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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4화


481화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싸가지는 벤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망설이지 않고 도망쳤다.

엘프가 있어서 내키지 않는다고 했던 벤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감은 정확했다. 벤을 눕힌 저 괴물 도련님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덤벼 봐야 벤과 같은 꼴을 당할 뿐이다.

뿐이랴. 이제는 인원수에서도 밀린다. 벤이 생각한 수를 상대편이 그대로 사용하게 생겼다. 그렇다면 필패다. 같이 당하는 것보다는 뒷수습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싸가지는 초인기를 사용해서 연신 땅을 터트려 저들이 추적해 오지 못하게 막으며 산속으로 달렸다.


에단은 억울했다.

이 산적 놈의 공격에 계속 도망만 다녀야 했다. 그러다 이드가 상대하던 놈이 쓰러지고 이제 이드의 도움을 받아 상대를 처리하려고 하니, 놈이 스스로의 불리를 알고 도망가 버렸다. 자신은 아직 한 대도 때려 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가 얌전히 도망가게 놔둘 것 같아?’

에단은 이를 갈며 허리띠 뒤에 감춰 둔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암기를 꺼내 던졌다. 상대가 흙먼지로 눈을 가리고 폭음으로 귀를 가려 놓기는 했지만, 에단의 초인기 간파의 눈에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 얍삽한 두더지 새끼야!”

에단의 암기는 싸가지를 향해 똑바로 날았다. 투척은 트와이스의 필수과목 중 하나였다. 에단은 그 과목에서 나쁘지 않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을 뿐 결코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급한 상황에 눈을 돌리는 용도로만 쓸 수 있는 딱 그런 수준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단의 암기는 싸가지를 맞추지 못했다. 싸가지가 직접 손을 쓰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에단을 괴롭히던 푸른 구슬이 다시 생겨나 암기를 쳐내 버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상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산속으로 멀어져 갔다.

에단은 이를 갈고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마스터, 놈이 도망갑니다!”

이드에게 놈의 도주를 일렀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어째 시큰둥했다. 뭔가 싸한 느낌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흙먼지가 대부분 가라앉은 그의 눈에 일리나가 싸우는 곳 가까이로 다가가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이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 급박한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에단은 말을 잃었다. 그러나 이대로 놈을 놓칠 수는 없었다. 에단은 이드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마스터, 저놈이 도망갑니다. 잡아야죠. 저렇게 두면 원한을 가지고 문제를 만들지 모릅니다. 저런 위험한 놈은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 해요.”

‘우리가 경비대도 아닌데, 틀기는 뭘 틀어?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생각 외로 고전한 모양이네.’

이드는 앞서 자신이 세운 계획을 뒤집어엎는 소리를 하는 에단을 보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계획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헛소리 그만하고, 정신 차려라, 에단. 원래 풀어 주기로 했던 놈들이잖아. 내 정보를 흘려서 시선을 끈다. 네가 생각한 계획을 네가 뒤엎을

생각이야? 왜 엉뚱한 소리를 하고 그래?”

이드의 말에 에단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스스로 머리에 열이 오른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 그랬지요.”

자신이 세운 계획을 이야기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에단은 그래도 아쉬운 듯 몇 마디 더 말할 것처럼 우물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슬쩍 시선을 돌려 보지만 도망가던 놈은 이제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드는 다시 일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문득 입을 열었다.

“초인이라는 사람들 말이야, 정말 신기한 것 같지 않아?”

갑작스러운 이드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들었다. 이드는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닌 듯 말을 이었다.

“방금 직접 부딪혀 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힘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부기(斧氣)로 사용한 힘은 분명히 마나와는 달랐는데 말이야. 초인기라는 것도 그래. 내가 아는 초인이 많지는 않지만 모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고, 능력이 발현되는 원리도 알 수 없어. 도대체 초인은 어떤 존재일까?”

