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66화
902화
뿌연 먼지 속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잎 같은 붉은 검기.
생각지 못한 적의 침입에 반사적으로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던 자들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끄륵!”
고통에 찬 비명도, 마지막 단말마도 없었다. 난화의 꽃잎 한 장 한 장에 추적기라도 달린 듯 백발백중 적의 머리와 심장을 꿰뚫어 절명시켰기 때문이다.
애초에 물질 투과라는 초인기 말고는 다른 능력을 가지지 못해 기습 때조차 육신의 힘만으로 병기를 휘둘러야 했던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검기를 막을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물질 투과를 검기까지 투과시키는 단계에 오른 이도 없었고.
후두두둑.
이드를 향해 달려들던 수십의 인원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후루루 쓰러졌다. 순간 장내에 소름 끼치는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그도 한순간. 이드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파악한 자들을 마지막 수단을 택했다.
“으아아악!”
“도망쳐!”
물론 모두 도망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콰드드득.
곰수인처럼 변한 초인이 도망가려는 초인 하나를 잡아 산 채로 찢으며 소리쳤다.
“쿠아앙! 누가 도망을 가느냐!”
“싸워라! 그게 너희 일이다. 도망가는 놈은 무조건 죽는다!”
“마탑에 영원한 충성을 보여라! 다시 노예가 되고 싶으냐!”
그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명령이 아닌, 폭력으로서 병력을 통제하는 자들.
“지휘관이 아니라 통제관이나 감독관인가?”
중간에 섞인 노예라는 말을 들어보면 더욱 그럴듯하다. 확실히 땅을 통과하는 초인기만을 가진 자들과 달리 공격 능력을 가진 듯 보였다.
“무기 들고 공격해! 네놈들 뒤에는 우리가 있다!”
“틈을 만들어라! 어차피 적은 하나, 컥……!”
“미안. 내가 뒤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놈을 싫어해서 말이다.”
사기를 올리려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를 질러 대는 놈 중 하나의 머리를 터트려 버린 이드가 서부의 건맨처럼 손가락 끝을 훅 하고 불고는 고개를 들었다.
물질 투과의 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서 손보다 혓바닥을 먼저 움직이는 놈들까지. 기습만 아니라면 조원들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에게도 이기지 못할 놈들.
따악!
판단과 동시에 이드가 손가락을 튕겼고, 대지의 정령이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구구구구구!
작은 진동과 함께 천장에 뚫려 있던 구멍이 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타탁,탁, 타타탁.
구멍으로부터 기사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냥 떨어지는 것도 느려, 수직으로 뚫린 구멍을 달려 내려온 듯 기사들이 순식간에 수십으로 늘어났다. 이드는 사자 같은 살기를 뿜으며 도열하는 기사들을 향해 미소 짓고는 말했다.
“아직도 내가 혼자 같아 보이나?”
도리도리.
그중 한 놈이 고갯짓으로 답한다. 이드만으로도 감당이 힘든데, 수십의 기사까지. 거기에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것에 정신을 반쯤 놓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기사들은 적들을 척결하라.”
이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기사들과 초인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명예 후작님의 명령이다. 제국의 적을 베라!”
“사,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도망쳐!”
기사들은 초인들을 향해 초인들을 반대로 기사들이 없는 벽을 향해 물질 투과를 써서 땅속으로 도망가려는 것이다.
“어딜. 내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지. 가랏, 범고래!”
‘나? 내가 범고래?”
원래라면 소환자의 이미지에 따라 바로 튀어나갔어야 할 대지의 정령은 범고래라는 생소한 이름에 이드를 올려다본다.
대지의 정령에게 바다에 사는 범고래라니.
“미안. 가랏, 그룸!”
다다닥.
이드가 제 이름을 불러 주자 그룸은 그제야 움직인다. 꼬마의 모습을 한 그룸이 다다닥 뛰어가다 물에 뛰어들 듯 땅속으로 퐁당 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룸은 어딜 간 것이 아니었다. 그 존재를 넓게 퍼트려 밀실을 자신의 존재로 감싸 안은 것.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난 직후 초인들이 물질 투과의 초인기를 사용하며 사방 벽으로 몸을 날렸고.
퍼퍼퍽!
“끄아악. 내 머리!”
“커흑! 벽이 단단해!”
그들은 모두 머리가 깨지고, 내장이 뒤집히는 충격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그중에는 정말 머리가 깨져 죽은 자도 몇 있었다. 단단한 돌덩이에 헤딩을 했으니 당연하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이 있지만, 조심해야 할 소리다. 진짜 맘먹고 했다가는 지금처럼 죽어 버리니까.
하지만 죽지 못한 초인들의 얼굴도 좋은 것은 아니다. 불신과 절망이 범벅이 되었다. 유일한 살길을 찾아 몸을 던졌는데, 막히다니. 그들과 반대로 초인들이 땅속으로 도망가지 못함을 알아차린 기사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생겼다.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대로네. 제깟 놈들이 아무리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난리를 쳐도 범고래를 이길 순 없지.”
물질 투과를 써서 땅속을 마음대로 다니는 자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냥 땅이 아닌 상급 정령이 지배하는 특수한 영역을 물고기처럼 넘나들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제대로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나 잘했어?’
“그럼. 아주아주 잘했지. 네가 최고야.”
이드는 옆에서 솟아난 그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진심을 담은 칭찬은 어린아이와 정령을 쑥쑥 자라게 하는 최고의 비법이다.
‘나도 범고래가 좋아.’
범고래의 이미지를 전달받은 그룹의 말이다. 다음에는 범고래라고 해도 소환될 것 같다.
그렇게 땅의 정령이 퇴로를 막는 사이 기사들은 집단을 베어 넘기듯 초인들을 베어 넘겼다.
