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53화
889화
삼조 소속의 인원에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던전에 들어갔던 이건, 들어가지 못했던 이건, 그들이 탐험하지 못한 던전이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삼 조 전에는 일 조에게 그랬다. 사상자가 많았던 이 조에는 사람들이 붙지 않았다. 호기심도 분위기를 가려 가며 부리는 거니까.
평소 친분 있는 사람들이 팔이며 옷자락을 끌어당기자 삼조 인원들이 질색을 했다.
“이봐. 나 땀 흘린 거 안 보여? 좀 씻어야 한다고.”
“어허. 뭐, 그리 급해. 시원하게 한잔하고 씻으면 되지. 하는 김에 썰이나 좀 풀어 봐.” 분위기가 순식간에 시장 바닥처럼 변했다.
막사로 향하던 록마틴 후작이 그 모습을 돌아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 친구들, 두 분 덕분에 비싼 술을 얻어 마시겠군요.”
“술이라니. 괜찮은가요?”
황녀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국가 간의 전쟁처럼 치열하지는 않아도 엄연히 전투 중이다. 그런 상황에 술이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황녀 전하. 우리 제국의 기사들 중 멍청한 자는 없습니다. 각자 알아서 조절할 겁니다.”
이드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라면 몰라도, 강철 같은 체력에 내공을 지닌 기사들에게 맥주 두어 잔이야 물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취하는 자가 있으면요?”
“만약 그런 기본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 있다면 그 즉시 엉덩이를 차서 쫓아내야겠지요.”
대답과 함께 흐흐 웃는 록마틴 후작의 미소가 으스스하다. 진짜 걸리면 엉덩이가 아니라 척추를 접어 버릴 것 같다.
“…..·엉덩이 없는 제국 기사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야겠네요.”
“하하하~!”
이드는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록마틴 후작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사회생활의 지혜인 건지, 유머 코드가 독특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크게 궁금한 사항은 아니다. 그보다 진짜 궁금한 건 따로 있다.
“후작님. 혹시 누가 저 막사를 쓰고 있는지 아십니까?”
“알고 있기는 하오만, 어째서 물으시오?”
이드가 가리킨 막사를 확인한 록마틴 후작이 조금 모호한 표정을 하고는 묻는다.
“별건 아닙니다. 저기만 유독 분위기가 우중충한 데다.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말입니다.”
“청색 기사단장 모이엔 경의 막사라서 그럴 것이오.”
록마틴 후작은 대답하면서도 이드의 실력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기운이라니. 자신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군요. 다른 사람은 없고요?”
“손님이 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사상자를 많이 내고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괜히 찾아가 화를 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같소만, 무슨 이상이 있소?”
“아니요. 기운이 좀 거친 것 같아 물었을 뿐 별거 아닙니다.”
사실 별거 아니지 않다. 모이엔의 기운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단단하게 웅크린 듯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문제였다.
무인에게 기감이란 얼굴을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건 감각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얼굴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때도 적지 않다. 일종의 독특한 신체 특징이라고 할까?
그런 의미에서 저 웅크린 기운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신체 특징으로 치면 눈, 코, 입이 없는 얼굴 정도? 즉,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바로 철벽의 검왕.
‘저자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별말이 없는 걸 보면 후작도 온 걸 모르는 것 같은데.’
알았다면 묻는 순간 가장 먼저 말이 나왔을 것이다. 검왕씩이나 되는 대단한 인물의 방문이니까.
그런데도 말이 없다는 건 모른다는 의미.
어디 영지를 조용히 지나는 것도 아니고, 전투 중인 토벌대에 방문했으면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말이다.
‘즉, 비밀리에 방문할 이유가 있다는 거지.’
문제는 그거다. 이유. 당장 짐작 가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스가 직접 움직일 만한 일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절대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주인 몰래 찾아와 숙덕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이드는 막사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막사 주변의 소리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들리는 건 주변의 떠드는 소리뿐, 원하는 목소리가 없다.
“방음 마법인가? 쓸데없이 준비성은 좋아 가지고. 하지만 이쪽도 도청의 전문가가 있단 말이지. 후후후. 라미아, 할 수 있지?”
‘이 정도야 쉽죠.’
최근 도청 스킬의 숙련도가 가파르게 오른 라미아가 오만하게 대답했다. 사실 탐침을 사용하는 그녀 앞에 방음 마법은 구멍 숭숭 뚫린 치즈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아쉽기도 했다. 지휘부에 들르는 것만 아니면 직접 움직였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라미아의 도청 작업이 움직이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워낙 탐침이 날카롭고 가늘어 땅을 마음대로 기어 다닐 수 있고, 한없이 늘어나는 덕분이다.
이드들이 도착하자 막사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이 박수를 치며 반겼다.
“황녀 전하. 저 노렉, 황녀 전하의 놀라운 활약에 전율했습니다.”
“대륙 역사에 황녀 전하와 같은 활약은…………….”
“황녀 전하…….?
“경이롭게도 삼조의 사상자가 하나도……”
그리고는 경쟁하듯 황녀와 이드에게 달라붙어 아부에 가까운 칭찬을 쏟아 냈다. 어찌나 중구난방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많은 수가 황녀에게 몰려 있어 상대적으로 이드의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7대 3 정도?
