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11화
848화
위치 정보를 확인한 베일록이 수첩을 접었다.
“프리실라 장로님의 위치를 알아내신 겁니까?”
그 모습에 뼈에 가죽만 남은 제자가 신중히 물었다.
“그래.”
베일록은 들고 있던 수첩을 흔들어 보이고는 품에 넣었다. 도저히 그 내용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보자고 하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빼빼 마른 제자는 해더웨이들처럼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자신들이 할 일은 베일록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질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 적 함정은 어떻게 할까요. 정찰 임무로 두 명이 죽었을 뿐이라 공격 옵션은 충분합니다만, 프리실라 장로님을 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두어야 한다고 하시면 바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함정에 빠졌음을 확인한 경우 시간과 전력에 여유가 있다면 공격을 선택한다. 함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아군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리실라의 구출을 목적으로 한 그들은 전력의 여유는 있어도 구출을 위한 시간이 부족했다.
“정찰병을 다시 준비시켜라. 확인을 겸해서 적을 방심시킨다.”
“예. 마스터.”
입가를 가리고 고민하던 베일록이 말했다. 확인을 겸하긴 하지만 함정이 있는 곳에 다시 정찰을 가라고 하는 것은 죽으러 가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의 말을 아무 불만 없이 따랐다. 마치 신의 말씀을 들은 신관처럼. 실제 그들에게 베일록은 신이었고, 아버지였다. 베일록은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장애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던 그들에게 마법사라는 특별하고 새로운 삶을 주었다.
베일록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것이 골덴 기사단의 신념이었고, 그들이 기사단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독하군. 충성을 입에 달고 사는 기사 놈들도 저런 명령은 거부할 텐데.”
해더웨이의 명령으로 구출 작전에 참가한 두 사람. 그중 창을 든 티엔이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저분들 정말 마법사가 맞습니까?”
“저도 좀 헷갈리는 것 같은데,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시죠?”
“너무 무서운 분들이라 사양하렵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무섭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적은 힘없는 노인과 아이라도 조심해야 한다. 용병 일을 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비히더의 말에 손을 흔든 티엔이 베일록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임무는 구경이 아니라 베일록을 돕는 것이니, 조언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티엔인가? 뭐지?”
“예, 장로님. 다름이 아니라 공격을 하실 거라면 신중하시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들이 공격 사실을 알면 프리실라 장로님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설마 내가 그런 기초적인 사실도 모를 것 같아 하는 소린가?”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놓치고 있으시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린 겁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목적은 오직 프리실라의 구출이고,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그렇다면 방금 제자들에게 죽으러 갈 준비를 시킨 건 뭐지?
“그 말씀은…… 양동 작전이로군요?”
“놈들이 알아서 둘로 나뉘었으니. 득이 될 방향으로 써먹는 것은 당연한 거지. 이쪽이 시끄러워질수록 상대적으로 프리실라가 있는 곳은 비게 될 테고, 그러면 자연히 구출하기 좋은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지.”
“음, 그렇지요.”
티엔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프리실라의 위치인데 그것도 알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높은 작전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아군을 미끼로 써 적을 끌어내는 것이 핵심인 만큼 아군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즉, 지금 베일록은 이 작전을 위해 제자들을 죽이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그가 아는 베일록은 음침하지만, 조용하고 이성적인 마법사였다. 또 그럭저럭 좋은 스승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목적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제자들을 죽음으로 떠미는 것을 보니 새삼 그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란 마음을 감추기 바빴던 것이다.
그간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은 무엇인지.
“휴우~ 정말이지 여기 마법사님들은 모두 무서운 분들뿐인 것 같습니다.”
굳은 표정을 한 티엔의 너스레에 비히더가 조용히 속삭이듯 답했다.
“저희 관장로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후후.”
두 사람이 한 걸음 물러서서 보고 있는 사이에 베일록은 그 자리에서 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렸다. 작전 내용자체는 간단했기 때문에 복잡할 것이 없었다.
