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81화
818화
“비올라다. 나를 부를 때는 비올라 마법사라고 불러 주길 바란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건방이 뚝뚝 떨어지는 자기소개다.
이드는 기가 막힌 소개에 비올라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그는 보지 못한 척 딴청을 피울 뿐이다.
스스로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라는 자부심이 있는 비올라였다. 이드에게야 힘과 바이트 타블렛, 그리고 라미아라는 존재 때문에 고개를 숙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러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기사들은 말 그대로 무식한 근육덩어리로, 이드의 저택에서 배우던 수련생들의 진화판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드를 온전히 무시하기는 힘들었는지 변명처럼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드 님의 허락을 받아 토벌대에 참가했다. 잘 부탁하겠다.”
“자기소개 하나 제대로 못하냐!”
무슨 말을 하나 기대하던 이드는 참지 못하고 비올라의 뒤통수를 날렸다. 휘청하며 뒤통수를 감싸고 끙끙거리는 그를 버려 두고 이드가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보다시피 건방진 꼴통이다. 대신 실력은 확실하니 기사단에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마법사가 필요하면 언제라도 요청해라. 친절하지는 못해도 확실하게 처리해 줄 것이다. 그렇지?”
이드는 말과 함께 번뜩이는 눈으로 비올라를 바라보았다. 선명한 손도장이 찍힌 뒤통수를 문지르던 비올라는 협박과 같은 압력에 억울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고개를 숙이지만, 하라는 대로 다 할 내가 아니라고!’
몰래 다짐하는 비올라였다.
그러나 비올라의 그런 속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이드도 아니었다.
“참고로, 비올라에게 일을 요청할 때는 라미아에게 먼저 알린 후 하도록. 재료의 수급 등의 문제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이드는 비올라를 향해 한여름 사이다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건 몰랐을 거다, 이 자식아. 사정사정해서 데려왔더니, 어디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어!’
잠시간의 반항기를 즐기던 비올라는 이드의 말에 울상이 되었다. 라미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배우는 것도 많고, 신세 지는 것도 많아 반항하지 못하는 약점을 이렇게 이용할 줄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를 짧은 서열 정리를 내포한 소개가 끝이 나자 조장들이 웃는 얼굴로 다가섰다.
“하하하, 잘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 부인께서 수고스럽게 기사단의 마법사 역할을 해 주셔서 죄송했었는데,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합니다.”
“그렇지요. 무조건 환영입니다. 우리 함께 황녀 전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봅시다.”
새롭게 2조의 조장으로 파견된 게스토란과 함께 3조의 조장이 두 팔을 벌려 비올라를 환영했다. 비올라의 언행에 불쾌해하는 모습은 일절 없다. 마법사 중에 유독 특이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일로, 비올라의 언행도 그런 것이라 여기고 넘긴 것이다.
‘두 조장은 비올라가 이드 님의 부하인 걸 모르는 모양이군.’
스폴은 불퉁한 비올라의 두 팔을 잡아 흔드는 두 조장을 보며 생각했다. 비올라는 분명 이드의 허락을 받아 왔다고 말했지만, 두 조장은 당연히 비올라가 황녀를 위해 황궁에서 나온 마법사라 아는 분위기다.
‘기사단에 섞이기에는 그쪽이 낫기는 하지.’
그런 생각은 두 조장만의 것이 아니었다.
간밤에 갑자기 토벌대에 합류한 비올라였지만, 이래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토벌대의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기사단도 아니고, 황녀의 기사단이다. 황녀를 위해서 기사나 마법사 한둘 정도 빼고 더하는 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여긴 것이다.
“황녀 전하의 아이넬 기사단의 일이 아닌가. 황녀 전하께서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그냥 두게.”
비올라에 대해 보고받은 록마틴 후작이 이렇게 말할 정도니, 말 다한 거지.
“그런데 비올라 마법사가 여기 온 것을 보면 적을 추적하는 일에 뭔가 중요한 변동이 생긴 것인가요?”
슬그머니 조장들 사이에서 빠진 스폴이 다가와 물었다.
아이넬 기사단에 파견되기 전 좀 더 유연하게 이드를 보좌할 수 있도록 쉴라가 대략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다.
이드로서는 나쁘지 않은 배려였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저놈은 정신의 관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이 보고 싶다고 생떼를 써서 온 겁니다. 에단과 저놈이 추적하던 쪽은 변화가 없죠. 대신 다른 쪽으로는 변화가 있었어요.”
이드는 전날 라미아를 통해 받은 스폴의 보고를 스폴에게 말해 주었다.
“과연 당장은 판단이 애매하군요. 하지만 최악을 가정해서, 저들이 정신의 관에 합류하거나 전투 중 토벌대의 후방을 노릴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쉴라 단장님께 이 정보를 전해도 될까요?”
이드는 어느새 심각해진 스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라고 알려 준 일인데 당연히.
“대신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까지는 밝히지 않는 것으로.”
“당연하죠. 우리 단장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흐뭇한 그녀의 미소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지금 스폴 경의 표정이 꼭 조카 자랑하는 이모 같은 거 알아요?”
“오호호호, 우리 단장님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기는 하죠. 힘만 센 아이요.”
쉴라가 무섭기는 한지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말하는 스폴이었다.