그 삼도 일리나, 라미아와 나누고 있어서 그나마 부담이 적었다.
그런 면에서 황녀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 많은 사람을 반짝반짝 여유롭게 웃으며 상대하고 있다. 사방에서 떠드는데도 주도권은 확실히 그녀가 쥐고 있었다.
‘역시 제국 황녀를 아무나 하는 건 아니네.’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돌아보자 라미아가 있다.
‘왜?’
‘철벽의 검왕이요. 막사에서 나갔어요.’
‘벌써? 우리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와 있었나 보네. 그럼 건진 것도 별로 없겠네?’
‘모이엔이 워스에게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인사하는 것 말고는 건진 게 하나도 없어요.’
‘기다리겠다, 라, 그래도 일단 워스와 모이엔이 뭔가를 준비 중이라는 건 알았으니 하나도 없지는 않네.’
기다리겠다. 짧은 말이지만 연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이다. 신호를 기다리겠다. 작전을 준비하고 기다리겠다. 공격을 기다리겠다. 워스가 도착하길 기다리겠다. 등등. 가져다 붙이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들이 무언가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기존 계획에 추가되는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계획일까.’
이드는 주변 사람들을 피해 막사 밖으로 눈을 돌렸다.
순간 이드의 의지에 따라 모이엔의 막사까지 기감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정한 방향을 향해 일그러진 공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워스가 빠져나간 방향이었다. 지금 쫓으면 중간에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빠르게 스러졌다.
지금은 아니다 싶었다. 일단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소드 팰러스에서 왜 삼검왕을 그냥 뒀는데, 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지금 이드가 급히 막사를 나간 후 워스가 사라지면 소드 팰러스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검후가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깨달았다.
‘던전 안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던전 안에서야 무슨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마법과 함정이 사람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눈만 피하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다 워스의 방문은 비밀이기에 대대적으로 조사에 나설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워스가 던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드는 제발 워스가 던전에 들어오기를, 그리고 자신과 마주치기를 빌었다.
무려 삼검왕이다. 소드 팰러스는 물론이고, 검후에 대한 정확한 정보까지 사로잡아 캐내기만 하면 노다지나 다름없다.
“이제 그만 고생한 분들을 쉴 수 있게 놓아 드리도록 합시다.”
생각에 빠진 이드의 모습을 피곤해서라고 오해한 록마틴 후작의 말이었다.
“저는 아직 정령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했는데…….”
그에 토리빈 마법사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들이나 그렇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기하다 정도일 뿐 당장 급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록마틴 후작이 사람들을 진정시킨 덕분에 간단히 보고를 마친 이드들은 생각보다도 조금 일찍 막사로 돌아와 쉴 수 있었다.
오히려 중간에 붙잡힌 아이넬 기사단의 기사들이 이드들 보다 늦고 있었다.
쉬고 있던 쉴라와 은색 기사단이 이드들을 반겼다.
이드는 우선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자 먹이를 기다리던 고양이처럼 케마란이 쪼르르 달려왔다.
“4층까지 단숨에 클리어하셨다면서요?”
“대부분이 힘으로 해결하면 되는 곳이었으니까.”
2층에서 4층까지. 사실 힘만 있으면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오히려 어렵기는 던전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함정과 마법이 설치되어 있던 1층이 더 어렵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힘을 가진 이드의 생각이었다.
“그래도요오. 역시 마스터는 대단하세요오~”
케마란이 웃는 얼굴로 살살거렸다. 이드는 이 되도 않는 애교에 그녀를 향해 돌아앉았다.
“이상하게 말꼬리 늘이지 말고, 할 말이 뭐야?”
“헤헤. 아셨어요? 그런데 제 말투가 이상했어요?”
“어. 상당히.”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하니 어색한 건 당연하다. 케마란은 망설임 없는 이드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였다.
“저도 나름 예쁘다는 소리 듣는다고요.”
“누가 뭐래?”
“이드, 찻잎을 우리는 중인데, 줄까요?”
그때 타이밍 좋게 일리나가 물었다. 그녀 역시 씻고 나와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케마란이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봤다. 과연 순결한 숲의 요정. 여자가 봐도 아름답다.
“칫, 마스터는 눈이 높아 좋겠어요.”
“고맙다. 훗.”
이드가 여유 있게 가진 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 케마란이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링스피어가 들려 있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너무 적어요.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없어. 네가 강해지는 수뿐이야.”
이드가 단호하게 답했다. 링스피어에 대한 일은 링스피어가 깨어난 날 이미 확인을 마친 터다.
꾸준한 분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우선 중요한 것들을 모두 알았다.
특히 링스피어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변형 불가였다. 사용하고 싶으면 강력한 내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몇 번을 확인한 후에도 케마란은 아쉬움을 쉽게 접지 못하고 있었다.
“그보다 다른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연결은 여전히 안 되고 있는 거야?”
“……네. 전혀요.”
한번 끊어진 연결이지만, 혹시나 싶었다.
잠시 후 이드는 일리나가 가져다주는 차를 마시며 우울한 케마란을 구경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지난 후.
“와아아아!”
사조가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