가장 중요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시간 분배였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되니 구출 타이밍을 잘 잡아야 했다.
“그 타이밍은 내가 잡도록 하지. 스켈, 넌 내가 계획한 대로만 움직여라.”
“예. 마스터.”
“두 사람은 남아 있는 것이 어떤가?”
비쩍 말라 마치 스켈레톤처럼 보이는 스켈에게 명령을 내린 베일록이 이번엔 티엔과 비히더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을. 당연히 장로님을 따라가서 도와 드려야지요. 해더웨이 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티엔이 들고 있던 창을 흔들며 말했다. 자살 특공대와 함께 남으라니, 절대 사양이다. 괜히 스켈들과 있다가는 같이 미끼로 쓰일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 느낌은 비히더도 마찬가지인지 당장 베일록의 옆에 붙어 섰다.
베일록은 그런 두 사람을 귀찮은 듯 바라보다 척후의 임무를 진 제자를 내보냈다. 미리 마법을 걸어 둔 덕분에 잠시 후 그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가 떴다.
“작전을 개시한다. 나머지는 나를 따르도록 하이드 마나포스!”
마법으로 자신과 일행이 가진 마나의 흔적을 지운 베일록이 앞장서자 티엔과 비히더, 그리고 세 명의 제자들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은밀히, 그러나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제자들, 골덴 기사단은 그들과 반대로 숲의 경계를 향해 치고 나갔다. 우리가 여기 있다고 자신들을 보라고 외치는 듯 요란하게.
마치 구애하는 공작새처럼 요란한 움직임을 본 이드가 혀를 찼다.
“쯔쯔쯔. 숨기려면 처음부터 숨기든가. 어설프기는.”
예언자 라미아 님의 말씀대로 세 번째 정찰병이 땅의 거름으로 변한 후 베일록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눈여겨보던 이드였는데, 마침 그들이 뿜어내던 마나의 기운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걸 똑똑히 포착한 것이다.
베일록이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신중을 기해 공들여 펼친 하이드 마나포스가 오히려 반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도 모르나? 차라리 마나를 감추려면 모든 마법사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던가.”
이건 뭐 실수도 어지간해야 기뻐하지. 이드는 대놓고 우리 딴 꿍꿍이 있어요, 하고 광고하는 모습에 기가 차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레센 사람이 한국 속담을 어떻게 알겠어요? 모르는게 당연하지. 그러니 저런 실수도 하는 거고. 그보다 무슨 계획일까요?”
“간단해. 한쪽은 숨고, 한쪽은 날 잡아 잡수 하고, 머리를 내밀었잖아. 저러면 백이면 백 양동 작전이지.”
“우리 뒤를 치려고요? 아니면 일리나가 지키고 있는 프리실라 쪽을 노리고? 아니다, 저놈들은 협곡 위치는 모르니까 전자겠네요.” “꼭 그렇지도 않지. 마커를 통해 협곡에 오래 머물렀다는 걸 알면 프리실라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고 생각할 테니까.”
전자건 후자건 중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저들이 무덤 자리로 뛰어든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목적을 잊은 게 아니라면 당연히 후자겠지? 사라진 사람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겠어?”
물론 일리나의 실력이야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지켜야 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피해가 있을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싸움이라면 지지 않겠지만, 지키며 싸우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왜, 열 손이 도둑 하나 막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드 자신이나, 라미아가 일리나를 도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아무래도 사라진 사람들의 행적을 확인해 봐야 한다. 괜히 헛걸음하고 돌아올 수는 없으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음. 찾았어요. 역시 생각대로에요.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걸 보면 일리나가 있는 협곡을 목표로 하고 있나 봐요.”
“그렇다는 말이지. 그럼 한 사람은 가서 일리나를 도와줘야 겠네. 그런데 마나를 감췄는데도 잘 찾았네?”
