저러니 입에 음식을 담고 말하지 말라고 하지.
“그래. 열심히 해.”
이드가 손을 흔들자 이그렌은 즉시 식당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는 다시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었다. 같은 시각, 귀족들이 소리 없이 파티장을 떠난 이드를 씹고 있었지만. 뭐, 어떤가. 없는 곳에서는 임금님도 욕한다는데.
후루룩,
따뜻하고 고소한 스프를 들이키는 이드의 머릿속엔 이미 파티에 대한 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틀 전 어전회의, 전날 출정 파티에 이어 오늘도 이드는 할 일이 있었다.
바로 황녀를 호위하기 위해 세 개 기사단에서 파견된 기사들로 만든 호위 기사단과의 인사가 그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이드가 황녀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했기 때문에, 임시지만 호위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황녀는 청색 깃털과 황색 갈기라는 황제를 대표하는 양대 기사단의 지휘권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여 주기 식일 뿐, 실제 지휘는 록마틴 후작의 명령을 황녀가 허락해 주는 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호위 기사단과의 첫 만남은 일전 게일과 대련했던 수련장에서 약속되어 있었다.
이드는 그 자리에 일리나와 함께 가기로 했다. 이드가 생명의 관에 대한 조사를 위해 진입하거나, 만의 하나 혼돈의 파편을 만나 전투를 하게 될 경우 그녀가 호위 기사단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차출된 기사들 중에 적당한 인물이 있으면 굳이 일리나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만, 세 개 기사단에서 차출되는 만큼 가망성은 없다고 봐야겠죠.”
거기다 그냥 기사단도 아니고, 두 개 기사단은 평소에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앙숙 중의 앙숙이기 때문에 특히나 더할 것이 분명했다. 상대 기사단에서 부단장이 나오면 명령 불복종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사와 초인을 호위 기사단에 같이 담아 둔 건지 이해를 못하겠단 말이야.”
어쩌면 황제는 지휘관으로서 사람을 얼마나 잘 이끌어 사용하는지 그 기량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이런 구성으로 호위 기사단을 꾸민 것이 아닐까?
“뭐, 그런 의도라고 해도 별로 상관없지만, 내 기사단도 아니고, 딱 토벌전에서만 제 역할을 해 주면 되는 거니까.”
설사 천사와 악마를 섞어 둔 기사단이라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은 침묵하게 만들 자신이 있는 이드였다.
“굴리고 굴리다 보면 싫고 좋고를 따질 여유도 없어지는 법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르르르.
황색 갈기 기사단에서 황녀의 호위를 위해 차출된 기사 갤플은 오싹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지?”
“왜 그래? 혹시 저놈들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건가?”
동료 기사가 전방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한데 무리를 이룬 기사들과 대치하고 있는 또 다른 무리, 바로 초인 기사단에서 차출된 초인들이었다.
“그건 아니야. 갑자기 한기가 들었어.”
“이해하네. 저 게으름뱅이 놈들과 같은 공간에 서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빌어먹을. 황녀님을 호위한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저 놈들을 보니 그게 악몽 같아.”
기사들은 너도나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신경 써서 골라 뽑았는지, 초인들에 대해서 호감은커녕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사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초인 기사단에서 차출된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군. 선택받지 못한 무능한 칼쟁이들과 같은 기사단이라니. 내 인생 중 가장 재수 없는 순간이 바로 지금일 거야.”
“누가 할 소릴! 제 것도 아닌 능력에 휘둘리는 멍청이들과 전장에 서려니, 아군의 공격에 뒤통수를 맞을까 봐 다리가 다 후들거린다고!”
“그럼 꺼져! 황녀님의 호위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래, 당장 돌아가라. 통구이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말이야. 하하하하.”
“용기 있으면 해 보든가. 촛불만 한 불을 만들기도 전에 목을 잘라 줄 테니까.”
와~ 와~
양측은 과연 이들이 기사인지 길거리 양아치인지 모를 정도로 원색적이고 저질스러운 욕설을 쏟아냈다.
도저히 누가 멈추기 전엔 멈출 것 같지 않은 모습에, 바보들과 섞이기 싫다는 듯 한쪽에 따로 떨어져 있던 은색 기사단에서 스폴이 나섰다.
“자, 멍청이들, 이제 그만 멈추라고. 곧 우리 신임 단장님께서 행차하실 시간이야.”
하지만 간단한 말로 상황을 풀기엔 양측이 너무 과열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상관 말아!”
“제삼자는 빠져!”
“크흐흐, 주군도 지키지 못한 것들이 어디서 목소리를 높이나 모르겠군.”
“・・・・・・ 이 개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