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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화


441화

“확실히 문제가 있네요.”

이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보다 일리나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저 커다란 전투나 전쟁이 없다고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일리나와 친구들을 찾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리나에게 그 속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뭔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속이 썩어 있는 과일을 자른 느낌이 들었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드래곤이 단체로 움직였고,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절대 보통 일이 아니다. 평소 그 거대한 모습으로 활동하지 않아 제대로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존재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그들, 드래곤이다. 그레센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의 정점. 중간계 최고의 종족. 그들 중 행방을 알고 있던 존재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분명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 일단 혼돈의 파편이 공격을 한 건 아니야.”

확실히 혼돈의 파편은 강하다. 그들이라면 드래곤을 죽이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아무런 흔적도 소문도 없이 지상 최강의 종족이라는 드래곤을 처리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모종의 일로 드래곤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거나, 어딘가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기간이 60년이 넘어가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드래곤에게 60년이란 하룻밤 같은 시간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깊게 생각할 것 없어. 네가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 있는 일리나와 우디 장로님을 봐라.”

“하하. 그러네요.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이드는 채이나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고민을 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눈앞에 60년 동안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두 엘프가 있다. 그런데 답을 찾지 못한 것 같다. 자신이 잠시 머리를 굴린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진실은 머리로 계산해서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일리나가 고생이 많았겠어요. 세레니아와 연락도 되지 않고, 나도 이렇게 늦게 도착했고, 미안하고, 고마워요.”

이드는 이번에는 잊지 않고 일리나의 고생을 위로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신경 쓰고 있던 우디에게도 한마디 짧게 전했지만 그는 가볍게 받았다. 오히려 일리나를 향한 이드의 말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그럼 제게 전할 이야기는 다 한 거네요?”

이드는 이쯤에서 자리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채이나의 말대로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이 자리를 무겁게 할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일리나였다. 그리고 그 가족으로 생각되는 우디도 있는 자리였다. 무거운 분위기로 그들과의 만남을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네. 마지막으로 세레니아 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이전에 세레니아 님께서 주셨던 반지 있죠?”

“물론이죠.”

[여기 있어요.]

이드가 대답하고 라미아가 공간을 열어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 반지는 한번 대륙의 끝으로 날아가며 고생한 경험이 있는 이드를 생각해서 세레니아가 추적용으로 건네준, 드래곤 본으로 만들어진 반지였다. 다만 공교롭게도 이 반지 역시 이드가 대륙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튕겨 나가면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었다.

‘그러고 보면 세레니아와 반지는 별로 궁합이 좋지 않은 건가.’

라미아의 감정으로는 상당히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두 개의 마법 반지가 모두 사용 불능이니 말이다.

딸랑 딸랑.

반지를 받아 든 일리나는 이드의 붉은 반지를 아래에 놓고, 그 위에 자신의 푸른 반지를 올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떼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두 개의 반지가 각각 붉고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반지를 중심으로 두 개의 커다란 마법진이 나타나 회전하더니 곧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둥근 입체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그 마법진 안에서 마법의 언어와 도형이 복잡하게 자리를 바꿔 가며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신비로운 광경을 향하고 있을 때 일리나가 이드에게 말했다.

“세레니아 님의 선물이에요. 반지에 걸려 있는 마법을 재정비한 후 강화하고 두 개의 반지를 동기화시켜 하나로 묶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나면 세 개의 반지가 연동될 거라구요.”

“여기 있는 반지는 두 개. 세 번째 반지는 세레니아가 가지고 있겠군요.”

“그럼 능력이 강화된 후에 한 번 더 메시지 마법을 사용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옆에서 듣고 있던 채이나가 끼어들었다.

“이미 그러고 있어요. 동기화 마법과 함께 메시지 마법이 자동 실행되거든요. 세레니아 님도 이드를 찾고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까지 생각하고서 이드에게 반지 이야기를 꺼냈던 일리나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화된 반지의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런 반응 없이 동기화가 끝났다. 붉게 빛나던 마법진이 천천히 크기를 줄이면서 둘로 나뉘어 반지 속으로 사라졌다. 반지는 처음 놓여 있던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반지의 안쪽으로 각각의 색에 반대되는 붉고 푸른 실선이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아쉽구나. 마법의 강화에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마법의 실패에 우디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드래곤 로드의 실종이라는 절대 평범치 않은 일이 빠르게 수습이 되기를 원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듯해서다.

“혹시 모르니 좀 더 반응을 기다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드는 세레니아가 붉은 인연이라고 이름 붙인 반지를 들어 일리나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웠다. 혹시 세레니아를 찾는 데, 또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아공간의 한쪽에 던져 놓지 못하고 손가락에 끼운 것이다.

