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1화
478화
전날 가볍게 축하 파티를 즐긴 이드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리나와 라미아, 그리고 에단을 데리고 마을을 나섰다. 마침 부서진 숲을 복구하기 위해서 마을을 나가는 수호수의 가지와 함께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전날 일어난 난리로 인해서 몬스터들이 조용했다.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기운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시온을 빠져나가면서 몬스터들이 눈에 띄질 않았다. 간간히 기척이 느껴지는 몬스터나 맹수도 많은 엘프들이 섞인 일행들을 덮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멀리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숲의 강자인 엘프를 알아본 것이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안전한 결계 안에서 생활한다고 하지만 시온에 살고 있는 엘프들에게도 몬스터는 확실히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결계 안에서만 생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사나운 맹수와 몬스터들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천연의 방벽이었다. 그게 바로 시온이 악명을 떨치는 이유였으며, 그 악명이 두려워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어막이었다. 푸른 나무 마을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평화롭고 고요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결계보다는 이들 몬스터의 역할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지금처럼 이드를 찾아서 시온에 침입하는 자들이 있을 때는 몬스터들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들이 많이 사라졌으니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는 일인 것이다. 엘프들에게 몬스터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였다.
뭐, 몬스터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드가 이런 생각을 은근히 내비치자 수호수의 가지가 가볍게 웃으며 걱정할 것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리를 비웠던 몬스터들이 곧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집 나간 몬스터들이 찾아간 숲이나 산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들어앉은 주인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마리 호랑이가 한 산에 같이 살 수 없듯이 같은 영역을 공유하게 된 몬스터들은 힘으로 영역을 지키기 위한 경쟁을 할 것이고, 패배한 쪽은 살 곳을 찾아 시온으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이와 비슷한 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드는 누군가 다시 시온을 찾기 전에 몬스터들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수호수의 가지와는 숲의 끝에서 헤어졌다. 그들은 수백의 몬스터가 움직이며 부숴 놓은 숲을 정령과 마법의 힘으로 다시 나무가 울창했던
모습으로 복구시키는 일을 해 나갈 것이다.
“우리 목적지가 어디라고 했지?”
십여 일 전 에단이 올라서서 시온을 바라보던 언덕에서 시온을 바라보던 이드가 물었다. 어제를 기준으로 에단에게 말을 놓고 있는 이드였다. 실제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았다.
그 말에 손목 안쪽을 바라보며 긁고 있던 에단이 급히 고개를 들어서 대답했다.
“아, 네. 마스터. 일단 일리나스의 국경 도시인 하이탈로 가셔야 합니다.”
긁적긁적.
이드는 대답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팔목을 긁고 있는 에단의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아직도 가려워?”
“아하하. 좀 불편하긴 합니다. 마스터.”
“어디 한번 보지.”
이드의 말에 에단이 팔을 내밀었다. 에단의 팔목 안쪽에는 반구형의 볼록한 혹과 같은 게 생겨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책상의 모서리처럼 육각의
각진 부분이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그 크기는 새끼손톱만큼 작은 것이었는데, 붉은색의 보석처럼 보였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보석 주변의 피부와 혈관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라미아를 불렀다.
“라미아, 이거 괜찮은 거야?”
[네, 아직 완전히 일체화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라미아는 이드의 말에 답을 해주고는 아깝다는 듯 에단의 팔목에 박혀 있는 보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에단, 통증도 아니고 살짝 가려운건데 그걸 못 참고 그렇게 티를 내야겠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라미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그녀는 에단의 팔목에 박아 둔 물건이 너무 아까웠다. 사로잡힌 심장. 에단의 팔목에 박혀 있는 보석의 이름이었다.
전날 이드가 숯덩이가 되면서 왕의 시체에서 찾아낸 보물로, 보석을 둘로 나눠서 가지고 있으면 다른 한쪽을 소환할 수 있도록 만드는 물건이었다. 원래 라미아는 그 한쪽을 일리나에게 줄 생각이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드와 함께하겠다는 일리나를 생각해서, 혹여 그녀가 위험한 일을 당할까 싶어 준비한 물건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그녀를 이드의 곁으로 소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어제 에단이 큰 사고를 치면서 그 아까운 사로잡힌 심장을 에단에게 사용하고 말았다. 처음 사로잡힌 심장을 활용할 생각을 한 인물은 이드였다.
혹시나 마을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따로 떨어지거나, 에단의 몸속에 들어앉은 마족이 무슨 짓을 벌일 때 에단을 바로 불러들여 즉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말이다.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미아는 원래 일리나를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깝기만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고집으로 내어놓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라미아는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사로잡힌 심장의 한쪽을 에단의 팔에 이식해 주었다. 그냥 가지고 있어도 소환에는 문제가 없지만 에단의 상황이 특별한 만큼 몸에서 떼어 놓지 않도록 특수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마법으로 이식을 하기는 했지만 남의 몸에 있던 물건을 타인의 몸에 넣어 두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만은 없었다.
에단은 라미아의 핀잔에 내심 한탄했다. 그도 이제 라미아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은 죄도 있겠다. 그저 선처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에구구.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역시 이번 임무 전에 직업을 바꾸는 건데, 잘못했어.’
더구나 자신이 부숴 버린 봉인과 관련된 일도 있어서 얼마나 이번 임무가 길어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에단은 쓰게 웃으며 라미아를 보고 사정했다.
“잘 좀 봐줘라. 나도 차라리 아픈 건 참겠는데, 가려운 건 도저히 못 참겠는걸 어쩌니. 조금만 긴장을 풀면 나도 모르게 긁고 있어서 나도 미치겠다.” 정말 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의 가려움이었다.
