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43화
879화
“푸흐흐.”
분노로 씰룩이는 입술을 진정시키던 모이엔은 끝내 웃고 말았다.
청색 기사단의 단장, 아니 수석 기사가 된 후 이리 업신여겨지긴 또 처음이었다. 기가 막혔다.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검왕조차 자신을 이렇게 취급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좋군요. 웃으시는 걸 보니 잘 이해한 모양입니다.”
‘저게 어떻게 웃는 얼굴이야?’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사들은 기가 막혔다. 눈이 있다면 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웃는 얼굴로 볼 수는 없다.
이건 그 사람을 오래 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백이면 백 모두 화내는 얼굴이라고 할 것이고, 또 그게 사실이다.
기사들은 긴장했다. 그들도 눈과 귀가 있어 이드와 모이엔의 신경전을 안다. 자신들이 아는 단장은 절대 분노와 모욕을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연 여기서 터질 것인가?
터지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할 때였다. 껄껄거리며 대소를 터트린 모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이해했습니다. 좋은 기사라면 명령에 따라야지요.”
좋은 기사 좋아하네. 그런 좋은 기사가 눈에 살기가 번들거리나?
‘그 실력에 살기 하나 깔끔하게 정리 못 하고 말이야.’
이드가 내심 혀를 찼다. 아마 청색 기사단 단장이 된 후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참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드로서는 모이엔이 화병이 나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건 상관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러면 좋을 것 같다. 믿음을 배신한 인간은 천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늘이 벌을 주지 못한다면 같은 인간이라도 벌을 줘야지.
“다행입니다. 그럼 조용히 후퇴하도록 할까요? 조용히 있는 거미들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고.”
이드의 말에 따라 청색 기사단이 조용히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어지는 법이 아니던가.
‘어디 조용한 후퇴가 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 않겠나? 명예 후작 나으리.’
이후의 계획이 있어 물러서지만, 이런 수모를 겪고 얌전히 물러날 성격이 못되는 모이엔이었다. 그는 이드를 사납게 노려보며 그의 애창을 두 손으로 비틀었다.
찰칵!
그러자 그의 애창을 똑 닮은 송곳 형태의 암기가 숨겨진 공간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창에 이런 암기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은밀히 장치해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용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지금 그의 자존심이 위급한 지경이니 말이다.
손에 떨어진 암기를 감싸 쥔 후 손과 암기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암기에 새겨진 미세 마법진이 가동되며 꼬리 부분으로 강력한 압력이 분출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강력한 압력은 멀쩡한 손가락도 가볍게 절단할 것 같았지만, 이를 대비해 미리 내력으로 손을 보호하고 있던 모이엔의 손은 멀쩡했다.
피슛!
탄탄한 발사대를 얻은 암기는 화염 거미를 노리고서 검은 동굴을 향해 로켓처럼 쏘아졌다.
카칵!
큰 폭음이나 충격음은 없었다.
화염 거미의 거체에 비하면 갓난아기의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암기는 벌침과 같은 크기니까.
하지만 단단한 각질을 뚫고 들어와 내부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암기가 주는 충격은 벌침의 수백 배.
“끼긱! 끼이이익!”
이 통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본능으로 알고 있는 화염 거미는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쿠르르릉!
듣기 거북한 기괴한 소리와 함께 화염 거미가 동굴에서 튀어나왔다. 동시에 명령을 받은 듯 웅크리고 있던 골렘 거미들이 기사들을 향해 튀어 올랐다.
“이런 청색 기사단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놈이 흥분한 모양인데. 큰일이군요. 조용히 후퇴하는 것은 힘들게 된 것 같습니다, 명예 후작님?” 모이엔은 즉시 이드를 찾았다. 입으로는 큰일이라면서 눈은 명백히 웃고 있다. 그는 생각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 일그러진 이드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순간 그가 바라보는 반대쪽 어깨에 손이 올라오며 뒤에서 이드가 나타났다.