마법의 실패로 쓰린 속을 따뜻한 차로 달래고 이번에는 이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차원이동 후의 사건과 생활, 그리고 전투. 이후 그레센으로 돌아온 후 있었던 채이나와의 만남과 일리나를 찾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일리나와 우디에게 전했다. 고난이랄 것은 없었지만 고생길이었다. 우디는 고생했다고 한 마디를 해 주었고, 일리나는 가만히 이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우디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이야기가 끝이 났으니 그만 답답한 집에서 나가자고 했다.


엘프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정령수라고 부른다. 정령수는 특별한 존재로서 살아 있는 존재다. 물론 모든 나무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지만 정령수는 단순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였다. 그의 가장 특별한 점은 그가 어느 순간 스스로를 인식하고 깨어나 정령계에 뿌리를 내리고 중간계에 가지를 드리운 존재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존재를 아는 존재들에게는 ‘문’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령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았는데, 이유는 정령수의 주변에 머무르는 수많은 정령들 때문이다. 속성을 가리지 않고 정령수 주변에 모여 있는 정령들은 그가 원하지 않는 시선에서 그를 가려 주었다.

문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정령수를 통하면 정령들은 특별한 힘의 도움 없이도 두 세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정령수를 통해서 중간계로 외출을 나온 정령은 정령수의 곁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정령수의 나이에 따라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정령의 등급도 달랐다. 일반적으로 정령수의 격과 지혜는 그 나이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가 깡패라고 했다. 하급의 정령이라도 그 수가 수십 수백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힘은 가히 소규모의 자연재해다. 그 정도의 힘이 모이면 정령수의 모습을 숨기는 일쯤이야 쉬운 일인 것이다. 이런 정령수가 자주 목격되는 곳이 엘프 마을이다.

각성하는 정령수의 대부분이 엘프 마을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자연적으로 각성하는 나무가 있으면 엘프들이 그 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한다. 덕분에 ‘정령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라는 말은 엘프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엘프가 정령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그를 사랑하고 존중한다. 정령수는 그들이 평생을 살아가는 숲의 일부이면서 엘프의 기원이 되는 정령계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또 대부분의 정령수가 그러하듯 그들은 오래된 존재로서 높은 영혼의 격을 지니고 존경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마을에서 정령수에게 가장 사랑받는 존재들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즐거운 발걸음이 그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정령수에서 놀게 한다. 그가 즐거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정령수에서 즐겁게 놀며 숲과 나무와 정령과 친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조기교육 되시겠다. 실제로 효과도 있다.

그렇게 양측의 동의에 의해서 마을의 정령수 주변은 항상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짤랑이는 이야기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했다. 매일매일 떠들썩하던 아이들과 정령들의 웃음소리가 오늘은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힐끔힐끔.

나뭇가지 위에 앉은 아이들이 조용히 우디의 집만 바라보고 앉아 있다. 항상 같이 놀던 정령들은 아이들의 낯선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하나둘 아이들을 따라 열심히 우디의 집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령수에 가서 놀라며 쫓겨나 정령수에 오르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태어난 후 마을을 찾아온 첫 손님의 방문에 그들의 마음은 온통 우디의 집 안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요도 잠깐이었다. 한 아이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인간이었어. 내가 봤어! 귀가 길지 않았다구.”

“나도 봤어. 인간이야. 하지만 나쁜 인간은 아닐 거야. 엘프와 같이 왔잖아. 엘프의 친구야!”

“걱정 마. 만약 저 인간이 나쁜 짓을 하면 내가 혼내 줄 테니까.”

“바보들. 그 인간은 우리 마을 사람이야. 저 인간이 바로 일리나가 기다리던 짝이야!”

“뭐? 정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누가 말해 줬는데? 너도 사실 모르는 거지!”

“그래. 테이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모르잖아!”

와와와!

그 아이에 이어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소곤대기 시작하더니 금방 목소리가 커지고 여기저기서 중구난방으로 각자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정령수는 곧 익숙한 소란을 되찾았고, 정령들은 아이들과 놀자며 그들의 팔다리를 간질였다.

“안 돼, 안 돼. 오늘은 손님들을 봐야 한단 말이야. 마을 밖에 사는 사람은 처음 봐. 너희들도 여기서 같이 기다리자.”

몇몇 아이들이 정령의 장난에 정령수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우디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디의 집에 들어간 손님들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엘프 특유의 느긋함으로 시간을 즐기며 기다릴 줄 아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수다스럽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조적으로 말괄량이 정령들은 모두 일어나 놀기 바빴고, 결국 그 유혹에 혹해서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그 수가 절반이 되었을 때 드디어 기다리던 문이 열리면서 우디와 일리나, 그리고 손님들이 나왔다.

“나왔다. 가자~!”

테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소리치며 가장 먼저 정령수 밑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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