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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21화


858화

이후 이드는 몇 차례 더 나서서 전투를 위장했다.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정신의 관에서 의심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했다.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그것을 공격하는 것이 싸움의 핵심인 만큼 너무 자주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킬 때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희생자를 가정해서 힘도 점점 줄여 갔다. 그래도 멀쩡한 땅이 꽤 많이 뒤집혔다. 물론 살기나 의념이 담기지 않은 수법이었기 때문에 땅은 그저 말 그대로 뒤엎어진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태면 당장 무슨 씨를 뿌려도 풍작이 될 텐데, 땅을 보며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공을 들인 덕분인가. 정신의 관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베일록들과 이드가 정신의 관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페리코가 주기적으로 전해 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공을 놓칠까 안달이 나 속도를 올린 토벌대가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에서 결단을 내리라고 합니다.”

한나절 반 만에 다시 적을 추적 중이라는 보고를 하던 페리코가 통신을 마치고 돌아섰다.

“무슨 결단을 내리라는 거지?”

지금까지 조용하던 정신의 관에서 보인 반응이었기에 모두가 궁금한 듯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적을 단숨에 전멸시킬 전력을 지원받고 상황을 정리할지, 아니면……”

“음~”

강력한 지원에 대한 말에 심각해지는 조원들을 보고는 이드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아니면?”

“프리실라 장로님의 구출을 포기하고 복귀할지를 결정한 후 연락하랍니다.”

슬쩍 눈치를 살피는 페리코의 말에 늙은 당나귀처럼 주저앉아 있던 베일록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관에서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겠지.”

“매정하네. 그래도 장로인데. 버리라니.”

이드가 혀를 차자 베일록이 입술을 실룩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리실라를 포로로 잡고 사지를 못 쓰게 만든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리뿐 아니라 양손이 잘린 걸 알고, 뒤늦게 분노하다 이드에게 맞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등이 욱신거렸다.

차근히 생각하면 고위 사제의 도움을 받으면 복구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흥분했나 싶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소?”

“왜, 복귀하겠다고 연락하고 싶은가 보지?”

이드는 베일록을 보며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마 간절히 바라는 일일 것이다. 이미 여기엔 그가 구하고 싶어 하던 프리실라도 없다. 그녀는 효율적인 이동과 관리를 위해 이틀 전 용기사를 불러 치털링 영지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옮기기 전 이드는 그녀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공사를 해 뒀다. 그 모습에 내심 혹시나 하고 눈치를 보던 프리실라와 베일록은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니 베일록으로서는 안전한 정신의 관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거잖소.”

“그거야 당연하지.”

그렇게 쉽게 돌려보내 줄 거였으면 애초에 잡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당연한 대답처럼 관이 요구한 양자택일에서 선택해야 할 것도 명확했다.

베일록을 풀어 줄 것이 아니었으니,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다. 관에서 최후통첩을 해 온 이상 통신을 피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확정적으로 대대적인 지원이 올 거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베일록을 통해 만만한 놈들로 지원을 요청해서 처리하는 쪽이 여러모로 편하다.

그때 알단테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토벌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합니다. 차라리 치털링 영지로 물러나 토벌대에 합류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서야 감시를 못 하지 않나.”

“……”

감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고 하고 싶은 걸 훌륭히 참아 낸 알단테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하, 농담이니, 그만 얼굴 펴라. 하지만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야. 토벌대가 가까이 왔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 관에서 어떤 함정을 설치할지 모르니까. 그러니 최소한 물러나더라도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물러나야지.”

“단장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이드는 감명받은 듯 고개를 숙이는 알단테를 뒤로하고는 베일록에게 다가갔다.

“자, 들었지? 그럼 지원으로 누굴 보내 달라고 해야 우리가 편하고 관에서도 납득할지. 말해 봐.”

마치 부하처럼 부리는 말에 베일록은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는 신세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지?”