“쯧쯧, 역시 전투라는 게 이쪽 마음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그・・・・・・ 렇지요.”
도대체 언제? 이드의 실력을 인정하는 한편 그래도 상대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을 품고 있던 모이엔은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해서 말을 할 때까지 몰랐다니.
이드는 희희낙락한 표정이 빗물에 씻긴 듯 사라진 모이엔을 보며 웃었다.
‘어디서 웃기지도 않는 개수작을……?
모이엔의 수작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저분한 살기야 한시도 가시지 않아 다를 게 없었지만. 그의 손에 내력이 몰리는데, 기감을 활짝 열어 둔 이드로서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드 앞에서 이런 수작을 할 생각이라면 최소한 내공과 소리, 공기의 흐름 등을 감추는 아티팩트와 그 아티팩트의 마나를 다시 감추는 아티팩트. 그리고 자신의 내력을 완벽히 감출 수 있는 반박귀진의 경지는 필수다. 그게 최소 조건이다.
그래도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모이엔은 아쉽게도 모르고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무지는 죄고, 모르면 당하는 법이다.
“그런데 저 화염 거미라는 놈. 모이엔 단장의 말처럼 청색 기사단을 보고 움직이긴 했나 봅니다. 지금도 보세요. 정확히 모이엔 단장만 노려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장이 대장을 알아 본 걸까요?”
이드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슬쩍 옆으로 물러나 본다.
하지만 여덟 개의 눈에서 뿜어진 적의는 여전히 모이엔을 향하고 있다. 당장 놈이 달려오는 방향도 바뀌지 않는다.
“역시 모이엔 단장의 대단함을 알았나 봅니다?”
“놈이 왜…….”
이드의 말과 상관없이 모이엔의 눈썹이 구겨졌다.
분명 자신이 공격하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알고 자신을 노린단 말인가?
그는 그저 당황하는 이드의 모습, 그리고 자신과 청색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드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청색 기사단에 물러가라 한 이상 이 장소의 지휘권은 이드의 것이니까.
그런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자신과 청색 기사단만 노려서는 지휘권이 어쩌고 말고를 따지는 것도 우스워진다.
“혼자서 힘드실 것 같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만. 도와 드릴까요?”
그냥 도와준다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힘들 것 같으면 도와주겠다고?
“필요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저는 일단 물러나 있도록 하지요.”
이드는 무조건 반사 수준으로 즉각 튀어나오는 모이엔의 거절에 두말하지 않고 멀찍이 물러섰다.
동시에 화염 거미를 향해 은밀히 취을난지의 지력을 뿌려 놈의 분노를 키웠다.
“끼이이익!”
그에 화염 거미가 요란한 울음과 함께 모이엔을 향해 맹렬한 불꽃을 뿜어냈다.
“감히 골렘 따위가! 거미 따위가!”
그렇지 않아도 신경을 살살 자극하는 이드의 말에 분노하고 있던 모이엔이다. 불꽃을 창으로 막아 낸 그는 그 분노를 화염 거미에 쏟아부으며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이쪽으로 들이닥치는 거미 골렘을 향해 청색 기사단이 검을 뽑았다.
“청색 기사단 사인 일 조. 분열 대형 거미 골렘을 사냥한다!”
부기사단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 지휘 아래 청색 기사단은 순식간에 전열을 가다듬고 전투를 시작했다. 과연 오색 기사단 중 하나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응이 훌륭했다.
“싸가지와 의리는 없어도 싸우긴 잘~ 싸우네.”
청색 기사단이 부숴 놓은 거미 골렘의 파편 위에 걸터앉은 이드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감상했다.