[아이, 정말. 이쪽으로 내밀어 봐요.]
사정하는 에단의 모습에 라미아도 끝까지 매정하게 굴지는 못했다. 에단이 고맙다며 팔을 내밀자 라미아가 사로잡힌 심장의 다른 한쪽을 꺼내 들고는 마법을 펼쳤다. 이십 분 정도 주문과 마법진이 번쩍였다. 그 덕분에 에단의 팔목에 묻혀 있던 사로잡힌 심장이 절반 크기로 줄어들고, 발갛게 부어올랐던 피부도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아아아. 이제 좀 살겠다.”
지글지글거리며 녹아내릴 것 같던 팔목의 가려움이 가시자 에단의 입에서 나른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로잡힌 심장이 만일의 일을 대비한 이드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에단이지만, 그 가려움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이드는 에단이 라미아에게 몇 번이나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하이탈의 좌표는 아나?”
좌표만 있다면 텔레포트로 한 번에 이동하면 된다. 하지만 마법사도 아닌 에단이 그런 좌표를 기억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좌표는 모릅니다. 그리고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는 한 번에 이동하기보다는 꾸준히 모습을 노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목적은 이드가 시온 밖에 있다는 것을 알려 더 이상 푸른 나무 마을을 찾아오는 인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드는 에단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걸어야지. 에단이 방향을 잡아.”
“네, 이쪽입니다. 마스터.”
이드의 말을 들은 에단이 휑한 들판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그 뒤를 이드가 일리나의 손을 잡고 뒤따랐다. 라미아가 하늘을 한 바퀴 돌고는 이드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꾸물꾸물 구름이 가득하던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큰비는 아니지만 보고 있으니 온몸이 나른해지는 비다.
지붕 끝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던 티티가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으자자자차, 야, 비 온다. 아무래도 오늘은 공친 것 같은데, 어쩔래?”
오늘은 그만 일을 접고 싶은 마음의 티티였지만 그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가만히 답을 기다리던 티티가 목소리를 높여서 한 번 더 물었다.
“엉? 어쩔래?”
또 씹혔다. 티티는 자신의 말이 연이어 씹히자 휙 돌아앉으며 소리쳤다.
“야, 어쩔 거냐고!”
돌아앉은 티티의 눈에 도끼를 베고 누워 있는 벤과 양손 사이에서 투명한 푸른색 구체를 회전시키고 있는 싸가지가 보였다.
‘벤은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른다지만, 저놈은 자는 것도 아니면서 대답이 없어. 하여간 싸가지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이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화내는 것도 지친다. 티티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야, 싸가지. 오늘 공친 것 같은데 어쩔 거야?”
“……뭘?”
이걸 그냥 팰까? 티티는 고개도 들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싸가지의 모습에 불끈 주먹을 쥐었다.
“…………오늘 공쳤다고. 집에 가자고!”
그제야 싸가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산속에 은밀히 지어진 움막 밖을 바라보았다.
·비 오네?”
이제 알았냐? 티티는 순간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싸가지가 다른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푸른 구체를 계속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야…….”
티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 소리를 하려는 순간 싸가지의 대답이 같이 들려왔다.
“……어차피 돌아가도 할 일 없잖아. 그리고 비 온다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것도 아니야. 계집 끼고 한잔하고 싶으면 이따가 밤에 해라.”
“야, 이 싸가지야! 내가 술 먹고 싶어서 그러냐!”
“……그럼 아냐?”
느릿하게 고개를 들고 묻는 말에 티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하려니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처지라 빤히 바라보는 싸가지의 눈을 보고서 도저히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또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비도 오고 기분도 처지는 것이 자주 가던 술집의 마담과 달콤한 와인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에이 씨. 그래, 알았다. 알았다고. 빌어먹을. 태풍이 부는 것도 아니고, 다니는 놈 하나는 있겠지. 설마, 없겠냐!”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티티는 애매한 말을 하고는 다시 돌아앉아 하이탈로 들어가는 길목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푸른 구체를 굴리고 있는 싸가지를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놈. 은근히 말하는 게 부담스럽단 말이야. 거기다 지가 무슨 기사야? 산적이 뭔 수련을 저렇게 열심히 하냐고.’
한편으론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산적질을 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수련하기도 힘들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에이 씨, 나도 공격형으로 각성했으면 저놈처럼 수련이라도 해 볼 텐데. 재수 없게 방어형이라서 혼자는 수련도 못 하고 말이야.’
티티는 괜히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다시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공친 것 같은데, 나다니는 놈이………… 있긴 있네!”
고개를 돌리던 티티는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일어나라. 손님 오셨다!”
“….세 명이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일을 할 때는 빠릿빠릿한 싸가지가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 했다. 티티는 싸가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봤다. 벤은 여전히 한밤중이다. 그를 깨우는 것도 티티의 몫이었다.
티티는 벤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차올렸다.
터헉!
순간 쌀가마를 찬 듯 퍽퍽한 소리가 들리며 벤의 몸이 들썩였다. 그러고 나자 벤의 한쪽 눈이 슬그머니 열리며 티티를 향했다.
“으음. 뭐냐? 티티.”
“그만 자고 일어나, 임마. 손님이다!”
“이런 날씨에 손님? 영양가 있는 손님이냐?”
벤은 티티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는 말했다. 그러자 밖을 바라보고 있던 싸가지가 대답했다.
“……………기사로 보이는 사내 하나. 수련생 도련님 하나. 여자 하나.”
“크흠. 그럼 영업해도 되겠네.”
싸가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벤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어깨에 둘러매고는 기지개를 켰다.
“자, 그럼. 오늘 일당을 벌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