퇴로를 차단당한 초인들이 죽기 살기로 반항했지만,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쥐가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지만, 그건 쥐와 고양일 때의 이야기.
지금 초인과 기사들의 차이는 쥐와 표범. 이만하면 물기는커녕 손톱자국 하나 남길 가능성도 없다.
덕분에 초인들을 모두 베고 난 후 오히려 기사들이 허탈한 표정을 했다. 겨우 이런 자들에게 그런 피해를 입었다니. 그나마 힘없는 초인들을 닦달하던 놈들의 반항이라도 없었으면 억울할 뻔했다.
“충! 삼조 소속 기사 전원, 명예 후작님의 명령을 수행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다. 따로 부상자는 없고, 적 생존자도 없군.”
따로 보고도 필요 없다. 슥 돌아보는 것으로 모든 정황의 파악이 끝났다.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보고를 마친 기사가 그 말과 함께 이드를 밀실의 한구석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기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땅속으로 끌려간 기사들이었다. 심한 부상을 당해 죽은 자도 있지만, 대부분 질식사한 것으로 보였다. 초인기도 없이 기사들이 땅에서 숨을 쉴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마법사를 불러 기사들의 시신은 수습하도록. 제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죽었으니,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 줘야지. 내가 볼 것은 이게 다인가?”
“아닙니다. 두어 가지 특이사항이 더 있습니다.”
“별것도 없는 밀실에서, 짧은 시간에 많이도 알아냈군.”
이드의 칭찬에 고개를 숙인 그가 다음으로 이드에게 보인 것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깃발이었다.
각각 붉은 소와 땅에 박힌 채 사슬에 감긴 창이 그려진 깃발.
기사는 두 깃발이 각각 마스 왕국와 저 섬나라 하르카에 있는 노예병단의 깃발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들을 관리하던 자 중 하나가 노예라는 말을 꺼내긴 했는데. 그럼 이들이 다 노예라는 말인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여길 보시겠습니까.”
말과 함께 기사는 쓰러진 초인의 등쪽 옷을 갈랐다. 그러자 두 개의 깃발 중 붉은 소가 등에 새겨져 있었다.
노예를 뜻하는 인장이었다.
“노예병단이라. 그레센에서 노예는 대부분 불법이 아니었던가?”
노예가 불법으로 정해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초인의 각성 때문이다. 언제 노예 중 초인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그럴 경우 노예가 주인을 죽이거나, 복수를 하거나, 나라에 대항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많은 나라에서 노예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마스와 하르카는 두 나라의 독특한 문화와 지정학적 문제로 아직 많은 노예를 두고 있습니다.”
이드는 몰랐던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노예병단이 여기 있는 건 두 나라와 관계가 있을 것 같은가?”
“확답하기는 어려우나,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노예병단의 노예는 금액이 적당하면 구매가 가능하니까요.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나라에서 초인들을 노예로 팔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초인으로 각성하는 순간 신분 이동은 자동이다.
노예건, 평민이건 각성하는 순간 초인일 뿐. 이전의 신분은 중요치가 않다. 즉, 초인기를 각성한 이들은 노예로 팔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팔렸다?
“그럼 간단하군. 팔릴 때는 노예였다는 거지.”
“네?”
기사의 반문을 흘려 넘긴 이드가 등을 보인 시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 보다 한곳을 가리켰다.
“여기. 자세히 보면 저기 목 아래쪽까지 길게 절개한 자국이 보이지?”
“그럼?”
“이자는 마탑의 인체 실험으로 만들어진 초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기사들의 시신과 함께 초인들의 시신도 몇 구 챙기도록 하지. 메이슨 마법사가 좋아하겠군.”
어디 메이슨뿐일까.
당장 이드의 명령에 달려온 마법사들부터 쓰러진 초인들이 인체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소리에 군침을 줄줄 흘렸다. 그러면서 각자 한 구씩의 시신을 따로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동시에 마탑이 어떤 방법으로 이만큼이나 많은 자들에게 동일한 초인기를 부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쏟아내기 바빴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당장 이 밀실에서 심도 깊은 마법 토론이 벌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이드는 마지막 정리를 기사들에게 맡겼다. 마법사들에게 맡겼다가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 후 어기충소를 이용. 백 미터의 통로를 한 번의 도약으로 통과했다. 그사이 삼 조는 황녀의 명령에 따라 철저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이드가 그중 황녀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모두 이드의 수고를 말하며,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했다.
기사들이 들어간 후 비명성이 울리다 그친 후 마법사들이 추가로 들어간 것을 보면 일이 끝난 것 같긴 한데, 자세한 사정은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이드는 밀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말했고, 일리나와 라미아를 제외한 사람들은 역시라며 감탄했다.
“불의 중급 정령만 해도 대단한데, 땅의 정령과도 계약하고 있으시다니.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하하하, 이거 설마 사대 정령을 모두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말입니다.”
농담처럼 건넨 이야기에 나온 대답을 들은 좌중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대 정령을 모두 부린다는 뜻인지, 운이 좋아 땅의 정령과 계약을 했다는 뜻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이어지는 라미아의 말에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초인기가 정령의 힘에 그렇게 쉽게 통제된 것은 의외네요. 어쩌면 초인기의 상극이 정령일 가능성도 있겠어요.”
새로운 가설이다.
하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인간들 중 정령사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걸로 6층은 클리어한 것일까요.”
“설마요. 넓이를 생각하면 이 인원은 어림도 없습니다. 대신 공략법을 알았으니, 나머지는 쉽겠지요.”
어두운 통로 너머를 바라보는 이드의 눈에는 벌써 그 끝이 보이는 듯하다.