이드는 그중 모이엔과 화염 거미의 전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사들의 싸움보다 이쪽이 더 화려하고 위험한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모이엔의 어깨에 묻어 있는 취지의 한 조각 내공이 여간 흐뭇해 보이지 않아서다. 마치 자신이 만든 명품을 보는 심정이라고 할까? “어디 금선탈각 쪼가리 같은 짓거리를 요즘은 애들도 하지 않는 수작인데, 하려면 나처럼 좀 스마트하게 하든가.”
이미 처음부터 모이엔의 수작을 파악했던 이드다.
하지 말라고 나서면 억울하다 할 것이고, 그냥 두면 모이엔의 수작에 넘어간다.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 이드가 책임질 것 없이 화염 거미와 청색 기사단의 문제로 만들면 된다.
이드는 모이엔의 손을 떠나는 암기에 뒤이어 취을난지를 쏘아 냈다. 본래 음유한 성질을 가진 취을난지였고, 자신의 계획에 만족하고 있던 모이엔은 이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그 후 이드는 화가 난 화염 거미를 향해 널 공격한 건 나야, 라고 말하듯,
모이엔의 뒤에서 취을난지의 기세를 쏘아 내고, 그 일부를 모이엔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하게 묻혀 두었다.
당연 그 기운이 강하거나, 오래가면 아무리 음유하고, 은밀해도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화염 거미가 목표를 정하게 만드는 데, 오랜 시간 기운을 발산할 필요는 없었다.
황소가 투사를 향해 돌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화염 거미가 확실하게 모이엔을 목표로 인식하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드는 모이엔의 어깨에 뭉쳐진 취을난지의 기세를 흩어 버렸다.
당연히 그런다고 화염 거미의 목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끼이이익!”
“단장님!”
“크라압! 이놈은 내가 죽인다. 기사단은 거미 골렘부터 처리해!”
이것이다.
화염 거미는 강했다. 입에서 뿜어내는 화염도 강력했지만, 한계가 없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다리와 거대하고 단단한 몸체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였다.
괜히 금강불괴가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바라는 궁극의 목표 중 하나인 것이 아니다. 그 수많은 무인들이 단순히 창칼에 상처 입기 싫어 금강불괴를 목표로 하는 줄 아는가. 아니다. 강력하고 단단한 몸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목표인 것이다.
거기에 거체를 유지하는 몸에서 나오는 힘도 대단했다. 하나하나의 공격이 힘의 대명사인 오우거의 공격에 비교해도 약하지 않다. 작은 영지에 나타났다가는 그날로 영지가 초토화되는 것이 당연한 강력함이다.
그렇다고 모이엔이 이런 녀석을 상대로 밀리는 것은 아니다.
쉽게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이엔 역시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긴 창 덕분에 화염 거미의 긴 다리를 잘 받아넘기며 서서히 싸움의 흐름을 잡아 가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결과가 나오겠네.”
이드는 대충 모이엔의 어떻게 이기게 될지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저 전투의 결과 따위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결과가 나와 있는 것과 같은 싸움이다.
겨우 2층에 청색 기사단의 단장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골렘을 만들어 둘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비록 인성은 썩었어도 모이엔의 실력은 진짜니까.
그에 이드는 싸움의 결과나 흐름보다 모이엔의 무공에 집중했다.
“과연, 풍운십팔봉에 분영화와 뇌정화의 검의를 섞었나?”
현재 소드 팰러스에 있는 주요 무공이 그러하듯 모이엔이 익히고 있는 창술 역시 검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다만 온전히 그 형태 그대로는 아니었다. 모이엔이 조금씩 자신에 맞게 개량하고 수정한 부분이 이드의 눈에 보였다.
분명 그 수정은 그의 창술을 더욱 강맹하게 만들고 있었지만.
“잔재주일 뿐이지. 그 잔재주가 자신의 발전을 막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있을 것이고.”
언젠가 그 때문에 좌절하게 될 것이다. 살아 있다면 말이다.
“저런 가르침을 받고도 검후를 배신하다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드의 눈가에 순간 살기가 비치다 사라졌다.
모이엔과 달리 흔적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