“……”

에단은 침묵했다. 이드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에단도 알고 싶었다.

초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처음 초인이 출연한 이후 계속되어 온 것이지만 누구도 거기에 답하지 못했다. 지고한 현자도, 세상의 섭리를 연구하는 마법사도 몰랐다. 혹시 그들이 악마의 자식과 같은 이단이 아닌지 불안한 마음으로 신께 답을 구했지만 신은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으셨다.

이쯤 되면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멀리하고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초인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초인으로 각성한 사람들이 전날 술 한잔을 같이한 친구이거나, 옆집 사람, 또는 피를 나눈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각성한 초인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 그들에게는 어제까지 없던 강력한 힘이 생겼다. 단순히 두려움에 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인은 그렇게 당당히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초인들 역시 스스로에 대해서 알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떤 사실도 알아내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오늘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이드에게는 의문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나한테만 튕기는 것 같단 말이야.”

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티티를 바라보았다.

그는 벤이 쓰러지고 싸가지가 도망가는 것을 본 후 극도의 불안으로 시퍼렇게 변한 얼굴을 하고는 일리나와 싸우고 있었다. 제대로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초인기는 티티의 의지와는 별개인 듯 빈틈없이 그를 지켜내고 있었다.

원래 티티가 들고 있던 무기는 병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짧고 뭉툭한 검과 작은 방패의 두 가지였다. 그중 방패를 통해서 발현되는 초인기가 걸작이었는데, 방패에서 그물형태로 솟아난 기운이 티티를 향해서 일정거리 이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공격을 막아 비켜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방어를 티티가 아닌 방패가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티티는 그저 방패의 방어로 상대방에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빈틈을 기계적인 동작으로 찌르기만 할 뿐이었다.

이드는 그 공방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눈을 빛내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저어야 했다.

‘없다. 일리나와 저 초인간의 전투에는 나와 같은 반발력이 없다. 역시 나한테만 튕긴다는 말인데, 내가 그렇게 싫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에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드가 찾고 있는 것은 초인이 가진 마나에 대한 저항력이었다. 초인의 기운은 이드가 공격할 때는 미묘한 반탄력으로 밀어내고, 방어할 때는 이드의 기운을 깎아 들어온다. 그것은 매우 미약한 차이지만 이드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방 안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모기처럼 말이다. 이드는 이 사실을 헨리를 통해서 처음 경험했고, 이번에 벤을 통해서 재확인했다.

초인들이 원래 가지는 특성인가 싶었지만 일리나가 싸우는 모습을 봐서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에게만 특별히 반응하는 초인이라는 존재에 이드는 눈썹을 모으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한 마리 모기에 비유할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다. 아직까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티티와의 싸움을 더 끌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드는 일리나에게 빠르게 끝낼 것을 주문하고 에단을 던져 넣었다. 그가 가진 간파의 눈이라면 티티의 초인기의 빈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드의 생각은 어이없을 정도로 제대로 들어맞았다. 에단이 들어가고 십오 초. 멀뚱히 티티를 보던 에단이 힘없이 내지른 일검에 티티가 쓰러지고 만 것이다.

“억………… 어떻게…………”

다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티티는 아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뻔히 보이는 에단의 찌르기에 자신의 초인기가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런 게 있다. 일단 자고 있어라.”

에단은 티티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켰다.

‘역시 아까 그놈하고는 상성이 나빴던 거야. 그놈이 아니라 이놈을 상대했어야 하는 건데.’

에단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이드를 바라보았다.

“한 놈이 도망가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까요? 마스터.”

원래 계획은 산적 놈들이 스스로의 패배를 예감하고 도망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드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두 산적을 멀뚱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 산적들, 오랫동안 여기에 자리 잡고 있었으면 현상금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한 놈당 오백 실링의 현상금이 붙어 있습니다.”

“실링? 골덴이 아니고?”