“후후, 이쯤이야 간단하죠. 마나만 잘 감추면 뭐 해요? 달고 다니는 눈은 그대로 있는데, 감시하던 눈 중에 원견 마법과 패밀리어가 사라진 자들을 따라가고 있어요.”
즉, 라미아는 하이드 마나포스로 마나의 흔적을 지운 베일록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붙어 있던 눈을 쫓아 베일록들의 움직임을 찾아낸 것이다.
“보는 눈도 갈라졌단 말이지.”
아무래도 보던 눈이 줄면, 볼 수 있는 곳도 줄어든다. 당연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때리면 정신의 관에서는 알 방법이 없다.
“좋았어. 그럼 난 협곡으로 가는 놈들을 쫓을 테니까, 여긴 라미아가 맡아.”
“어느 정도까지요?”
“티 나지 않는 선에서 철저하게. 내가 상대해 봐서 아는데, 기본적으로 저기서 나온 놈들 중에 살려 둘 만한 놈들은 없더라고.”
마법사건, 그들이 부리는 마수건 사람을 무슨 요리 재료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프리실라의 정보에 따르면 눈앞의 베일록과 골덴 기사단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무엇보다 죽이러 왔으면 죽을 준비도 하고 와야 하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 아닌가. 그러기 싫다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가지든가. 싸움을 하질 말았어야지.
“알았어요. 티 나지 않게 철저히. 살아남는 사람이 있어도 다시는 정신의 관에서 나오지 않는 두더지로 만들어 놓을게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 같은 모습을 보니, 정말 새로운 종의 두더지가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 모습을 한 두더지라니. 꿈에 나오면 무서울 것 같다.
“참, 우선 일리나에게 그쪽 노리는 놈들이 있다는 소식부터 전하는 거 잊지 말고.”
“으이그, 쓸데없는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세요.”
라미아가 어서 가라는 듯 휙휙 손을 저었다.
아니, 자기가 평소 하는 잔소리는 생각도 않는 건가?
이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두운 밤이라 만류일품의 은신도 필요 없었다. 부운귀령보면 충분했다.
그리고 숲에서 고개를 내민 수십 명의 골덴 기사단 기사들 중 누구도 이드의 모습은커녕 기척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자, 그럼 손님이 오지 않으시니, 어쩌겠어. 아쉬운 쪽이 찾아가야지?”
이드가 숲속으로 사라지자 라미아가 양손을 살살 비비며 말했다. 찾아가는 서비스가 최근의 시대 흐름이지 않던가.
저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결국 찾아가면 그만.
징징징.
활짝 펼친 라미아의 손가락 끝에 지름이 3센티 정도 되는 동전 파스 크기의 마법진 다섯 개가 생겨났다. 다섯 손가락 끝에서 춤추던 마법진은 곧 라미아의 손을 따라 골덴 기사단을 향해 일렬로 늘어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고객님. 찾아가는 개미지옥 출장 서비스를 시작하겠습니다!”
구구구.
흥에 겨운 라미아의 목소리와 함께 땅에 심어 둔 함정마법이 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고객을 찾아서.
한편 숲으로 뛰어든 이드는 라미아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나무 위를 달리는 것도 아니고, 빽빽한 나무 사이를 달리는데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보통은 앞에 나무가 나타나 피하다 보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경로가 라면 면발처럼 구불구불해지는 데 반해, 부운귀령보의 공능을 빌린 이드는 마치 진짜 유령처럼 나무를 통과하듯 지나치며 숲을 일직선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덕분에 베일록 일행을 따라잡는 것은 금방이었다.
애초에 마법사의 이동 속도가 무인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이드는 베일록 일행이 눈에 들어오자 안력을 돋워 빠르게 그 주변을 살폈다.
‘찾았다.’
그리고 목표한 것을 찾아낸 순간 부운귀령보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푸스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