“몰라서 묻나? 당신이 내 포로니까. 벌써 잊은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내 말을 따르지 않을 경우엔 마나 써클과 혹을 잘라 버린 후 빈민가에 버릴 거다.”

“이익…….”

다시 튀어나온 협박에 베일록이 분노에 못 이겨 콧바람을 씩씩거렸다.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협박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프리실라를 포함해서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들이니까.

자신의 마나와 임플란트 브레인을 걸고서는 감히 뻗대 볼 수도 없다.

“좋다. 따르겠다. 하지만 하나만 약속해다오. 더 이상 마나 써클과 임플란트 브레인으로 날 협박하지 않겠다고.”

“못할 거 없지. 단, 당신이 내 일에 적극 협조한다면 말이지.”

“좋다. 하지만 내가 답해 줄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건 프리실라를 통해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참, 하는 김에 페리코 당신도 어때요?”

이드의 지명에 베일록의 뒤에서 조용히 숙이고 있던 페리코가 움찔 놀라 베일록을 보고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이드가 그의 대답에 만족할 때 베일록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나에겐 반말인가? 페리코는 존중해 주면서.”

“당연히 그는 포로로 잡힌 순간부터 얌전하고, 협조적이었으니까. 누구와 다르게 말이지. 태도가 다르니, 대우가 달라지는 건 당연한 거지. 당신도 존중받고 싶다면 그만한 행동을 보이라고. 그리고 마침 좋은 기회잖아?”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술을 질끈 깨문 베일록이 설명을 시작했다.

“황색 유니온.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 가장 가까운 전력이다.”

황색 유니온. 이름은 제법 그럴 듯했다.

“어떤 자들이지?”

“사람이 아니라 그레이트 오크로 만든 부대다.”

“그레이트 오크라면 제법 보기 힘든 놈들인데. 그 가져다 붙이기 좋아하는 관에서 그냥 끌고 와서 부리는 건 아닐 테고. 몇 마리지?”

그레이트 오크는 주로 척박하고, 강력한 몬스터가 많이 모이는 산맥 깊은 곳에 번식하는 오크 종으로, 사람도 환경에 따라 조금씩 특징이 있듯이 흔히 알고 있는 오크보다 머리 두세 개 정도가 더 크고 힘이 강한 놈들이었다.

“300마리다. 관에서 특별한 조종 체계를 심어 놔서 입안의 혀처럼 부릴 수 있지. 거기에 족장급 오크에게 특수한 초인기를 부여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부족원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토벌대가 오면 이놈들이 가장 앞에서 병사들과 기사들을 상대로 싸우게 되어 있다.”

뜻밖의 좋은 정보다. 그런 놈들이라면 토벌대와도 싸우게 될 테니까.

“그런데 토벌대 상대로 고작 300은 적은데?”

“7가지 색깔별로 나뉘어 만들어져 있다.”

“기본 2100마리인가.”

이드의 말에 2100마리의 그레이트 오크가 전장에 길게 늘어선 모습을 상상한 조원들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상상한 모습이 사뭇 박력 있게 느껴진 탓이다. 거기에 더해 그중 족장급은 초인기도 가지고 있다지 않은가,

‘그나저나 7가지 색깔이면 무지개인가. 도대체 누가 지은 이름이야? 오크로 부대를 만들어서 무지개색으로 부대 이름을 붙이다니.’ 

분명히 말해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중 황색 유니온을 콕 찍은 이유라도 있나?”

“황색 유니온을 조종하는 마법사의 지배력이 일곱 중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나나 페리코라면 충분히 지배권을 빼앗아 올 수 있을 정도로.”

즉, 잘만 하면 주먹질 한번 하지 않고, 훈련된 그레이트 오크 300마리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좋아. 그럼 하나 더 부르지. 가능하겠어?”

“장담은 못 한다. 황색 유니온을 담당한 마법사는 약해도, 다른 컬러 유니온의 지배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들었으니까.”

“그럼 두 개 유니온을 요청하는 것으로 하지. 최소한 우리 감시조를 상대하려면 두 개 정도는 되어야지. 조장, 안 그래?” 

