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454화


890화

“앗! 사조가 나왔나 봐요. 마스터. 우리도 나가 봐요.”

우울한 표정으로 바닥만 찌르고 있던 케마란이 발딱 고개를 들었다.

그 손에 잡혀 막사를 나온 이드의 눈에 던전에서 나오고 있는 사 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는 적색 기사단이 당당하게 서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신색이 나쁘지 않은 것이 무난하게 공략을 마친 것으로 보였다.

“사 조도 사상자가 없나 봐요.”

케마란의 말대로였다.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람도 없는 것으로 보아 사상자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이러면 이 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 않을 수 없겠는데.”

가령 이 조에 속하지 않아 다행이라거나.

“갑자기 이 조 기사들이 불쌍해졌어요.”

라는 식의 말 말이다.

이드는 노인네처럼 끌끌 혀를 차는 케마란을 힐끗 내려다봤다. 말과 함께 청색 기사단에 대한 험담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모르긴 몰라도 저 험담의 출처는 모두 은색 기사단의 선배 기사들일 것이다.

“너도 은색 기사단 소속 기사 다 됐구나?”

“음…… 칭찬이죠?”

“음・・”

가자미눈이 된 케마란이 확인하듯 물었다.

이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을 피하고는 사조에게 다가가는 록마틴 후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첫 공략이라서인가. 각 조가 던전을 나올 때마다 직접 나와 반기고 있다.

다만 이 조도 직접 반겨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묘한데.”

던전을 나오면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인데. 특이하게 사 조는 아직 주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적색 기사단을 비롯해 선두에 서 있는 상위 기사들에게서 특히 강하게 들었다.

해서 유심히 보고 있는 중에, 라발이 뒤에 있던 기사에게 망토에 싸여 있는 물건을 받아 록마틴 후작 앞에서 천천히 펼쳤다. 그 안에는 작은 상자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지금 라발 단장님이 손에 들고 있는 상자. 그거 맞죠?”

“끄응.”

어느새 따라 나온 라미아가 속삭이는 소리에 이드가 머리를 짚었다. 시선은 여전히 상자에 놓였다. 백 미터 밖에 있는 개미의 다리털도 볼 수 있는 이드의 눈에는 상자가 코앞에 있는 듯 똑똑히 보였다.

모양과 크기, 룬과 마법진이 새겨진 특징까지. 분명 프리실라의 상자였다. 이드가 그걸 어디 한두 개 부쉈던가. 거기에 라미아에게 주려고 보관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 안에 든 것까지 생각하면 쉽게 잊기가 힘든 물건이다.

“그런데 저게 왜 라발 단장의 손에서 나와?”

“그러게요. 이래서야 이드가 하나하나 부숴 버린 게 의미가 없겠어요.”

정말이다. 혹시라도 제2의 초인 마법 같은 걸 목표로 하는 놈들이 나올까 싶어 부쉈던 것인데. 이렇게 제국의 손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그런 두 사람의 사이에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케마란만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드가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라발의 손에 들린 상자를 기분 나쁜 표정으로 노려보던 록마틴 후작이 곧 고개를 들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 사조의 노고를 칭찬한 후 라발과 함께 지휘부 막사를 향했다.

그사이 록마틴 후작의 명령에 다수의 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중 하나가 곧장 이드들을 향해 다가와서는 황녀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두드렸다.

“록마틴 후작께서 세 분께 방문을 요청하라 하셨습니다.”

기사가 말하는 셋은 당연히 이드와 황녀. 그리고 어느새 황녀와 나란히 선 쉴라를 말하는 것.

“이럴 것 같더라니. 같이 가시죠.”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나서자 황녀와 쉴라가 당연한 것처럼 따라붙었다. 케마란은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고 따라가게 해 달랬다가 라미아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와 비슷하게 지휘 막사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자작 급 이상의 귀족들과 기사단장이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사조가 나와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모이엔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사가 가까운 덕분인가.

이드들이 가장 먼저 막사에 도착해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마틴 후작과 라발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 탁자 위에는 붉은 망토에 싸여 있는 문제의 상자가 놓여 있었다. 셋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세 사람의 지정석이다.

아무리 야전의 막사라고 해도 자리에 예민한 귀족들 때문인가. 막사 안의 자리는 한번 정해진 후 지금까지 그 위치가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토벌대 안의 주요 인사들이 하나둘 모여 자리를 채워 나갔고, 모두 차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막사의 문이 닫힘과 동시에 록마틴 후작이 눈을 떴다. 그는 스캔하듯 좌중을 한 번 쓸어 본 후 입을 뗐다.

“급한 소집에도 빠르게 모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모두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조가 5층을 클리어한 후 복귀했습니다.”

단 한 층만 클리어하고 올라온 사 조였다. 평소라면 잘했네 못했네 말이 많을 테지만 이번엔 조용했다. 록마틴 후작 앞에 놓여 있는 상자 때문이다. 

“사 조는 신중한 전진으로 말미암아 5층을 클리어하는 데 큰 사상자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데, 클리어를 마친 5층에는 그 위층과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

록마틴 후작이 말과 함께 망토를 치우고 그 안에 든 상자를 내보였다.

복잡한 생각이 담긴 시선이 상자로 모여든다. 시선에 무게가 있다면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상자가 뭉개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뜨거운 시선이다.

“이 상자가 짧은 메시지와 함께 5층의 끝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메시지의 내용이 뭡니까?!”

성격 급한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록마틴 후작이 사납게 상자를 노려본 후 라발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아 상자 옆에 놓았다.


-이곳까지 온 그대들의 용기와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초인 마법은 충분히 감상하였는가.

그대들의 감상이 참으로 궁금하다. 하여 내일 그 감상을 들으러 가려 한다.