이후 그녀는 쉴라에게 이야기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정비를 마친 토벌대가 다시 여정에 올랐다. 토벌대의 목표는 적의 토벌이지, 여행이 아니었으니까.
그사이 아이넬 기사단과 황녀는 이드와 스폴의 손에 짬짬이 훈련을 계속했다.
토벌대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삼분의 이 지점까지 꾸준히 행군 속도를 높여 갔다.
행군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아이넬 기사단의 훈련 시간이 줄었다. 대신 훈련 강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밖에서는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것이라서일까.
황녀의 기사단 방문을 부탁했던 코넬리온 자작이 식사 시간과 휴식 시간 틈틈이 황녀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붉은 털의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시켰지만, 안타깝게도 훈련에 바쁜 황녀는 그를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코넬리온 자작은 황녀를 대신해서 이드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명예 후작님, 제 일생의 소원입니다. 제발 황녀 전하를 좀………….”
“아니,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래도 그러네.”
“아름다운 후작 부인이 두 분이나 계시면서 황녀 전하까지 독차지하시면 벌 받으십니다.”
이드는 당사자 앞에서 당당히 유언비어를 생산하는 코넬리온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어허,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그 말을 듣고 분노할 분들이 두렵지 않소?”
주로 황제나 일리나, 라미아의 특정인으로 말이다. 아, 황제는 아니려나.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이 아닙니까. 황녀께서 저희 기사단을 방문하시면 그런 소문도 없어질 것입니다.”
“소문 유포자의 침묵으로 말이지요.”
이드가 노려보며 말하자 소문의 유포자가 바보처럼 흐흐거리며 웃는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주변 기사들이 같이 낄낄거렸다.
“코넬리온 자작 다음 차례는 저희 기사단이라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명예 후작님!”
“어허~ 우리 기사단이지. 왜 자네 기사단이야?”
“둘 다 물러서게. 코넬리온 자작, 다음은 날세. 난 이 이야기가 처음 나온 날부터 기다렸다고!”
짧은 휴식 시간을 틈타 모인 사람들이 와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처음 황녀와이드를 조심스럽게 대할 때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며칠간 이어진 이드와 코넬리온 자작의 장난 같은 실랑이에, 이드에 대한 주변 기사들의 거리감이 많이 줄어들고 친밀감이 올라간 덕분에 이제는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이드는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의 팔에 목이 낀 코넬리온 자작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자 명예 후작이라는 위엄에 멀리서만 바라보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넉살 좋게 이드에게 엉겨 붙어 왔다.
너무 깔끔해서 거부감이 들던 첫인상과는 달리 제법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후, 좋습니다. 그럼 헛소문의 생산을 막기 위해서 황녀 전하께 따로 부탁을 드려 보도록 하지요.”
이드가 팔을 풀며 말하자 코넬리온 자작이 반색을 하며 얼굴을 들이 밀었다.
“으하하하, 정말이시지요? 드디어 제 정성이 통했군요.”
정성이 아니라 협박이겠지.
이드는 환호하는 코넬리온과 그 다음 순번을 정하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토벌대 선두 부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드가 있는 곳이 토벌대 중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 중 한 곳이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중 유독 살기와 투지가 섞인 진득한 시선 하나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신경이 거슬린다고 멀쩡한 눈을 뽑을 수도 없는 일.
이드는 기뻐 날뛰는 코넬리온 자작의 귀를 잡아 당겼다.
“일단 황녀 전하께는 말씀드리지만,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신 후에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 혹시나 으슥한 밤에 등 뒤에서 누가 찌를지도 모르니까.”
“후후후, 본래 미인을 얻기 위한 경쟁은 항상 치열한 법. 그런 비겁한 경쟁자를 물리칠 실력은 충분합니다.”
코넬리온 자작이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이드의 눈이 향하던 곳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이드는 그가 게일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게일의 일에 대해 알고 있으니, 대놓고 황녀에게 접근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조심하라고는 했지만, 실제 게일이 직접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모이엔의 간청 덕분에 겨우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던 집에서 벗어났는데, 또 사고를 쳤다가는 모이엔이 간청해서 해결될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게일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니까.
“그래도 조심하시오. 상대는 눈이 뒤집히며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 이드를 상대로 루키브레이커라는 속임수를 썼던 인간이다. 혹시 사람들이 모르는 충동 조절 장애가 있을지 모르는 일.
이드는 토벌대에 속한 사람들 중 가장 정감이 가는 그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코넬리온 자작도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주의하겠습니다. 그런데 명예 후작님이 보시기에 검왕자를 상대로 제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음, 노골적인 질문이구려. 조심스럽게 충고하자면 4클래스 이상의 방어용 아티팩트를 두 개 가지고 다니세요. 두 수만 참으면 자작에게 기회가 있을 것 같으니까.”
정말이다. 코넬리온 자작의 실력을 직접 본 적은 없기 때문에 확언하긴 어렵지만, 90% 정확한 분석이라고 자신했다.
두 번의 공격만 방어 없이 참아 넘겨 힘을 비축하고 게일의 틈을 만든다면 충분히 그에게 가능성이 있었다.
나머지 10%의 불확실성은 코넬리온 자작의 기지를 믿어 볼 수밖에.
“감사합니다. 그럼 즉시 5클래스 방어용 아티팩트를 두 개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역시 배포가 큰 남자다.
이드가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