두 개 유니온이면 그레이트 오크 600마리이다. 600은커녕 6마리만 해도 버거운 알단테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추, 충…….”

이드는 곧장 베일록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그의 말만 믿은 것은 아니다. 치털링에 있는 프리실라를 통해 재확인을 마치고 움직였다.

과연 장로 두 사람의 의견은 정확했다. 정신의 관은 베일록의 요구에 기다렸다는 듯 응하며, 당부의 말을 더했다.

“토벌대의 도착이 가깝습니다. 부관주께서는 이틀 안에 일을 마치고 복귀하기를 원하십니다.”


척척. 척.

다음 날 아침. 두 개 유니온이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이미 정신의 관과는 제법 떨어진 터라 새벽에 출발한 듯. 아침 해와 함께 나타났다.

“이야, 제법 장관일세.”

근육질의 600마리 오크가 오와 열을 맞춰 행군하는 모습에 이드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기본적으로 성인 남자의 세 배쯤 되는 덩치를 가진 오크가 뿌연 김을 뿜어내며 행군하는 모습은 힘과 박력이 넘치다 못해 터졌다.

그리고 그런 오크들의 중심.

오크들이 든 두 개의 가마 위에 각각 다섯 명의 마법사들이 올라앉아 있었다

“중앙의 마법사가 오크를 조종하고, 그 옆 두 사람이 그를 보좌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두 마법사는 만약을 대비하지요.”

페리코가 마법사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벤이라는 감시조 조원은 부스스한 머리로 골덴 기사단의 기사처럼 꾸미고 있었다. “자, 그럼 마중 나가 봅시다.”

이드의 말에 페리코를 선두로 한 셋은 600의 오크 무리를 향해 다가갔다.

“골덴 기사단의 페리코입니다.”

페리코의 말에 대열의 일부가 갈라지며, 안쪽 마법사들이 있는 곳까지 길이 열렸다.

훅~ 훅~

대열 안으로 들어가자 오크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묘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상당히 심한데, 저 마법사들은 괜찮나?”

“마법으로 악취를 막아 놓긴 하는데, 이젠 냄새가 익숙해져서 크게 상관이 없답니다.”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중 가장 적응이 빠른 것이 후각이다. 같은 냄새를 5분 정도 맡고 있으면 그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적응해 버린다던가.

“반갑습니다. 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요?”

어쩐지 너무 쉽게 길을 열어 준다 싶었더니, 녹색 유니온의 마법사 중 페리코를 아는 이가 있었던 것이다.

“예. 기억합니다.”

“고생이 많다고 들었는데, 베일록 장로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저 앞에서 적들을 감시 중이십니다. 일단 관에 유니온과 합류한 것을 알린 후에 장로님을 뵙도록 하시죠.”

페리코의 말에 두 가마 위에 올라 있던 마법사들이 내려 관에 합류했음을 보고했다.

“자, 그럼 바로 장로님과 합류하도록 합시다.”

“아, 그전에 황색 유니온 리더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면?”

“리더의 홀을 좀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홀을 말입니까?”

페리코의 지명을 받은 마법사가 생각 없이 둥근 수정구를 내밀자.

턱!

페리코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리고는 난데없는 사과의 말이 이어지자 황색 유니온 리더는 불쾌함보다도 어리둥절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갑자기 사과는 왜……………”

퍽! 퍼퍼퍼퍽!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중심으로 황색 유니온의 마법사들의 머리가 깨지며 쓰러졌다.

그 모습에 한발 늦게 녹색 유니온의 마법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오크들 사이로 뛰어들자 즉시 오크들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크들과 마법사들이 아무리 빨라봤자.

취을난지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퍼퍼퍼퍽!

마법사들의 앞을 막은 오크들을 요리조리 피한 취을난지가 녹색 유니온의 마법사들의 머리에도 훌륭한 구멍을 뚫어 주었다.

“배, 배신이냐……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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