“네, 골덴으로 계산하면 숫자가 너무 작아 보인다고 실링으로 표시하는 게 요즘 유행입니다. 골덴 같은 고액권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이 없기도 하구요.”

오백과 오십. 확실히 어감에서 많은 차이가 나기는 했다.

“그럼 이 남자는 두고, 저자만 데려가서 신고하고 현상금을 받지. 아무래도 그냥 조용히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런 얘깃거리라도 있어야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는 곳이 있겠지.”

결론이 나오자 빠르게 움직였다. 우선 라미아가 일리나가 상대하던 산적을 물어서 산속에 버리고 돌아왔다. 벤은 에단이 업고, 그의 도끼와 짐은 이드가 들었다.


이백오십 년의 역사를 가진 하이탈은 그 건설 목적이 여타의 국경 도시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국경에 건설되는 도시나 요새는 국가 간의 전쟁을 대비한 국가 방위 시설로서 건설되는데, 하이탈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상행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이탈은 인구 이백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제대로 이름도 없었던 마을은 위험하게 국경과 가까운 곳에 만들어진 가난한 곳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고 타국과의 전쟁보다는 교류와 거래가 많아졌고, 이를 위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기 전 잠시 쉬어가는 쉼터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가난했던 사람들은 이때가 기회라며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마을 차원에서 식당과 여관을 지어 상인과 용병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지자, 돈이 된다 생각한 왕국에서 그 자리에 국경 도시를 건설하고 본격적인 국가 간 무역 도시로서 기능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때문에 도시 안을 자세히 살피면 일반적인 국경 도시나 요새와는 세세한 곳에서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이탈에 와서 그런 차이점을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곳이 바로 출입문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국경에 위치한 영지와 도시의 출입은 철저하게 관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륙의 도시에서도 출입을 위해서는 경비와 한 번 이상은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이곳 하이탈은 달랐다. 우선 출입구부터 일반적인 크기의 두 배는 될 정도로 넓은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문을 지키는 경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 안팎으로 작은 초소가 지어져 있었고, 그 앞에 경비가 한 명씩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비상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자리할 뿐이고, 출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전만 해도 다른 영지와 같이 경비들이 출입을 통제했는데, 영주가 바뀌고서 문을 활짝 열고 출입을 자유롭게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무슨 짓인가 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니 출입하는 상인과 용병들이 더 많아져서 도시의 수입이 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출입이 자유로우면 사람들이 부담 없이 찾아오니까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우리도 저기 줄서야 하냐?”

하이탈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워낙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제법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원래는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에겐 이놈이 있지요. 하이탈에서 현상금을 걸어 놓은 범죄자. 이놈만 있으면 줄 설 필요 없이 돈까지 받아서 바로 통과죠. 하하하.”

에단은 기분 좋게 웃으며 등에 업고 있는 벤을 흔들어 보였다. 이 정도면 무거운 놈을 여기까지 업고 온 보람으로는 충분하다 싶었다.

그리고 과연 에단의 말대로 벤을 업고 초소로 다가간 그들은 줄을 서지 않고 하이탈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신 벤을 확인하고, 그를 사로잡은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느라 줄을 서는 것 이상의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편하게 앉아서 차까지 얻어 마시고 좋은 여관까지 추천받았으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밖에 있으면 들어오도록.”

창을 통해 세 사람이 하이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동문 수비대장의 말에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충! 부르셨습니까.”

“그래, 자네 심부름 좀 하지.”

“명령하십시오.”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병사에게 수비대장이 미리 준비해 놓은 편지를 전해 주었다.

“이걸 성에 가지고 가서 전해 주게. 그리고 밖에 병사 몇을 동원해서 방금 잡혀 온 산적 놈도 같이 성으로 전해 주도록 하고. 그럼 나가 보게.”

“예, 알겠습니다. 충!”

수비대장은 병사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수비대장의 머릿속에도 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쯧, 영주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수비대장의 얼굴에 작게 근심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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