이 상자는 용맹과 도전에 대한 보상이다. 이 상자를 이용할 경우. 상자에 각인된 초인기를 사용할 수 있다.

미완의 마탑 탑주 키릴 베이몬


실로 고압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마치 제국이 공국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할까?

‘후작이 화날 만하네.’

처음 상자를 볼 때부터 인상이 좋지 않더라니. 이유를 알 것 같다. 제국의 후작인 그가 언제 저런 취급을 받아 봤을까.

거기다 가장 웃긴 것은 내일 감상을 들으러 온다는 부분이다.

오만을 넘어 미친 게 아닐까 싶은 글이다. 물론 제정신이라면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이다. 전날 영상으로 나타난 것처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록마틴 후작으로서는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미 저들이 숨어 있는 던전을 파 뒤집고 있는 토벌대를 직접 찾아온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어지간히 만만히 보인 모양이군요.”

“명예 후작의 말대로요. 저들에게 우리 토벌대가 만만하다 못해 우습게 보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거 여러분들께서 좀 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습게 보지 못하지요. 허허허허.”

필터링 없이 입으로 흘러나온 이드의 말을 받은 록마틴 후작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왜 이렇게 소름이 돋는지, 또 입은 웃는데 왜 눈은 저리 살벌한지 모르겠다!

그런 록마틴 후작의 모습에 사람들이 기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무렴 당연하지요!”

“허허. 실로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정신 이상자가 틀림없습니다.”

“저러니 제국 안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이 급히 분위기를 풀기 위해 록마틴 후작이 원할 만한 말을 주절대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날카로운 분위기를 몸에 감은 여자작이 토리빈 마법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과연 내일 온다는 저자의 말이 사실이겠습니까. 기만이겠습니까. 토리빈 마법사님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음? 뭐라고?”

탁자에 올려진 상자를 마치 보물처럼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토리빈 마법사가 뒤늦게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을 알고는 대답했다. 한데 대답을 하면서도 연신 상자로 눈이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 같다.

“내일 오겠다는 게 진짜일지 가짜일지 말입니다. 같은 마법사이시니 저들이 무슨 생각인지 혹시 짐작 가는 것이 있으신가 해서요.”

“글쎄. 마법사들이 원래 자기 개성이 너무 강해서 말이네. 어디로 튈지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네. 하지만 공통된 사실은 고위 마법사일수록 허언은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기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멍청이는 없다는 것이네.”

“그 말씀은 저 글을 쓴 자가 내일 방문할 거라는 거군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지. 그리고 확실히 본인이 자기 몸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마법을 이용하면 자신의 몸이 아니라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루젼을 통한 환영이나, 대중적인 패밀리어, 또는 마이너하지만 정신 지배라는 악독한 방법이나, 호문클루스라는 생체 인형을 제작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온전한 방문이라고 하기는 힘들어도 본인이 직접 방문했다고 인식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 그런 방법을 써서 나타났을 때, 그자를 구속할 방법은 있겠습니까?”

“적당한 방법들이 있으니, 다양하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보다 후작님. 제가 상자를 자세히 볼 수 있겠습니까?”

“분석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보여 드려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당연히 보여 준다는 말에 활짝 피던 노마법사의 얼굴이 ‘하지만’에 한순간 울상이 되었다. 그 표정에 질문을 던진 여자작이 고소를 지었다. 록마틴 후작은 그런 상황을 무시하고 이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상자에 대해서는 감시조로 저들과 먼저 전투를 벌였던 명예 후작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겠소. 혹시 이 상자가 명예 후작이 말했던 그것이오?”

상자를 구해 넘기진 않았지만, 보고서에는 언급했던 이드였다.

“일단 외형은 동일합니다.”

잠시 턱을 쓸며 생각을 정리한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몰랐다면 그냥 넘겼겠지만, 저렇게 당당히 내어놓는데 어쩔 수 있나. 작게 한숨을 쉰 이드가 상자에 손을 뻗었다.

“잠시 확인을 좀 하겠습니다.”

끄덕.

록마틴 후작의 허락에 이드가 상자를 집어 들자 토리빈 마법사가 손을 내저으면서 애절하게 외쳤다.

“조, 조심 좀! 중요한 물건이니 명예 후작은 부디 조심히 다뤄 주시오.”

누가 보면 자기 집 가보를 막 다루는 줄 알겠다.

이드는 마법사의 반응에 내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상자는 그렇게 쉽게 상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검이나 도끼는 물론 검기로도 쉽게 벨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니까요.”

이드는 상자를 든 손에 내력을 주입했다.

미풍처럼 섬세하고 미세한 내력이 상자를 감싸며 상자에서 유동하는 마법을 감지해 냈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물건이군. 하기야 탑주 체면에 하자가 있는 걸 선물이랍시고 내놓지는 않았겠지.’

이드는 순간 갈등했다. 막힘없는 마나의 유동으로 보아 이 상자 안에도 초인의 머리가 들었을 텐데, 과연 이대로 둘 것인가. 평안을 줄 것인가. 지금 흥분해서 눈이 뒤집어진 토리빈 마법사를 봐서는 머리만 남은 초인에게 평안을 줄 것 같지는 않지만,

힐끗,

여전히 굳은 표정의 록마틴 후작을 비롯해 다른 기사들, 특히 일반 초인들을 보면 괜찮을 것도 같다.

이드는 이번 기회에 토벌대의 성향을 확인해 보자는 생각에 방사하던 내력을 회수하고는 말했다.

“분명하군요. 저들이 마수에 박아 사용하던 초인의 능력을 봉인한 상자입니다.”

“오~ 초인 마법!”

이드의 인정에 토리빈 마법사가 환호성 같은 탄성을 터트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